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잇기-다음세대(신 6:4-9)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3-05-07 |
조회: 267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가정에 선물로 주신 주의 자녀들 특히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다음세대를 믿음의 세대로 세우지 못하면 자칫 우리교회의 미래가 없다는 위기감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가정의 달 첫 번째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한주간 내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이제 곧 우리교회가 54주년을 맞는 뜻깊은 시간을 갖는데 앞으로 우리교회가 우리 자녀들에게 어떤 유산을 물려 줄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정말 고민이 많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40년 만에 가나안이 보이는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200만이 넘는 백성들에게 유언의 설교를 합니다. 얼마나 만감이 교차 되겠습니까? 애굽을 떠나 가나안이 보이는 이 자리까지 무려 40년이 지났습니다. 출애굽 당시 모세가 이끌던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이제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2세대인 젊은 세대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신명기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어떻게 보면 신명기 전체의 요절이면서 신명기를 통해서 모세가 가장 강조하고자 한 말씀입니다. ‘쉐마’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쉐마는 들으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한 마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아가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드시 기억하고 들으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서 살아가게 될 가나안 땅은 선정적인 문화가 발달했던 곳입니다. 당시 가나안 풍속 안에는 갖가지 음란한 문화가 가득했습니다. 매춘은 기본이고, 근친상간, 동성애 그리고 심지어 인간이 짐승과 수간까지하는 타락이 끝이 없는 부패한 땅입니다. 가나안은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너무도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맛보면 빠져나오기 힘이 들었습니다. 그 매력에 빠져 미혹당하여 점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갈 수 밖에 없는 곳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더 큰 문제는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 신을 농경의 신이요, 풍요의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래서 농경풍속 안에 바알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가 깊이 스며들어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농사지을 때, 가나안 사람들에게 배웠습니다. 이 때 자연스럽게 가나안의 농경풍속을 따르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바알신이 농사의 신인 줄 알게 되었고, 농사지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 바알에게 제사하려고 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는 매우 비장한 각오로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으라는 말씀을 외칩니다. 지금 모세가 하고 있는 설교는 바로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Ⅰ.여호와를 사랑해야 할 이유
4-5절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야 할 말씀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한 분이신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아십니까? 앞으로 가나안에 들어가 살아야 할 다음세대는 광야의 살벌한 생활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를 먹어 본 일이 없습니다. 바위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구경한 일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도 못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기적다운 기적을 체험한 일도 없습니다.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들은 전쟁을 아는 세대인 그들의 부모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안정된 생활을 했습니다. 농사를 짓고 양을 치는 평화로운 목가적인 분위기에 젖어 아름다운 꿈을 먹으면서 자란 세대였습니다. 그들의 부모가 땀과 피를 흘려 뿌린 씨앗을 거두면서 행복하게 자라고, 신나게 젊음을 구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서서히 가나안 문화를 지배하는 우상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들은 부모의 세대의 그 고통과 고난을 알지 못하는 세대이고 이미 기존의 광야를 경험한 세대도 가나안 문화에 빠져 들었습니다. 당시 여호수아가 살아있는 현실 속에도 이스라엘은 이미 병들대로 병든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수24:23절에 보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기성세대가 집안에 우상을 갖다 놓고 살았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눈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싱을 자기 집에 갖다 놓았던 것입니다. 옛날에 광야에서 전쟁을 한참 치르는 긴장된 상황에서는 그런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살만하자, 배가 부르자, 돈이 많아지자 점점 해이해져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났습니다. 그래서 다른 신을 받아들여 우상을 집안에 갖다 놓고 남몰래 섬기며 가나안 잡족들이 하는 대로 부패한 행동을 모방했던 것입니다. 이 문제는 비단 이스라엘 역사 속에 문제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시대는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말한 것처럼 우리 인간을 ‘호모 데우스’(Homo Deus)라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인간을 뛰어 넘어 이제는 신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조만간 삼람들의 생명 연장 뿐만이 아니라 죽은 사람도 살리는 미래시대를 위해 수많은 과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쳇 GPT라는 인공 서비스가 등장해서 삶의 질을 상상도 못할 정도로 끌어 올리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보니 하라리의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인정되고 인간이 신이 되버리는 교만의 극치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 인간이 그렇게 지혜로운가요? 그렇게 지혜롭다고 하는 인간이 지금 만들어놓은 세계는 어떻습니까? 편리해지고는 있지요. 그런데 점점 지구는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과학문명을 통해 편리함을 쟁취했지만, 거기에 따른 자연 파괴로 기후변화, 재난이 끊치지 않습니다. 치료제가 없는 신종 바이러스가 창궐합니다, 첨던 무기로 전쟁은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은 점점 멸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악의 결과물입니다. 이럴 때 다음세대가 시대를 아우를 수 있는 대안은 없는 것일까요?
Ⅱ.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6-7절을 보면 “오늘 내가 네게 명하신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가르쳐라“고 했습니다. 여기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내 인생의 한 복판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의 숨결을 느낄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비전을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꿈을 심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비전으로 가득 찬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붙잡힌 자마다 인생이 바뀝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고 축복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갖게 해서 정말 보람찬 인생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부모도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자녀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8-9절을 보면 가르치는 일뿐만 아니라 “너는 이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교육에서 가장 큰 맹점이 말만 앞서고 실천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거역하는 것도 언제나 부모들이 말만 앞서고 실천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묻습니다. 오늘 왜 이렇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라고 하십니까? 여러분 예전에 우리 어머님들이 약탕을 끌일 때 하얀 가재로 탕을 끌인 한약재료를 쥐어짜지 않습니까? 신구약 쥐어짜 보세요? 무엇이 나오는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흘러나옵니다. 그 보혈은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을 읽고 또 일고 실천하다 보면 자녀들 속에 십자가의 보혈의 사랑이 흐르게 됩니다. 이 속에는 생명이 있고 비전이 담겨 있습니다. 그 사랑을 먹고 마시면 자녀들 절대 타락하지 않습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무정한 시대에 사랑의 향기를 펼쳐 나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의 다음세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한양대에서 교수를 하는 전영수라는 분이 쓴 ‘한국이 소멸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제목이 섬뜩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가 다음세대를 세우지 못해서 소멸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분은 우리나라가 이대로 간다면 머지않아 나라에 큰 위기가 닥칠 것이고, 결국 망하게 될 것 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통계청 발표를 보면 상황이 심각합니다. 1970년 한 해 동안 태어난 출생아가 100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2000년에 55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그리고 2022년에 20만명대로 주저앉았습니다. 그러니까 50년 만에 1/4로 줄어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인구가 감소하게 되고, 노동력이 저하되어 국력이 쇠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학교 학생수를 감소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이런 출산율저하 속도보다 교회학교 학생 수의 감소속도가 더 빠르다는 점입니다. 이 기간 동안 교회 출석하는 초등학생 수의 감소는 상상도 못할 수준으로 감소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출산율 저하는 세계 최고의 수준입니다. 이런 위기의식을 가지고 우리 성도들이 시대를 보고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모압 평지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겪었던 한 지도자의 외침이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생명이요, 기쁨이요 미래이기 때문에 말씀을 부모가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평생에 자녀들의 삶에 기초가 되도록 가르치고 암송하고 삶이 적용하라고 외칩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신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가르쳐라 너는 이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잠22:6절에 잠22:6절에 보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반드시 부모는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Ⅲ. 우리 자녀는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시127:4절에 보면 우리의 자녀를 어떻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까?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기업이라는 말은 “대대로 이어오는 재산과 사업”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유업’ 또는 ‘유산’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친히 맡겨주신 유산과 유업이라는 말입니다. 이 다음세대에 교회는 많은 투자와 헌신이 필요합니다.
이태리의 한 예배당에 대낮부터 한 부인이 들어오더니, 교회 안에 앉아 막 흐느끼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너무 크게 흐느끼면서 울고 있는 그 모습을 그 교회의 감독이 지나가다가 보았습니다. 그 감독은 울고 있는 부인의 어깨를 치면서 "부인, 무슨 일이 있었나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제 아들이 이단에 빠졌습니다. 죄악에 빠졌어요." 그 감독은 이 어머니의 어깨를 두들기면서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부인, 기도하는 어머니의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유명한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니카의 애통하는 눈물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어거스틴은 결혼도 하기 전인 18세에 사생아를 낳는 등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또 마니교란 사이비 종교에 8년간이나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30세 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당시 수사학에 관심이 많았던 어거스틴은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에 매력을 느껴 그의 설교를 통해 수사학을 배우다가 성경을 알아가면서 믿음을 키워갔습니다. 그러나 아직 말씀과 삶 사이에 일치하지 못하는 이중적인 삶에 갈등하던 그는 자신이 여전히 죄의 노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참함 가운데 계속 부르짖었습니다. '왜 나의 추한 죄들을 끝나게 하지 않으십니까?' 자문했고 고통 중에 울고 있을 때 갑자기 담 너머로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하는 어린아이의 노랫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가지고 있던 성경을 펼쳐 눈길이 닿는 첫 구절을 읽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이 일은 그 동안 고민 중에 있던 어거스틴을 새로운 인생으로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고 그의 회심은 오랜 방황의 종식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은 생애를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해서, 후세에 바울 이후로 신학체계를 만큼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이면에는 어머니의 눈물이 있었던 것 사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녀를 둔 부모들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어떻해 해야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나요?’ ‘아이들이 잘되려면 부모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목사로서 자주 받는 질문입니다. 우리 부모 역시 너나 할 것 없이 모든부모들의 간절한 소원은 자식이 잘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잘 된다는것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입니까?’ 남들보다 더 나은 대학, 더 나은 직장 더 나은 조건을 가졌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미래의 불확실성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케 합니다. 지금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해서 호들갑 떨지 않습니다. 고개가 뻣뻣해지거나 으스댈 만한하둥의 이유가 없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삶은 그렇게 펼쳐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어린이 주일에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후손들에게 어떻게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줄 것인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신앙으로 바로 서는 자녀들은 어떤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건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그들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삶을 모든 것임을 고백하게 하며 하나님의 비전을 온 땅에 드러내놓는 자녀들로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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