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기도하십시오. 약5:13-18. 2023. 7/18
성경에 보면 기도하라는 명령이 참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명령의 강도가 평범하지 않습니다. ‘구하라 그래 놓고는 또 찾으라, 그리고 또 문을 두드리라,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부르짖으라, 마음을 토하라’는 이런 표현들을 종합해 보면 이 기도하라는 내용이 그렇게 듣고 지나갈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 삼상12:23을 보면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 아니 잠시 기도하는 것을 쉬는 것조차도 죄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만큼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본문 13-18절까지 총 6구절 가운데 '기도'라는 단어가 몇 차례나 나옵니까? 모두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자신이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기도를 강조했던 것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을 기록한 야고보는 핍박받는 교회의 산 소망을 불러 일으킨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별명은 ‘낙타무릎’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다가 돌에 맞아 순교한 야고보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낙타같이 굳어진 야고보의 무릎이 낙타 무릎처럼 각질이 굳어진 이 모습 앞에 제자들은 통곡을 했습니다. 한 생을 기도의 무릎으로 산 사람, 이 야고보가 기도에 대해 외칩니다. 16절에 ‘서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여기 ‘서로’가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신약성경을 보면 ‘서로’라는 말이 무려 50번 이상 나옵니다. 이 서로라는 말은 책임감을 가지고 ‘함께 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15차례 이상이나 교회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몸은 몸인데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는 우리 머리요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지체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아는 사람들이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지체들끼리 성장하도록 격려하고 도와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모습입니다. 우리는 한 지체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믿음생활을 감당하고 쓰러진 자를 세우고 함께 일어나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코로나가 진정되어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살아가지만, 3년의 시간은 우리의 일상에 너무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간 지속되자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성도 가운데 언제부터인가 신앙생활이 무너져 가는 분이 계십니다. 기쁨도 사라지고 삶 속에 감사가 메말라 가기 시작합니다. 한때는 오뉴월의 신록처럼 활력 넘치던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생기를 잃어버리게 됩니까? 왜 기쁨이 사라지고 열심히 식어지고 말았습니까? 왜 시험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 될까요? 왜 관심과 생각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속된 것에 기울어질까요? 한 마디로 영적인 슬럼프에 빠진 것입니다. 이런 영적 슬럼프를 겪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슬럼프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도가 힘이 듭니다. 기도의 자리에 나가기가 꺼려집니다. 그리고 기도가 잘 안 됩니다. 영적으로 집중도 잘 안 되고, 무슨 기도를 드려야 할지도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럴 때 서로 기도의 자리 앞에 서서 영적인 슬럼프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미국 켈리포니아 레드우드 국립공원에 있는 ‘레드우드’라는 미국 삼나무가 있습니다. 최대 130m까지 자라는 이 삼나무는 큰 키에 비해서 뿌리가 깊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거센 비바람을 이겨내며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뿌리들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뿌리들이 서로 얽혀 서로를 지탱해주지 않는다면 분명 비바람에 쓰러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지금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인들로 신앙의 기초가 무너지지 않도록 기도의 줄을 놓치지 않도록 몇가지를 말씀합니다. 그 중의
Ⅰ. 하나님만을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무슨 말입니까? 여기 기도와 찬양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놓쳐서는 안될 영적 자세입니다. 기도나 찬양은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여는 창입니다. 특히 찬송은 곡조 있는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관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시34:15절에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 도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의 기도 소리에 귀 기울이신다는 말입니다. 여기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묻습니다. 여기 고난이 나옵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가장 많이 넘어지는 시기가20-30대입니다. 마음은 아직 청소년인데 몸은 벌써 어른이 되고, 온갖 유혹과 시련은 몰려옵니다. 그러다가 꿈을 안고 결혼했으나 생존경쟁의 치열한 전쟁에 나도 모르게 내몰립니다. 40대는 어떻습니까? 어떤 분이 한국에서 40대로 사는 것은 사망진단서를 받고 살아가는 시한부 환자와 같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남성문화 연구소 이의수 소장이 낸 책 제목이 재미있습니다.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 한참 가정을 이끌어야 하는 40대 남녀는 아플 수도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50대는 어떨까요? 서울대학교 송호근 교수가 쓴 책 제목이 이 시대의 분위기를 대신합니다.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 50대가 얼마나 힘들면 이 소리 내 울지 않는 것이라고 할까요? 어찌 그뿐입니까? 이제 60대 이후는 미래의 꿈보다는 현실을 인정하며 세상의 무거운 짐을 끌어 안고 사는 고난의 삶을 살아갑니다.
고난은 그 자체가 크고 작음에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믿음의 태도냐, 아니면 불신앙적 태도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이렇게도 될 수 있고, 저렇게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태도가 바로 ’기도의 자리에 서 있는가, 아닌가‘입니다. 여기에 따라 엄청난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실까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엔드류 머레이는 기도를 ’여과 장치‘라고 했습니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기도해도 하나님의 여과 장치를 통해 내 욕망, 내 이기적인 것이 다 걸러지고 하나님의 뜻만 걸러져서 나온다.’ 맞는 말입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기도의 가장 영광스러운 결과는 기도하는 내가 변화하는데 있습니다. 기도는 내 잘못을 깨닫게 해줍니다. 나의 부족과 누추함을 알게 해 줍니다.하나님의 말씀 앞에 불순종했던 나를 발견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회개 하지 않던 내가 십자가의 사랑 앞에 자복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능력이요 이것이 기도의 기쁨입니다.
뿐만 아니라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묻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구원하셨습니까? 에베소서 1장에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세 전에 예정해 놓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도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만 닿으면 금방이라도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천 국의 거문고와 같습니다. 성도는 이미 노래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은 노래하는 영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의 골고다를 향하시면서도 제자들과 함께 찬양했습니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성령받은 사람은 찬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 큰 기대를 걸고 인생을 투자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눈에 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나그네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밤이 다가와도 크게 타격을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래합니다.
Ⅱ.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6절
본문 14-15절을 보면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병 들었다’는 것은 단지 육체적인 질병에 걸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가벼운 질병에 걸려서 어렵지 않게 대처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들었다는 것은 질병 때문에 몸도 힘들고, 또 마음도 힘들고, 나아가 그 영혼도 힘든 상태에 빠져있는 것을 말합니다.
특별히 현대사회는 단순히 질병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문제가 뒤섞여 있습니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병이 너무 많습니다. 영적인 영역 속에 회복이 일어나지 않는 육체는 아무리 건강하다 해도 제대로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그대로 둔 이상 육신적 정신적 질병은 끝도 없이 늘어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라고 합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무조건 낫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거나 “믿습니다” 일변도의 선포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시103:2-3절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ë � 병을 고치시며” 순서를 잘 봐야 합니다. 그냥 질병의 치유를 성경이 이야기하지 않고 반드시 죄를 먼저 다룹니다. 병을 고치는 사건 이전에 죄를 사하시는 일이 선행됩니다. 죄의 문제를 먼저 다룹니다. 이것은 죄와 질병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불행은 죄로부터 왔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이의가 없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시지만 단순히 치유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죄의 용서를 먼저 선포하십니다. 죄의 용서를 먼저 선포하신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원한 구원에 관심을 가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분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온전한 치유는 불가능합니다. 이 땅에 수많은 병원이 있고, 늘어난다고 해도 병원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근원적으로 있습니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합니다. 병원은 일반 은총입니다. 의술의 도우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좋은 의사, 좋은 약 만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기대하며 기도하십시오! 그런 방식으로도 하나님이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나 의술 만능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의술의 도움을 받지만, 결국 치유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대하16:12 보면 아사 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무슨 말입니까? 아사 왕이 의사를 찾아간 게 잘못이란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한 것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의술의 도움을 받은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에게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병들어 죽고 맙니다. 의술만능주의는 불신앙의 극치입니다. 5절 보면.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시리니” 믿음의 기도가 능력이 있어 병을 치유한다는 뜻입니다. 비단 질병 문제뿐 아니라 모든 문제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심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나 없나 하는 것은 문제가 생겼을 때 정말 기도부터 하는가를 보면 압니다. 무엇보다 먼저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Ⅲ.어떻게 기도해야 하나? 17-18절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여기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는 말씀이 나옵니다. 한 시대를 열고, 한 시대의 재앙을 끝나게 했던, 하늘 문이 열리게 했던 엘리야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기도 때문입니다. 이 기도는 적당한 기도가 아닙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보면 특이하게 합니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집어넣고 기도합니다.
왜 이렇게 기도할까요? 간절함의 표현입니다. “간절히”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기도에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기도할 때, 죽기 내기로’ 기도하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죽고 사는 생명의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기도가 중요합니다. 17-18절에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엘리야도 우리처럼 두려워하고, 지치고, 넘어지고 쓰러지는 사람이지만 기도함으로 놀라운 기적을 행했던 것입니다. 그의 위대함은 하나님의 능력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2023년 1월 첫 번째 월요일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국 프로풋볼리그(NFL) 버펄로 빌스와 신시내티 벵골스의 플레이오프 경기가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페이코 스타디움에서 열렸습니다. 강팀인 버펄로 빌스와 신시내티 벵골스의 경기였기 때문에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치열한 경기를 펼치고 있던 도중 충격적인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버펄로의 수비수 다마르 햄린 선수가 상대 팀 선수에게 태클을 시도한 뒤 일어나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곧바로 의료진이 달려 나와 심정지 상태였던 햄린의 심장을 되돌리기 위해 심폐소생술(CPR)을 진행했지만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햄린의 심정지가 계속 이어지자 버펄로 선수들과 신시내티 선수들 그리고 코치들까지 쓰러진 햄린의 주위를 둥글게 둘러쌓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무릎을 꿇은 채 햄린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이 상황을 생방송으로 중계하던 ESPN 해설자들도 방송을 잠시 멈추고 기도했습니다. 미국 프로풋볼리그 해설가이자 선수로 활동했던 댄 올롭스키는 “방송 중에 해서는 안 되는 것일 수 있지만 지금은 그를 위해 기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며 다마르 햄린을 위해 소리 내어 기도했습니다. 공동 진행자인 로라 러트리지와 마커스 스피어스도 그의 기도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며 “아멘”이라 답했습니다. 햄린은 쓰러진 지 16분 후 구급차에 실려 신시내티 대학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병원에 이송된 후에도 심각한 상태가 지속하자 팬들은 곳곳에서 기도집회를 열었습니다. 여기엔 불신자도 함께 모여 햄린을 위해 기도에 동참했고 햄린을 위한 기도의 물결은 뉴욕타임스, AP통신 등 미국 주요 미디어를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사흘 뒤 햄린은 깨어났고 회복된 후 방송에 나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열정과 사랑을 부어주셨고 나를 그것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통스러웠던 팬데믹 시간이 지나자 전쟁의 공포가 세계를 뒤흔들었습니다. 경제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기상황입니다. 사회는 마약중독이란 재난 상황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삶을 살던 사람들은 영혼까지 떨려오는 고난을 겪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죠. 세상에는 진짜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통해 서로 기도를 통해 놀라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미국인들이 깨달았습니다. 매일 아침 우리가 맞이하는 세상은 지혜롭고 의로운 통제 아래 있습니다. 통제하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며 그분이 삶의 세밀한 것까지 다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돌보십니다. 그 은혜 앞에 이 힘든 시절 서로 기도합시다.
이 비로 인해 이 땅에 고통당하는 분들을 위해 기도
여름 성경학교를 위해 자녀들이 믿음을 회복하도록 교사들이 성령 충만하도록
목장 연합 예배때 목장이 서로 하나가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