우리는 지난 한 주간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의 그 은혜와 그 사랑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깨닫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그러나 죄와 사망의 사슬을 끊고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극복이요, 바로 생명의 승리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것 같아도 그것들은 결국 죽음 앞에서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생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커다란 착각입니다. 죽음 뒤에 있을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그 인생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작년 한 해에 우리나라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 37만 2,800명이라는 최종통계가 나왔습니다. 작년 한 해에 37만 2,800명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광진구의 전체 인구가 34만 2,812명인데. 그렇다면 37만 2,800명은 광진구에 사는 사람들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1년에 광진구 인구가 저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시편 저자가 표현한 것처럼 마치 홍수가 쓸어가듯이 죽음이 사람들을 끌고 갑니다.
우리 중에는 죽음을 환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죽음의 능력을 거부하거나 그것에 도전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아무리 힘이 센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그 힘이 무용지물입니다. 천하를 호령할 만한 기개나 권력도 죽음을 피하게 해 주지 못합니다. 죽음은 사람을 가리지도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허무해져 버립니다. 죽음은 생명을 가장 초라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죽음의 횡포나 그 죽음으로 인해 인간이 당하게 된 처절한 고통은 말로다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너무나 잔인한 죽음의 횡포는 예수님도 울게 만들었습니다. 요11: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오누이의 간청으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유족들과 그들을 찾아온 사람들이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습니다.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다크뤼센(edakrusen)' 인데, 이 말은 막연히 '눈물을 흘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는 강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인간에게 안겨 주는 슬픔과 절망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하나님 자신마저도 눈물 없이는 그것을 지켜볼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1. 죽음 앞에 예수님도 우셨다.
성경은 눈물을 흘리시던 주님의 감정을 두 마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에 사랑하는 자를 죽음에 빼앗기고 슬퍼하며 고통하는 그 사람들의마음을 고스란히 받으셨고, 그들과 똑같은 심정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겪는 이 죽음의 공포와 슬픔을 놓고 눈물을 흘리실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아픈 감정을 함께 나누시는 하나님으로 지금 서 계시는 것입니다.
Ⅱ.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진리
그러나 주님이 흘리신 눈물은 패배와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기를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님은 비록 눈물을 흘리시고 계셨지만 "나는 부활이다. 나는 생명이다"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을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이며, 아직 죽지 않고 믿는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육신의 죽음이 주님 보시기에 진정한 죽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죽음이 없어진 사람들입니다. 죽음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는 죽음을 기다리는 자들이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 있어 죽음은 잠자는 것일 뿐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나사로의 죽음을 잠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권위 있는 말씀입니까? 자신이 죽음을 극복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이요 부활이 되시는 구세주가 된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 보세요.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그의 무덤은 굴로 되어 있었는데, 큰 돌이 그 입구를 막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예수님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며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39절). 이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는 지금 "이미 죽어 부패하고 있는 마당에 무덤 입구를 열어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살리라" (23절)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사고는 언제나 믿음과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합니다.
인간의 이성적인 생각은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데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인간의 생각과 감정에 의해서 결코 제한 받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인간적인 생각을 꾸짖었습니다. "마르다야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40절).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왜 내 말을 네가 믿지 않느냐? 왜 나를 의심하느냐?" 하고 추궁하시는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주님은 기도를 마치자마자 무덤을 향해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정말 기가 막힌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상력이 풍부하다면 그 장면을 한번 그려 보고 싶은데, 아무리 잘 그리려고 해도마치 컵으로 바닷물을 뜨는 것처럼 부족할 따름입니다. 무덤 안에는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 메아리쳤습니다. 잠시 후에 수의를 걸친 나사로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습니다. 주님은 그 수의를 풀어 주어 자유롭게 다니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은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자유도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써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실제적으로 증명하셨으며, 며칠 후에 그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실것을 미리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 끝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하늘의 별과 같이 무수한 성도들이 천사의 나팔 소리를 듣고 무덤에서 일어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당시에는 헬라 철학이 사람들의 생각을 꽉 쥐고 있었습니다. 그 헬라 사상 가운데 '부활 불가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영향을 받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부활을 안 믿는다는 말을 듣고는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자기도 예수님을 못 만나야 됩니다. 그런데 엄연히 살아계신 주님을 본 바울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약 부활이 없다는 게 사실이라면 먼저 복음을 위해 살다가 간 자들과 자기 또한 얼마나 비참한 자가 되것인가를 피를 토하듯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전15:1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고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
그런데 바울만 불쌍합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렇게 찬양을 준비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바쁜데도 불구하고 아산에서, 포천에서 이 저곳에서 오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오신 분들이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고, 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 왜 지금 여기 와 있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 주님은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일으킬 때
Ⅲ. 마음의 돌을 옮겨 놓으라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마음의 돌을 옮겨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기에 앞서 돌을 옮겨 놓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직접 그 돌을 옮겨 주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지만, 돌을 옮기는 것은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죽는 우리를 날마다 살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지만 돌을 옮기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을 무덤처럼 만드는 돌은 무엇입니까? 불신앙입니까? 아니면 마르다처럼 따지는 신앙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돌입니까? 이 돌이 가로막고 있는 이상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는 생명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입니까?
그 돌을 빨리 옮기십시오.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선택하여 믿는 신앙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까? 그 돌도 옮기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는 드리지만 마음이 전혀 열리지 않아 딴 생각만 하다가 돌아가는 분이 계십니까? 그 세속적인 생각의 돌을 옮기십시오. 그 돌을 옮길 때 주님이 드디어 여러분의 심령을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외치십니다. 그때 내 안에 다시 부활하는 생명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패배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살던 사람들에게 주님의 부활은 더 이상 무력한 삶을 살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 부활의 소망의 확신을 가진 자들은 정말 세상에서 미친 듯이 한 생을 주를 위해 살았습니다. 부활신앙은 너무나 황홀한 꿈이기에 이 꿈 때문에 한 생을 완전히 주님 앞에 온전하게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젊음을 바치는 자도 있습니다. 세상적인 야망이나 세상 적인 꿈을 접어두고 오로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일을 위해서 한평생을 불태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가정의 행복도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건강마저도 돌보지 않다가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꿈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 자기를 활활 태우다가 죽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신 대로 그들은 주머니를 차고 다니기를 거부했습니다. 두벌 옷을 입고 지팡이를 들고 다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생을 선택하고 그 가난을 가지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 생을 바치는 위대한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 신앙은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기 때문입니다.
요즘 밖에는 4월이 되자 날씨는 완연한 봄이 됐습니다. 산수유, 개나리, 목련, 그리고 벚꽃까지 그야말로 온천지가 꽃 대궐입니다. 불과 얼마 전만해도 얼어붙은 것 같던 대지가 큰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잠자던 것들이 깨어난 것처럼, 그리고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그 주님 앞에 나의 삶을 드리십시다. 오늘 이 부활의 아침에 우리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사명을 회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사명, 전도의 사명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부활의 이 아침! 부활의 능력을 입혀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야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타성에 젖은 모든 묶여 있는 것들이 무덤을 가르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풀려져야합니다. 질병에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물질과 사업이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이제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이 바람이 우리 가정과 한국교회와 우리사회를 흔드는 모든 세속의 바람들을 무력화시키는 거룩한 태풍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의 증인 자로 값진 인생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내 생명이 남아 있는 한, 나의 삶의 한 복판에서 나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그 사랑을 그, 십자가의 사랑을 세상 앞에 쏟아 놓는 거룩한 삶이 날마다, 날마다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