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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내가 새벽을 깨우리라(시 57:6-11)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3-06-04 | 조회: 274
다음 주면 우리교회가 54주년을 맞게 됩니다. 54년 전 1969년 6월8일에 창립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분들 가운데 동성교회를 개척하신 분이 제헌국회의원이셨던 황두연 목사님이십니다. 당시 목사님은 노른산 시장 끝자락에 점포 두 칸을 터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날이 6월 두 번째 주일이었습니다. 50년 전 당시만해도 나라가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한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기 이전에는 목회란 어려운 일이었고, 그 당시 신학교에 간다는 것은 굉장히 큰 결단이었습니다. 목사님이라고 하면 검정 양복 하나로 사계절을 입고 궁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목회적인 면에서는 복음의 불모지였던 한국 땅에 교회를 세워가는 영광스러움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교회 간판만 달아 놓으면 사람들이 몰려왔고, 허름한 개척교회라도 어린아이들이 와글와글했습니다. 가난했지만 목회는 순수함과 보람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기독교인이 많지 않을 때에는 신앙인들 안에서 민족의 지도자도 나왔고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컸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의 현실은 심각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코로나19는 사회적이든 신앙셍활이든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예전처럼 자신의 삶을 드려 헌신 할 만큼 희생을 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줄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인구 절벽 시대에 마냥 시대 탓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교회가 회복과 부흥되기를 소원하십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무엇에 관심을 가지셨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나가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머무는 동안 기도의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할 때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기도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벽 때마다 엎드리는 시간을 갖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겟세마네에서 땀이 핏방울로 변해질 정도로 십자가 앞에 자신을 순종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창립 주일을 앞두고 기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가운데 오늘 본문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57편 서두에 보면 이런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여기 믹담 시란 “황금시”라는 뜻입니다. 다윗의 중심사상을 다룬 시편에 붙여진 별명입니다. 알다스헷이란 “멸망시키지 마소서”란 뜻입니다. 다윗의 애절한 간구 시에 붙혀진 음악이었습니다. 이 시의 배경을 그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속에 숨어서 부른 노래”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무서운 창끝을 피하여 아둘람굴과 엔게디 굴속에 숨어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사자와 맹수들이 드나들곤 하였습니다. 사울에게 붙잡히는 날도 맹수에게 물리는 날도 인생은 끝장납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속에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를 제발 멸망시키지 마소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이 불안한 나날을 빨리 끝나게 해 주십시오. 나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얼마나 가여운 기도입니까? 한때 골리앗을 물치리던 용기와 그 기백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광야를 헤매며 이 굴 저 굴속에 몸을 숨기고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을 따르던 자들을 보십시오. 삼상 22:2절을 보면????환란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다고 했습니다. 여기 환란 당한 모든 자라든지, 빚진 자, 그리고 마음이 원통한자는 한 마디로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어떤 일이나 사건이 자신의 상처를 건들게 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성질을 부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 정의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무엇이 가야할 길인지에 대한 지각이 전혀 없습니다. 상처만 건들면 모든 판단력을 상실하여 자기 상처를 주인 삼아 살아갑니다. 이들이 400여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이 400명의 사람들이 사울의 왕권을 무너뜨리고 다윗 왕조를 창출해낸 주동 세력이 되었습니다. 다윗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단지 정권 창출의 세력 만으로서가 아니라 메시야가 오실 다윗 왕조의 나라를 건강한 정치와 경제, 사회가 되도록 이끌었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합지졸의 400명이 어떻게 정권을 창출하고 다스리고, 위기가 올 때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이 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둘람 굴에 모인 이들이 다윗과 더불어 무엇을 하였을까요? 그들은 이 절망의 굴에서
 
Ⅰ. 현실너머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7절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찬송하리로다.” 여기 ‘내 마음이 확정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확고부동하다'이 아닙니까? 어떻게 두려움이 살을 파고드는데 이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까? 지금은 비록 이 어려운 고통 속에 있지만, 반드시 이 위기를 벗어난다는 그런 소망이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비록 쫓기는 몸이지만 그 믿음이 하나님께 향하여 확고부동하므로 두려울 것이 없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지금 이 상황을 보십시오. 사울은 집요스럽게 추적해오죠? 그렇다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은 오합지졸 같죠? 그런 절망의 상황 속에 다윗은 어둠의 터널에서 일어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환경을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환경이 좋을 때는 모든 것이 희망적으로 보이지만 상황이 힘들어지고 어려워질 때는 그 상황 앞에 우리의 삶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 안에서만 인생을 바라볼 때 우리는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꼭 이렇게 살아야 하나?’ “왜 이것밖에 안되지?” 하는 가슴을 짓누르는 아픔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현재의 상황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은 어렵고 힘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에 다녀가신 본죽의 최복이 대표의 간증은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엄청난 결과를 보여 주는 사례가 아닙니까? 3년 동안 운영하던 화장품 수입 유통회사가 IMF때 부도가 나고, 여러 협력업체까지 함께 도산하면서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빚쟁이들과 피해자들의 아우성에 아침이면 눈을 뜨고 싶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결국 정신을 못 차리게 되고 입원하게 된 것입니다. 신경정신과 병동에서는 몸에 걸친 옷 외에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책을 달라고 해도 안 된다고 하고, 볼펜이나 노트를 달라고 해도 안 된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하루 아침에 가진 것을 다 잃어 버릴 수 있나요? 그렇게 모든 것이 잃고 삶마져 피폐해지고 절망 속에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어느날 밤, 잠잘 시간이라고 간호사가 병실의 불을 끄고 나간 후, 손바닥만한 작은 창문으로 멀리 개척교회의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십자가가 밤이 깊으니 거기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텐데 왜 이제야 십자가를 볼 수 있었을까?’ 그러면서 그녀는 밤이면 창밖의 그 십자가를 보며 눈물로 기도를 했습니다. ‘빨리 나가서 아버지 집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이 오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병원에서 나오게 되었고, 남편이 시작한 호떡 장사를 도우면서 재기하게 되었습니다. 2002년 본죽 1호점을 오픈한 이래 지금까지 지금은 수천개의 매장을 경영하고 해외까지 지점을 두는 한식 프랜차이즈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예수 안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상황이라는 절망의 벽을 넘지 못하다가 환경너머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때 비로서 그는 그 긴터널을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은혜의 눈에 비쳐진 그 십자가는 그분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현실 너머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마냥 패배를 숙명처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나가야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은 다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좋을 때는 좋지만 언제든 우리를 떠날 수 있고 실망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 믿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이 저를 어떻게 대우하셨나 생각해 보니까, 한 번도 저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습니다. 저 자신의 믿음이 부족해서 스스로 힘들어 했던 적은 있지만,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떠나신 적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둘람 굴에 무슨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거기서도 절망너머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고 그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한 자들을 통해 이루실 비전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비전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비전을 가진 사람의 시선은 오늘을 뛰어넘어 언제나 먼 곳을 향해 있습니다. 먼 곳에 시선이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거기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꿈이 없는 인간은 방자해집니다.
 
꿈이 없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자기를 벗어나지 못한 채 항상 목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대로, 감정대로 욕구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꿈이 없기에 자기 한 사람이 지금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꿈이 없으면 목회자이든, 교인이든, 어떤 인간이든 방자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Ⅱ. 새벽의 사람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8절
여기 8절의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는 다윗의 외침 가운데, “내 영광아”라는 말은 원래 “카보드”라는 말인데, 이 말은 “내 영혼아, 잠을 깨어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대적들에게 쫓기느라고 가슴 조리며, 평안함과 기쁨이 없던 자신에게 이르기를, “나의 영혼아,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를 구원하셨고, 앞으로도 나를 구원하실 것이니, 이제는 깨어서 하나님을 찬송하자”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이는 일종의 의인법적인 표현으로, 다윗은 비파와 수금을 동원하여 주를 찬양하고픈 그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침 햇살이 찬란히 굴속으로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여기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히브리어에서 새벽을 '오르'라고 합니다. 그 뜻은 ‘빛나다’ 입니다. '솨파르'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그 뜻은 ‘반짝반짝 빛나다’ 입니다. 새벽은 햇빛이 빛나고 이슬이 빛나고 총명이 빛나고 영성이 빛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새벽을 깨운다는 이 말은, 더 이상 좌절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다시 일어서겠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의지의 고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기대한다는 다윗의 환희에 찬 외침입니다.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은 더욱 가까이 다가옵니다. 새벽은 어둠이 물러가고 새 날이 밝아오는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그 새벽이 다가오고 있음을,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 영혼이 실망과 좌절과 억눌림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주님께서 놀랍게 이 억울함과 이 애통함과 고통을 뚫고 찬란하게 다가오실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새벽을 깨워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Ⅱ. 새벽 :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새벽은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에 낮에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밤을 지으신 분이시며 그 밤에 우리를 쉬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깊은 밤에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만나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신앙의 위인들은 언제나 새벽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새벽에 큰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새벽 오히려 미명”에 기도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번 특별 새벽기도를 통하여 새벽에 한번 용기를 내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한번 결단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의사들은 큰 수술을 새벽에 일어나 합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에 임하는 심판의 불 속에 뛰어들어가 조카 롯을 구해달라고 천사의 허리춤을 붙들고 애원했던 때가 바로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창19:27) 출애굽기 14:24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고 그 뒤를 추격하던 애굽군대를 홍해에 수장시킨 사건이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시간이 새벽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가 내린 시간이 새벽이었으며,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살아난 시간이 새벽이었습니다. (단6:19) 여호수아 때 금성철벽 난공불락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린 시간이 새벽이었습니다. 옳습니다. 새벽은 가족의 구원을 위해 몸부림하는 시간입니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가족, 내 자식의 문제를 가슴에 부둥켜 안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시간입니다. 새벽은 홍해와 같은 난관이 갈라지는 시간입니다. 새벽은 영혼의 만나를 먹는 시간입니다. 새벽은 다니엘처럼 저주의 굴에서 벗어나는 시간입니다. 새벽은 문제의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시간입니다.
 
그런가 하면 원수가 틈타고 마귀가 역사하는 시간도 새벽입니다. 욥기24:14을 보면 “사람을 죽이는 자는 새벽에 일어나서 가난한 자나 빈궁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적같이 된다”라고 했습니다. 북한 공산당이 남침한 시간도 주일 새벽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음모를 꾸민 시간도 새벽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새벽은 영적전쟁터입니다.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가 갈라지는 시간입니다. 기적도 새벽에 일어났고 시험도 음모도 새벽에 벌어졌습니다. 신앙인은 새벽에 기적을 맛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세상에 취한 눈으로 새벽에 음모를 꾸밉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새벽의 역사는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것들보다 더 엄청난 사건을 새벽에 이루셨습니다. 천지창조가 새벽에 이루어졌고 출애굽의 역사가 새벽에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신 사건이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깨어있던 목자들이 탄생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무엇이냐” 무덤 문을 박차고 우리 주님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새벽 일찍 향품을 들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그래서 혹자들은 예수님의 재림도 이른 새벽 있을 것이라고들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정말 바른 신앙을 가지고 살고 계십니까? 다시 회복 되고 싶지 않습니까? 다시 일어서고 싶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 모두 내가 새벽을 깨웁시다. 우리를 붙잡고 있는 죄의 세력은 어두움입니다. 우리를 염려와 불안의 자리를 떨쳐 버리지 못하게 하는 족쇄도 어두움입니다. 우리의 삶을 불평과 원망의 삶으로 빠뜨리는 것도 어두움입니다. 이제 우리의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일어서야 합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교회 창립 54주년을 기대하면서 내가 변하고 가정이 새로워지고 우리 교회가 강건해 지고 주변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새로워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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