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희망을 노래하라(벧전 1:3-7)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3-04-16 |
조회: 306
우리는 지난 주 장신대학교에 위치한 한경직 기념관에서 2000여명이 함께 모여 부활절 연합 찬양예배를 드렸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3년동안 함께 모이지 못했던 처지라 처음 이 모임을 계획할 때만해도 광진 연합회에서도 그냥 한 교회에서 부활절 행사를 시작하자고 할 정도로 연합 모임의 큰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신반의하며 시작했는데 여러분도 보셨지만, 그날 우리가 불렀던 찬양은 아직도 그 감격이 가셔지지 않을 만큼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부활의 기쁨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가 아시는대로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는 더 이상 패배자로 살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무엇보다 부활의 신앙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난 3년이나 우리를 힘들게 했던 코로나의 두려움을 서서히 벗어나 이젠 마스크를 벗을 정도로 모든 주변의 환경이 변했습니다. 이제 서서히 코로나의 길고 어두웠던 터널 그 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긴장의 끈을 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영적인 위기는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모이기를 힘쓰지 못했습니다. 맡은 바 사명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코로나사태라는 특별한 상황 때문이라는 이유로, 교회도 그렇고 성도들 자신도 스스로 양해해왔습니다.
그런데 코로나이후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다시 모이기를 힘쓰며 또 맡겨주신 사명에 그 전처럼 헌신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안에 영적인 태만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자칫 우리에게 영적인 큰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점을 내다보아야 합니다. 영적인 태만을 떨쳐버리지 못하면 우리가 믿음이 약해지고, 심할 경우 믿음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국내적으로 아직도 나라의 살림을 끌어가는 정치인들은 당리당략에 혼란 속에 빠져있고, 경기침체로 인해 서민들의 마음은 무겁기가 한이 없습니다. 이러한 때 교회는 부활의 희망을 안고 새로운 각오와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본문은 우리에게 엄청난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도무지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그들에게 놓인 숱한 문제를 극복하고 마침내 승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이 놀라운 비밀을 이 아침에 만나보려고 합니다. 주후 64년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해였습니다. AD 64년 7월 19일 로마에 대 화재 사건이 일어납니다. 로마 거의 전역에 영향을 줄만큼 큰 화재였습니다. 화재가 진압된 후 여기 저기 널려진 폐허의 잿더미가 로마 시민들의 마음을 황폐하게 할 무렵 로마시에는 한 악성 류머가 소리 없이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로마제국의 황제 네로가 술에 취해 자신의 시흥을 돋구기 위해 로마시를 방화한 것이라는 소문이었습니다. 네로는 이 소문을 잠잠케 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희생양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 희생양으로 등장한 것이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곧 이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체포 명령이 내려지게 되었고 여기저기서 피 비린내나는 처형이 이어지게 됩니다. 살아남은 그리스도인들은 카타콤의 동굴로 숨어들기 시작했고 적지 않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를 떠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해외 여러 지역 특히 소아시아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로 이 청난 핍박을 피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지고 흩어질 수 밖에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격려하기 위해 이 편지가 쓰여지게 된 것입니다. 이 편지의 주제는 희망입니다. 이런 시대의 어둠속에서도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쓰던 1세기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는 분명 다른 시대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희망을 위협하는 전 세계 77억이 넘는 인구에게 불어닦친 코로나의 후유증,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과 대립, 민족 내부의 이데올로기와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조롱과 박해가 세계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이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희망이 아닙니까? 희망은 여전히 우리가 갈구하는 목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전히 이런 절망적인 세상에서 희망을 갖고 살아갈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Ⅰ. 부활하신 주님의 궁휼 때문입니다. 3절
3절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3절에서 우리가 주목할만한 한 단어는 ‘산소망’이라는 단어입니다. 살아있는 소망. 살아있는 희망이라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베드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흩어졌던 당시의 크리스챤들에게 그들이 아직도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형편에서 이들은 산 소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까?
지금 본문은 우리를 향한 그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히 여기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긍휼’이란 무엇입니까? 흘러넘치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한없이 약하고 악한 사람들을 대할 때 보여 주시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 은혜 앞에 서게 되면 달라집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누구보다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도 했지만, 고난당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그가 한 일은 오로지 주님을 부인하고 심지어 저주까지하는 부끄러운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배신을 한 것입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이런 사람을 쓰겠나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습니까? 너무나 부끄러운 상황이었습니다. 닭이 세 번 울자 자신이 지금 어떤 일을 했는지 깨닫고 대성통곡과 오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 순간, 주의 긍휼하심을 깨닫고 대성통곡하면서 회개를 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패배를 숙명처럼 알고 산 사람이 아닙니다. 그 긍휼하심 앞에 그는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핍박을 감수하며 복음을 담대히 전합니다.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행2:41절을 보십시오. “그(베드로의)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하루에 3천 명이 예수 믿고 세례를 받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이렇게 해서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시작된 겁니다. 그는 마지막에는 복음을 증거하다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합니다. 비단 베드로뿐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궁휼하심을 입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복음의 빚진 자로 부활의 산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Ⅱ. 하늘나라 기업의 예비하심 때문입니다. 4절
4절을 읽어보십시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하늘나라의 소망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확실한 보증된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약속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 시대에서 가장 우리 귀에 젖은 단어 하나가 있다면 기업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자고 일어나면 들어 오는 소리가 기업소리에요. ‘기업이 부도났다. 도산됐다.’ 요즘 아파트를 7만채를 지었는데 입주자가 없으니까 무려 30%를 깍아 주어도 아파트를 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걱정이 있습니다. 계속 분양이 안되면 건설업체가 부도가 납니다. 또 돈을 빌려준 은행이 도산하는 것은 자명합니다. 이 기업이 연쇄적으로 무너지기 때문에 모두가 불안해 합니다. 우리는 IMF때 국가가 부도 직전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 위기가 지금 서서히 몰려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기업이라는 단어는 성경에도 아주 익숙한 단업니다. 이것은 심지어 1세기 크리스챤들에게도 아주 익숙한 단어였어요. 그들도 자기들의 기업이 무너지고 빼앗기는 경험을 했습니다. 여러분 1세기를 살았던 순교자들의 그 대담한 신앙의 모습 어디에서 왔습니까? 야생동물의 밥으로 그들의 몸뚱이가 던지움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 찬양을 부르면서 원형 경기장을 걸어가던 1세기 크리스챤들의 그 담대함 천국신앙이예요. 천국 믿었어요. 이 타계신앙이 라는 것은 그것이 이 타계적 영향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이 오늘의 삶을 바꿔 놓습니다. 천국을 믿는다면 오늘의 삶이 달라져요. 자, 내가 이 땅에서 좀 손해를 봐도 지금 당장 조금 잃어버려도 주께서 영원한 것을 준비하셨다. 초연할 수가 있잖아요.
제임스 그레이라는 유명한 신학 학 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향길 가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길 도상에서 조그만 어려움이라야 내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추석 때 혹은 구정 설날 때 보면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지 않습니까? 꽉 메워지잖습니까? 고향 가는 사람들 아마 그 고생을 하면서 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결심을 할 것입니다. 내가 다시는 고향에 가나 봐라. 금년이 마지막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또 가요. 네, 고향에 딱 도착하는 순간 다 잊어버리거든요. 고향에 찾아온 기쁨이 그동안의 힘듬을 다 잊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저 천국에 영원한 소망이 확실한 것이라면 그 길 도상에서 우리가 겪는 작은 어려움 견딜만 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이 시대의 고난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이유를 우리에게 설득합니다.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보장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Ⅲ.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5, 6
5절입니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적어도 본문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두 가지 면에서 특히 성도들에게 함께 하심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첫째는 우리의 구원이 유지되도록 그의 능력으로 도와주시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가 시험이나 시련 속에서도 잘 버티도록 그의 능력으로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한번 얻은 구원이 언제라도 다시 잃어 버려질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의 선물을 언약하시면서 아무도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이 선물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보장해 주셨습니다.
요한10:28절에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신학에서는 “성도의 견인”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택한자를 결코 놓치시지도 버리시지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살랑한 그 사랑의 열매가 여러분들이 아닙니까? 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여기 이런 문제가 파도처럼 그들에게 덮쳐도 이것 때문에 잠시 근심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근심의 늪에서 벗어나 기뻐할 수 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가? "무엇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갔습니까?“ 첫째는, 변덕스러운 우리의 상황 때문이 아닙니까? 둘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셋째는, 죽음의 문제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살아가는 어느 날 문득 기쁨을 빼앗기고 살아간다면 틀림없이 이 세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의 처한 상황 때문에, 꼬인 인간관계 때문에, 그리고 질병과 죽음의 문제, 이 셋 중 하나일 것입니다.
지금도 사라지고는 있지만, 우리를 두려움 속에 빠뜨리는 코로나19라는 우리에게 당면한 환경 앞에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관계는 점점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자고 깨면 죽음의 문제가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노년의 고독사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닙니다. 청년들도 요즘 삶의 탈출구가 안보이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픈 현실입니다. 요즘 마약 청정국이라는 이 나라가 어쩌다 어림 아이들까지 이 죽음과 파멸로 몰아놓는 마약에 빠져 듭니까? 기쁨을 잃었기에 잠시의 쾌락 속에 자신을 던지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자신에게 처한 문제들이 장애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도리어 이 문제를 디딤돌로 삼고 기뻐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에게 기쁨을 노래하게 합니다. 왜입니까? 산 소망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유인경이라는 작가가 쓴 ‘기쁨채집’이라는 책을 보면 이 책의 프롤로그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제 나는 기쁨을 채집하고 있다. 공기처럼, 혹은 별처럼 구름처럼 내 주변에 가득하지만 내가 눈길을 안 주었거나 잘 느끼지 못했던 작은 기쁨을 수시로 채집해서 내 가슴에 담아두고 또 남들에게도 나눠주려 한다.” 기쁨을 채집한다는 말이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이 책에서 예로 든 기쁨들은 드라마틱한 것이나 거창한 것, 나만 체험한 대단한 것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것들도 기쁨이 되나 하는 소소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채집하듯 찾다보면 어느새 인생이 큰 기쁨의 꽃다발을 들고 있는 것처럼 풍성해 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놀이동산에 막 도착한 아이처럼, 여름방학을 맞은 학생처럼” 인생이 설레게 되고 가슴 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소소한 기쁨 외에 차원이 다른 기쁨이 또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합 3:18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들이 모르는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는 특별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예배 시간에 주님의 임재 앞에 여러분의 염려와 불안을 다 던져 버리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산 소망을 갖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기쁨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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