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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해산의 수고를해서라도(갈 4:19-20)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3-05-21 | 조회: 265
교사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사람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한국교회의 가슴 아픈 현상 중에 하나가 교사를 일종의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3D업종으로 보고 그 직분을 기피하는 경향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녀들의 영혼과 미래를 아름답게 세우기 위해 어려운 현장에서도 묵묵히 섬기는 교사야말로 주님 앞에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입니까? 저는 스승의 날을 맞아 한 세대를 참 멋지게 스승으로 살았던 한 인물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의 삶의 영향력은 지금도 우리에게 엄청난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 자신의 것을 다 버렸지만 참 행복한 사나이였습니다. 그에게 다가온 구원의 감격은, 그의 생을 온통 바꾸어 놓은 일대 혁명이었습니다. 그리고 행복이란 결코 세상이 추구하는 것으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주님이 이 땅에 머무시면서 하셨던 사람 세우는 일에 그 역시 인생을 걸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교회입니다. 그가 처음 이 갈라디아 지역에 와서 교회를 개척하였을 때 그는 당시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 짐이 되는 자신의 핸디캡이 있었습니다. 14절에 보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 바울은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강력한 지도자 유형에 속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한번 결심하면 앞만 보고 전진하는 유형의 지도자입니다. 그런 바울에게도 자신의 연약함을 처절하게 느껴야 하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바울에게는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질병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 병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이 때문에 바울에게 몹시도 큰 고통을 주었음에는 틀림이 없었고 또 성도들에게 시험거리가 될 수도 있었지만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러나 그것 때문에 바울을 거절하지도, 업신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하나님의 천사같이, 바울의 약함을 감싸주었고 오히려 자신들의 눈이라도 빼 줄만큼 바울을 사랑하는, 어떻게 보면 사제지간의 사랑이 담뿍 담긴 아름다움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다음 그들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간사한 것입니다. 바울이 떠난 2,3년 후 이 교회 안에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이 아닌 거짓진리를 가지고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대 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넘어가 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아픔입니까? 이 얼마나 큰 충격입니까? 자신의 눈이라도 빼어 줄 정도로 사제지간의 사랑이 넘쳤던 교회, 가르침의 열정 앞에 단순히 배우는 자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성장하던 교회가 이젠 변질된 타락의 길로 가게 될 때 가르치는 자의 그 고통을 여러분, 그 심정을 아십니까? 얼마나 통증이 컸으면, 그는 갈 3:3절에 피를 토하듯 외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그렇게 사랑했던, 자신이 가르쳤던, 성도들이 하나 둘 진리에서 떠나고, 변질되어 가는 안타까움 앞에 그 상황을 바라보는 스승의 마음이 얼마나 얼마나 찹찹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여기 19-20을 보십시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 중에 여러 가지 고통들이 많이 있지만 가장 큰 고통은 '해산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일 가운데 하나가 해산하는 일입니다. 귀한 생명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다는 것만큼 고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고귀한 일이기 때문에 해산의 고통이 수반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교회에도 출산을 앞둔 임산부들을 보면 '참 힘들겠구나'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임신을 하게되면 입덧이 심한 사람은 제대로 먹질 못해 눈도 안보이고 마비까지 오는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화장품도 바르질 못하고, 심지어 세수 비누로 세수도 못할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정점은 역시 출산에 있습니다. 그래서 산모가 아기를 낳으려고 분만실에 들어가면서 신을 벗을 때 '이 신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생명을 탄생하는 과정이 그 만큼 위험스럽고 또한 고통이 심하다는 말입니다. 한 생명을 세상에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눈물을 쏟고 땀을 쏟고 피를 쏟는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육신의 자녀 하나 출산하는데도 그렇게 많은 고생과 어려움이 따른다면 죄와 마귀에게 사로잡힌 영혼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구원하는 일에 얼마나 많은 수고가 따르겠습니까? 요즘 우리가 사는 교권이 무너지고 이젠 교사가 존경을 받지 못하는 시대 속에 살아갑니다. 지금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집단적으로 성폭행을 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기 할 소리다 하는 세상을 보면, 어떻습니까? 한때 마약 청청국이라는 우리나라가 지금은 어린 청소년까지 마약에 빠져드는 이 현실을 볼 때, 숨이 콱콱 막히는 심정이라는 것 여러분도 다 경험하실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정말 어둡습니다. 사탄이 정말 제철을 만난 듯 날 뛰지 않나 생각합니다.

 
제가 중학교 때 우리가 세 들어 살던 집 마당 한 구석에 주인댁이 닭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남의 닭이지만, 커가는 녀석들의 모습이 대견해서 배추 잎사귀도 주워오고 아카시아 잎도 다다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닭을 들여다보는 순간 저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하얀 닭 한 마리가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진 채 눈만 깜박거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닭은 수탉이었는데 꽤 큰놈이었습니다. 닭장 안에 닭이 왜 옆구리가 그렇게 상했는지 잘 몰랐는데 나중에 안 사실은 닭장 속에 쥐가 들어가자고 있는 닭의 날개 속에 들어가서 살을 마구 물어뜯어서 파헤쳐 놓은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쥐가 그렇게 물어뜯는 동안에 닭은 감각도 없었는지 가만히 앉아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입니다. 닭장에 쥐가 들어 올 만한 구멍을 모두 막아버리고 나서야 닭들이 더 이상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구원의 길이신 그리스도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 버려진 영혼들의 상태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사람을 세우는 스승은 단지 자기에게 보내진 영혼들에게 고급지식을 나누어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일꾼이 아닙니다. 스승은 자기에게 맡겨진 그 한 영혼이라도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대리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교사의 자리는 해산의 수고의 과정이 없이는 그 제자들이 바로 설 수 없기에 야고보도 약3;1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선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야기입니다. 교사는, 스승은 단지 강단에서 잘 포장된 지식 보따리를 풀어 장사하는 고급 기술자들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사람세우는 수고의 그 가치를 알고 감당한다면, 이 교사처럼 보람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세속의 물든 우리의 아이들을 영적인 감화를 통해 주께로 인도한다는 것, 얼마나 어렵습니까? 학교와 가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아이들에게 주일날 한 두 시간이 과연 저들의 인격 형성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우리는 답답해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귀한 직분임을 알면서도 그만 포기 하려는 선생들이 자꾸 생기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 사실입니다. 이처럼 교사의 자리는 외롭고 힘든 자리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그 수고에는 값진 열매가 따라옵니다. 이 해산의 수고는

 
사랑의 섬김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몇 해 전 가정의 달에 우리 교회에 오신 고려대에서 상담학을 가르치는 한성렬 교수가 와서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스승의 주일을 맞이해서 다음세대에 영향을 주는 스승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이 되기에 말씀을 드릴려고 합니다. 영국에 존스 홉킨스 대학의 한 사회학과 교수가 대학원 학생에게 과제물을 제시했습니다. 학생들로 하여금 빈민가에 사는 청소년들에게 ‘밝은 미래가 있는가 없는가’의 판단을 내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200명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빈민가의 청소년에게서는 100% 미래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100% 미래가 없다는 결과를 보고 받은 이 교수는 그만 흥미를 잃어 자신이 내어준 과제물을 책상 한 구석에 내려놓고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지내다 정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수가 후임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후임교수가 이제 전임교수의 서류를 정리하다가 지난 20년 전 버려두었던 전임 교수의 과제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을 보다가 과연 20년이 지난 지금 이 학생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흥미를 느껴 자신의 대학원생들에게 그들 200여명이 지금 어떻게 변해 있는지 그들을 찾아 인터뷰를 해오라고 과제물을 내어줍니다. 학생들을 그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죽었거나, 행방불명 된 몇 명을 제외하고는 176명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을 인터뷰를 했습니다. 학생들이 과제물로 제출한 인터뷰를 본 교수는 충격을 받게 됩니다. 20년 전에 나온 결과하고는 전혀 180도 다른 결과가 발생했습니다. 도무지 희망이 없다는 그 당시 학생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대부분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주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교수는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인터뷰에 응한 대답은 "모두가 내가 고등학교 때 만난 여자 선생님 때문이라는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그 교수가 수소문을 한 끝에 그 여선생을 만나서 물어봅니다. 도대체 당신은 이들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선생님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였습니다. "난 아주 굉장히 쉬운 일을 했습니다.

 
나는 단지 그 학생들을 사랑했을 뿐입니다." 가정에서 부모에게, 이웃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이미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낙인 찍혔던 그 학생들이 학교에서 단 한 명의 여 선생의 사랑을 통해서 그들의 미래가 180도 달라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인간이 성장하기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인생은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그 인생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좋은 스승을 만나고, 좋은 제자가 되는 것은 서로에게 축복입니다. 바울 서신을 보면 그가 구원받은 이후 한 생명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2. 기도입니다.

애 2:19절에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밤이 되어가는 초저녁입니다. 사람들이 에너지를 다 쏟고 난 후 가장 휴식을 요하는 시간입니다. 모두가 지쳐서 쉴 때 기도하라고 합니까? 그만큼 자녀는 포기할 수 없고 다음세대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녀만이 민족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바로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고 함께 하시고, 때를 따라 도우시는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가능하기 때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전적으로 나는 내 자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내 자녀의 가는 길을 책임 질 수 있습니다. 하는 절규의 기도입니다.

 
바울도 얼마나 기도를 강조하는 지 모릅니다. 엡6:18절에 보면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여기 기도하되 성령을 의지하고 힘쓰라 이 기도는 평범한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해 보세요. 여러분 가운데 정말 한번 목에 피가 나도록 기도해 보셨나요? 그리고 그 시간은 남들이 다 자는 고독과 두려움이 짙은 어둠이 깔린 시간입니다. 또 눈물이 범벅이 되도록 통곡을 해 보셨나요?

 
어떤 이들이 하기 쉬운 말로 인간이 할 일은 인간이 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꾸 기도의 시간을 빼앗기고 일을 자꾸 꼬이게 만듭니다. 사실 기도의 자리를 나가기가 선뜻 그렇게 쉬운 것만이 아닙니다. 왜일까요? 기도의 자리는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그러나 이 싸움을 피하면 평생을 살아도 영적인 풍요를 한번 누리지 못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한 번만이라도 승리하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 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장벽이 있다고 할지라도 기도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 장벽이 무너집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한 곳에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한 곳에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던 때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한 사람을 구원하고 그들을 세우는 일에는 적당히가 없습니다. 산모가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고, 피까지 쏟아야 한 생명이 탄생되듯이, 한 생명을 교회에 나오도록 하고 구원받게 하기까지는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하고, 땀 흘리는 수고가 있어야 하고, 희생의 피까지 쏟는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한 사람을 세워 하나님의 선한 일꾼으로 세우는 그 일 역시 해산의 수고가 아니면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고 모함을 받을 만큼 '해산의 수고'를 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수많은 성도들도 지난 2000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교사는 미쳐야 되요. 언젠가 또 하나의 열매가 내가 가르친 아이들 가운데 일어날 것을 기대하며 더 열정을 가지고 미쳐야 됩니다. 예수님도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들었습니다. 전부 거꾸로 살아가는 세상 한복판에서 똑바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담대하십시오.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오직 바로만 미치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리십시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향해 미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최고 학부를 졸업한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거지처럼 세상을 누비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 아니었겠습니까?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동족들에게 돌에 맞아 쫓겨나기도 수없이 했습니다. 죄수도 아닌데, 착고에 매여 감옥에 갇힌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 해산의 수고에 인생을 겁니다. 이는 승산 있는, 반드시 열매가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비 효과’라는 말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 주에 발생한 토네이도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 입니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멀리 떨어진 곳에 영향을 끼쳐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과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기도하며 교회 학교를 다시 세우겠다는 그 자세를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 한번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서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살아 계십니다. 아-멘. 그리고 일하고 계십니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를 여기에 앉혀 놓으시고 이 예배당이 비록 나비의 작은 날개 짓처럼 보일찌라도 우리 교사 여러분, 바울이 그렇게 외쳤던 해산의 수고를 한다면 반드시 반드시 다음세대가 희망임을 체험하게 될 줄로 맏습니다. 기도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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