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합시다. - 그리스도인 요일 2:7-11. 2023. 7/9
요즘 보면 우리 사회에 태어나자마자 버려지는 아기들이 있습니다. 매달 13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양육하는 조손가정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정에서 아동학대가 점점 심각해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사랑 없이 자라나는 아이들이 점점 늘어만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어느 날 멀쩡한 아들, 딸이 밖에 나가지 않고 방에 틀어박힌 채 가족들과도 담을 쌓기 시작합니다. 일본에서 유래한 '히키코모리' 은둔형 외톨이가 이제 더 이상 일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 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어느덧 우리 청년층 가운데 54만명이 넘는 숫자가 은둔형 외톨이라는 집계가 나왔습니다. 이 정도면 이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엔 상황이 너무 심각합니다.
우리 사회에 1인 가구 비율이 작년 2022년에 40%가 넘었다는 통계가 발표됐습니다. 10가구 중에 무려 네 가구가 혼자 사는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독거하는 노인들이 많고, 결혼하지 않은 채 홀로 사는 청년들이 늘고 있고, 이혼하여 혼자 사는 사람들도 꾸준히 늘고 있어서 생긴 현상입니다. 이분들은 식사도 혼자 해야 하고, 몸이 아플 때도 혼자서 병치레를 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
사랑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만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에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제발전도 중요하 고 선진국이 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사랑 없는 나라, 사랑 없는 사회, 사랑없는 교회가 된다면 그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역사의 마지막을 향해서 가까이 갈수록 사람들이 사랑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마태복음 24:12에 보면 예수께서는 말세의 징후, 종말론적 역사의 한 표징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요한일서 서신은 사랑의 사도로 불려지는 사도 요한이 기록한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이 잘 어울리는 인물입니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사랑의 사람이라는 별명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처음 성경에 등장할 때 제자로 부름받고 전도할 때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성경에 요한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 막 3:17절입니다. 여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별명을 붙여주셨는데, 그것이 ‘우레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분노조절 장애가 사회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쉽게 표현하면 성격장애를 가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갑자기 요한이 자기 형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께 이런 청을 드렸습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청입니다. 이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면 메시아로 등극하실 텐데 그 때 자기 형제를 ‘한 사람은 우편에 다른 한 사람은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둘을 좌의정과 우의정 자리에 세워달라는 것입니다. 매우 자기 중심적인 인물이고 매우 이기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 자기 중심적인 인물입니다. 점점 자기 주장을 갖고 사는 사랑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인생으로 살아갑니다. 요한은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 성품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요한이 3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며 훈련을 받았지만 그 성품에 큰 변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편견에 빠져있고 성격은 한가닥하지요.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것을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자입니다. 어떻게 그가 사랑을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세월이 흐른 뒤에 요한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달라졌습니다. 요일 4:7을 보면 요한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그리고 11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영적 지도자로 사역하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그 성품이 주님을 닮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변화가 될 수 있습니까? 사람 잘 안 변해요.
요즘 비즈니스 세계에 일대 혁신을 불러일으킨 마커스 버킹엄이란 사람이 저명한 경영지침서인 [First, Break All the Rules]이란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 성공한 CEO들의 ‘직원관리 4원칙’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 사람들은 잘 변하지 않는다./
2. 그 사람에게 없는 것을 있게 하려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3. 있는 것을 밖으로 끌어내면 된다./
4. 그것조차도 쉽지 않다. 그렇습니다. 기업을 경영하는 많은 경영인들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경영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업이나 기관의 인사 관리하는 책임자들도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원칙으로 삼기도 합니다. 사실 이 세상을 살만큼 살아본 사람들은 대체로 ‘사람들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동의합니다. 정말 오랜 만에 옛 직장동료나 학교 동창들을 만나보면 겉모습은 참 많이 변했는데 사람의 본성, 인격, 습관 같은 그 사람의 속 모습은 그대로인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구나!’하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성경도 대체로 이런 생각에 동의합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해 본다면 ‘사람은 스스로 변하지 못한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을 등진 사람들은 계속 하나님을 등진 채로, 죄인은 또 계속 죄인으로, 그리고 악인은 또 계속 악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가지 예외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변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이 임하실 때 그 사람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롬5:5절 말씀에 보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여기 ‘부은 바 되었다’는 이 말은 원문적으로 보면 폭포수처럼 쏟아 부어져서 흘러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어질 때 그것은 아무도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안 맞으려 발버둥쳐도 안 맞을 수 없고,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사랑을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써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또 자녀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가 된 것입니다. 이 시간 예배로 모인 여러분도 저도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 인생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지금 요한은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있는데 여전히 그 깊은 사랑을 외면한 채 편견된 시각으로 사는 성도들을 향해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편견되고 왜곡된 사랑을 하는가를 이야기합니다. 그 예로 계명을 언급합니다. 옛 계명과 새 계명입니다. 7, 8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사랑에 대한 옛 계명이 있고, 또 사랑에 대한 새 계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옛 계명과 새 계명은 본질상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옛 계명이 이미 주어졌지만, 예수님께서 새 계명으로 개정하셨다는 것입니다.
Ⅰ. 그러면 옛 계명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에 대한 구약의 율법에서 말씀하고 있는 계명을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레19:1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ⅰ) 우선 사랑의 대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네 이웃”입니다. 여기서 이웃이란 원어를 보면 ‘레아’(רע)라는 말입니다. 이 레아라는 말은 ‘사귄다.’라는 뜻의 동사 ‘라아’(רעה)라는 말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웃이란 사귀고 있는 사람, 즉 친구나 동료를 뜻하는 말입니다.
ⅱ) 다음으로 사랑의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네 자신과 같이”입니다. 그러니까 이웃을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염려하는 것처럼, 이웃을 염려해 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이웃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늘 교제하고 사귀고 있는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 사랑은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소위 끼리끼리의 관계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그 이유는 옛 계명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계명에 담긴 원리와 정신은 외면하고,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우선 사랑의 대상을 폭을 좁혀서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마리아 사람이나 이방인은 이 이웃 안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혐오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도 이방인 취급하며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사랑해야 할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아예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들의 사랑의 채널에는 사랑의 대상자가 아닙니다.
요한은 이 문제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1절에도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무슨 말입니까?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하면서 교회에서 봉사도하고 헌신도 하는데 기도도 하는데 문제는 자기 열심을 가지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불평이 일어나고 미움이 일어나면 너는 지금까지 어두움에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너무 불쌍하지 않나요. 여러분, 교회 안에도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소위 끼리끼리의 사랑입니다. 소위 교회 안에 바리새인들입니다. 자신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그것이 성경이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스러운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를 미워하던 죄인들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미움 때문에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고자 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런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받는 대상의 가치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대상의 가치를 보고 뭔가를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기엔 조건이나 어떤 자격이 없습니다. 내게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다 없다를 따지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가치를 따지지 않고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
Ⅱ. 여기 요한은 새계명을 이야기 합니다. 왜곡된 사랑을 바로 잡게 하시려고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새 계명은 무엇이고, 이것은 옛 계명과 어떻게 다를까요?
ⅰ) 우선 사랑의 대상이 달라졌습니다. 마 5:43-44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사랑해야 할 이웃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웃이 단지 현재 나와 사귀고 있는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이웃이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원수까지도 그 이웃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ⅱ) 다음으로 사랑의 방법도 달라졌습니다. 요 13:34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하는 방법을 새롭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옛 계명과 달리 주님께서 사랑하신 것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할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제 불법이 성행하고 사랑이 메말라 가는 시대에 우리끼리만, 교제하고 우리 중에서도 마음이 안맞으면 원수보다 더 미워하는 일이 여러분 자신에게 있다면, 당신은 종교인일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 사랑을 주어도 받지 못하는 영적 장애를 가진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 역시, 이 더럽고 추악한 냄새가 나는 이 세상 한 복판에 당신의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악으로 물들고 오염된 나하나를 건지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신 것입니다. 뭐 자격을 따지지도,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나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나의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고, 희생 제물로 나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내가 뭔데, 도대체 나란 인간이 뭐길래, 하나님께서 외아들 독생자를 아무 조건 없이 주셨습니까? 이 넘치는 사랑을 입은 우리는 사실 책임이 무겁습니다. 저는 사랑하면 이 이야기를 잊지 못합니다.
어떤 소녀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인형 중에서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는 인형이 있었습니다. 그 인형은 가장 비싼 인형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가진 인형 중에서 가장 예쁜 인형도 아니었습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묘사하자면, 눈이 하나가 떨어져 나간 애꾸에다가, 불에 그을려 한쪽 다리마저 온전치 못한 인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소녀는 그 인형만을 안고 놀고, 잘 때도 언제나 그 인형을 끌어안고 잤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엄마가 하루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애야, 넌 왜 그렇게 그 인형을 좋아하니? 다른 더 좋은 인형들도 많은데….” 그랬더니, 이 아이가 갑자기 자기가 안고 있던 인형을 침대 위에 놓아두고는 엄마를 방 밖으로 이끌어 내더니 귓속말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다른 인형들은 다 예뻐서 다른 사람들도 다 예뻐하잖아. 하지만 저 인형은 내가 사랑해 주지 않으면 아무도 사랑해 주지 않는 인형이거든. 그래서 내가 사랑해 줘야 해.” 어린 소녀이지만, 저는 이 소녀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참사랑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제 무더운 여름 코로나 이후로 시작하는 여름 성경학교와 목장 연합 예배에 모두가 나와 섬기고 사랑하십시오. 멀다고 바쁘다고 나하고 상관이 없다고 무관심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일 수가 있나요? 불볕 더위에 수고하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세요. 그리고 제정적으로 많은 투자가 됩니다. 여러분 자녀 하나 키우는데도 과외다 뭐다 하면서 학원비가 얼마나 많이 지출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자녀를 키워야 합니다. 울며 씨를 뿌린자는 반드시 기쁨의 열매가 맺히게 될 줄 믿습니다. 예전엔 목장들이 모여 수박 헌금도 했지만, 이번 기회에 사랑을 담아 감사헌금도 뜨겁게 하세요.
사랑이 뭡니까?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큰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기도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