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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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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행복하십니까?(요10:10-15) 2010.5.31. 새생명축제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0-06-01 | 조회: 1997
오늘 교회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참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걸음이 인생의 가장 값진 걸음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곳까지 오시느라고 많이 힘드셨을 것입니다. 가족의 권유로, 친구 또는 이웃의 전도로 여기까지 오셨지만, 이 분위기가 아주 낯설게 여겨지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이 여러분의 인생의 가장 소중한 자리가 될 줄 믿습니다.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소위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도 잘 알려진 우리 시대에 던져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목사님이십니다. 이분이 한번은 기차 여행을 가면서 식당에 있는 열차 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건너편에 한 초로의 부부가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부인이 남편을 향해서 끊임없이 불평하는 소리가 건너편에 앉아있는 필 박사의 귓전에 들려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거 야채가 왜 이래? 고기는 너무 질긴 것 같고, 포도도 너무 신 것 아니야? 이 열차의 온도는 너무나 맞지 않는다. 날씨도 안 좋고 여보 우리 괜히 여행 나온 것 아니야?” 이렇게 끊임없이 불평하는 이 부인의 소리가 필 박사의 귓전에 들려오게 되었습니다.



필 박사를 의식한 듯 부인 곁에 앉아 있던 남편이 필 박사에게 얘기를 건네 왔다고 합니다. “선생님! 참 죄송합니다. 이해를 해 주십시오. 제 아내가 본래 직업이 그렇습니다.” 필 박사의 호기심이 발동을 했다고 합니다. “아 그러세요. 그러면 죄송합니다만 부인의 직업이 무슨 직업이신데요?” 그러자 이 남편은 다시 “예, 제 아내요?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죠.” 그러자 다시 필 박사가 물었다고 합니다. “무엇을 제조하시는데요?” 그러자 이 남편은 필 박사에게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예 제 아내는 불행을 제조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스스로 불행을 만들면서 살고 있는 셈이지요.” 불행을 만드는 사람들- 이 단어가 어떤 느낌을 주십니까? 만약 불행을 만드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반대로 행복을 만드는 사람들도 존재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저도 그렇고, 아마 여러분도 다 그러실 겁니다. 말하자면 누구에게나 행복 추구의 본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마땅한 기본 권리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소위 ‘행복추구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맹자는 인생을 사는데 정말 재미있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맛있는 것을 먹는 것과 성을 즐기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 사람들이 정말로 이것은 빼 놓을 수 없는 즐거움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섹스도 사람들이 그렇게 탐닉하고 빠져드는 것을 보면 엄청난 즐거움으로 삼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손에 넣으면, 그런 것들을 원하는 만큼 소유하고 즐기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에 불을 켜고 쫓아다닙니다. 그러나 명예와 권세가 행복을 줍니까? 행복을 주었다고 말한 사람이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만약에 이런 것들이 행복을 주는 것이라면 선진국에서 사는 팔자 좋은 사람들은 벌써 무릉도원에서의 인생을 구가하고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선진국일수록 왜 자살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왜 아스피린이나 진통제를 복용하는 사람이 그리 많습니까? 왜 밤이면 진정제나 수면제를 먹어야 자는 사람이 그토록 많습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손에 넣어도 그것이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웅변적인 증거입니다.



요즘은 행복한 사람보다는 우울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심리학자들이 만든 스트레스 저울이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 따르면, 스트레스 지수가 도합 200점에 도달하면 사람이 쓰러진다고 합니다. 배우자가 사망하면 100점, 병들면 53점, 해고당하면 50점, 이혼하면 73점, 별거하면 65점, 가족이 사망하면 63점 등등.... 이런 스트레스로 인해 우리 몸에서 해로운 분비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자극을 많이 받을수록 인체의 조직들이 서서히 죽어 간다고 합니다. 왜 이처럼 행복을 추구하고 또 그것이 행복인 줄 알고 취했지만, 그것이 내 인생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이라고요? “죄”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싫어합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죄는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우리를 속입니다. 죄는 행복을 주지만 그 행복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죄에 끌려가면 일시적으로는 굉장히 만족스럽고 행복해지는 것 같습니다. 섹스를 추구하든지, 돈을 추구하든지,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추구하든지 죄는 우리를 잠깐 동안은 행복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 속임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두가 거짓입니다. 쾌락도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재물도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명예나 권력도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여러분 오늘 왜 교회가 여러분을 여기에 초청을 하신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보시고 구원받아야 될 존재로 선언하십니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치고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7,80년이면 다 소진하고 없어지고 마는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육신의 생명으로는 영원한 삶을 보장 받을 수 없습니다. 육신의 생명은 일시적인 생명이요 불완전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왜 육신의 생명은 영적인 생명과 일치하지 못할까요? 왜 영생으로 이어지지 못할까요? 이에 대한 성경적 대답은 간단하고도 명료합니다. 죄 때문입니다.



롬5:12절은 이 진리를 가장 간단하게 가르쳐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되었고, 그 결과 죽음이 모든 사람 위에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죽음의 씨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누구든지 구원을 받지 못하면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서울시만 해도 하루에 463명의 아니가 태어난다고 합니다. 태어난 아이들을 보세요. 얼마나 천진난만 합니까? 깨물어 주고 싶고 기쁨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아이들 중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죽음의 씨를 안고 이 땅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이 됩니다. 여기에는 한사람의 예외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구원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못 속입니다. 제 아무리 죄인이 아닌 것처럼 가장해도 절대 속일 수가 없습니다. 공부를 많이 해도,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아 놓았다 할찌라도, 성자나 위인의 소리를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다 할찌라도,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대 숨기지 못합니다.



요즈음 갑자기 얼굴이 예뻐지고 맵시가 나는 것처럼 보이면 사람들은 성형 수술을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주저앉은 콧대가 우뚝 솟고, 옆으로 찢어진 실눈에 쌍꺼풀이 예쁘게 드리워진 것을 보면 “성형 수술을 받았구나. 어디서 받았니?” 하면서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에게서 태어날 자식입니다. 자신은 성형 수술을 해서 코를 높이고, 눈을 크게 만들고, 광대뼈를 깍아 아름답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식만큼은 어쩌지를 못합니다. 엄마가 성형 수술을 받는다고 아기가 뱃속에서 성형 수술을 받고 태어날리는 만무합니다. 아이는 엄마의 원래 모양을 닮아 납작한 코나 실눈을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성형 수술로 자기 모습을 감추려해도 자식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뱃속에서 교양을 배우고 나올리도 만무하고, 죄인이 아닌 것처럼 특별한 옷을 입고 나올 수도 없습니다. 자녀들을 보십시오. 그들 역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구원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히9:27절을 보십시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우리가 구원 받지 못한다고 할 때 단순히 육신의 생명이 죽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값을 치러야 할 무서운 형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나이가 얼마 들었는지 상관없습니다.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상관없습니다. 재물이 많고 적은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단 한사람도 예외 없이 다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구원 받지 못하면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 구원 받을 수가 있습니까? 노력하면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영적인 생명은 하나님의 불꽃입니다. 엡2:5절에 보면 우리는 이미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시체가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시체가 스스로 몸부림친다고 살아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시체에게 기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우리 힘으로나 노력으로 영적 생명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이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입니다. 할렐루야!! 그 주님은 오늘 나 하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내 생명보다도 너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내가 죽었노라. 그리고 지금도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전 우주에 유일한 신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가장 권세 있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요,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찬송해야 될 영광의 주님, 승리자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십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독생자 외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8: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왜 우리를 위해 우리의 생각과 계획보다 더 멋진 것을 갖고 계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아빠이십니다. 이것을 수용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펼쳐 주시는 좋은 것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오늘 이 예배에 한 번 참석하는 것이 뭐 그렇게 큰일인가 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의 결정이 앞으로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실 때, 더 이상 방황하지 마시고, 지금 여러분을 만나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나의 주님, 나의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성경은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선포하십니다. 그 분이 들어오는 순간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0절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늘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그 생명을 더욱 풍성히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려 놓으시고 나몰라라하는 분이 절대 아니십니다. 물에서 건져 주고는 “이제 네가 맘대로 해라”하고는 일어나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대로 눕혀 둔채 그 자리를 떠나는 냉혹한 구조자가 아닙니다. 영생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더욱 풍성한 삶으로 우리 인생을 바꾸어 놓으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이어령 교수를 아시죠. 이대 명예교수이며 전 문화부 장관으로 한국 최고 지성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분입니다. 이년 전에 동경에서 있던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과거에 기독교에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분입니다. 평소에 종교란 문화의 한 분야라고 일관되게 믿고 주장했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가 얼마 전에 책 한권을 냈습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란 책입니다. 그 서문을 보면 “요즈음 나는 70평생 한 번도 하지 않던 일들을 하고 삽니다. 세례를 받은 것과 시집을 낸 것이 그렇습니다. 나이 많이 먹은 사람들이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하면 망령이 났다고들 합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나를 만나기만 하면 어쩌다 예수 믿게 됐느냐? 심지어 어떤 친구는 예수쟁이 됐다면서? 하고 내뱉듯이 비웃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나라의 최고의 지성인으로 자처하는 그가 심지어 기독교를 반대하던 그가 어떻게 그렇게 달라질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자기 딸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딸이 미국의 변호사로 있는데 갑상선 암으로 수술 후, 두 번이나 재발하는 가운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암은 고쳤지만, 그 후유증으로 고도근시로 인해 망막이 끊어져 시력을 잃을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그의 자녀 가운데 둘째가 자폐증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려운 상황입니까? 단 하루도 울지 않고 잠든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아버지인 이어령 교수도 딸의 불행 앞에서는 그의 뛰어난 지성으로도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장민아씨가 기도와 간구 가운데 시력을 되찮았고, 아들까지 치유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본 이어령씨가 무릎을 꿇고 70년이 넘께 부정했던 예수를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 상식과 이성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영역 너머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지상의 언어'를 버리고'천상의 언어'를 얻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멋있게 표현해서 그렇지 간단히 말하면 영적인 눈이 떠졌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중생이죠. 그러고 나니까 하나님이 믿어지고 예수님이 믿어지게 된 겁니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고서,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서 왜 우는지 깨닫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제 예수 안에서 참 행복자로 하루 하루를 새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묻습니다. 이 행복이 다만, 이어령 교수만이 누리는 행복이겠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참 행복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동성 교회와 이 부족한 사람은 우리의 남은 삶을 여러분과 함께 가장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2,000년 전 소망을 잃어버린 인생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우리의 슬픔과 슬픔의 원인인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부활하신 그분은 오늘 우리의 주가 되셔서 이 구원의 기쁨을 우리에게 돌려주고 싶어 하십니다. 넘치도록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생애를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찾아 오셔서 행복에로의 초대를 하고 계십니다. 삶에 지치고 목마른 자들을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을 초청하십니다. 그 부르심에 기쁨으로 응답하십시오. 그리고 무거운 짐들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주님을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으로 영접하십시오. 만일 이 예수를 우리의 인생의 축제의 주인으로 모신다면 이제 곧 여러분에게도 잔치가 시작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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