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격려하며 사십시다. 행436-37. 2023. 7/23
여러분 최근에 누군가로부터 따뜻한 위로를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배우자, 자녀, 부모, 직장 동료, 그 누구든 간에 정말로 용기를 심어주는 따뜻한 격려를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비판과 정죄가 난무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교사를 비판하고, 고용인과 고용주들은 서로의 잘못을 비판합니다. 국민들은 지도자를 비난하고, 지도자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급급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뜻하게 위로해 줄 사람이 참으로 없는 세상입니다. 사람과 이 사회를 세우는 격려의 사람은 더욱 찾아보기가 어려운 세대입니다. 누가 이 척박한 세상을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정죄의 화살을 맞고 남몰래 신음하는 자들을 찾아가 치료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우리가 바로 격려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은 초대ê ��회 역사를 펼쳐 보이며 우리에게 한 중요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대단한 지면을 할애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통해 세워지는 중요한 인물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명의 사람 사울을 세워 사도 바울이 되게 했던 사람, 초야에 묻힌 사울을 발탁해 위대한 전도자가 되도록 격려했던 사람, 버림받은 마가를 격려해 다시 일선 사역자로 세워주었던 사람, 그가 바로 격려의 사역자 바나바입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요셉입니다. 바나바는 사도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인데, 그것이 너무 유명해져서 우리는 그를 요셉이라 하지 않고, 오히려 바나바라 알고 있는 겁니다. '바나바'는 권위자라고 번역해 놓았어요. 그렇다면 권위자(勸慰子)는 무슨 뜻일까요? 勸(권할 권), 慰(위로할 위), 子(자식 자)를 썼어요. '격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격려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운데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남모르는 마음의 상처 때문에 힘겨워하는 분들, 교회 봉사하며 지쳐있는 분들, 참 많은 분들이 위로를 필요로 합니다. 시 69:20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비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불쌍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다윗의 절규입니다. 마음이 상하고 근심이 가득하여 힘들 때, 누군가 위로해 줄 사람을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다윗 같은 사람도 위로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요, 그를 찾아가 위로를 받아야 할 것 같은 사람, 다윗도 위로가 필요해 저렇게 절규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요셉은 구브로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자기 고향인 팔레스타인에서 자란 유대인이 아닌 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레위족이었지만 제사장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니요, 사도도 아니요, 보통 레위인, 즉 우리와 같은 평신도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러나 사도행전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바나바는 초대교회에서 사도 바울에 버금가는 중요한 지도자의 위치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이 평범한 이 사람을 위대한 바나바로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바나바를 그토록 위대한 지도자로 세웠습니까? 사도행전은 그가 행하였던 격려의 삶으로 인해, 그가 이러한 위대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고 얘기합니다. 그가 살았던 격려의 삶이 너무나도 놀라웠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를 원래 이름보다는 '격려자'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격려자들이 필요합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다음세대에 대한 우려를 많이 하고 여기에 대한 진단도 많이 하지만, 저는 이 사회가 진영논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다음세대가 무엇을 보고 배우며 자랄까하는 걱정이 많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지나친 진영논리에 의한 양극화입니다. 정치에는 늘 여와 야 그리고 진보와 보수 사이의 건설적인 경쟁과 힘겨루기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권력을 견제하고 치우침 없는 사회 발전을 이끌어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기에 분노와 증오가 덧씌워졌습니다. 여와 야가 경쟁하는 파트너가 아니라 적이고, 심지어 제거해야 할 원수로 여깁니다. 토론과 건설적인 논쟁이 아니라 프레임을 씌워서 상대를 악마화하고 서로 막장 싸움을 합니다. 비난에 앞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바나바는 격려자의 별명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 한사람의 영향력은 그가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인생으로 바꾸어져 갑니다. 무엇보다 바나바는
Ⅰ. 자기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먼저 생각합니다. 36-37
본문 37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가 자기 밭을 팔아 헌금했다는 말씀입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입니다. 조상 때부터 구브로로 이민을 가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구브로는 당시 구리광산으로 유명했고, 그래서 부자들이 많았습니다. 바나바 가문도 큰 부자였고, 장차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예루살렘에 부동산을 준비해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초대교회에 핵심멤버로 사역에 동참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재정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교인가운데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의 부동산을 처분하여 헌금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들이 헌금을 받아들고 크게 놀랐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온 교인들이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됐습니다. 가난한 교인들이 큰 도움을 받게 됐습니다. 초대교회가 큰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됐습니다. 물론 바나바라고 해서 왜 돈이 필요 없고, 쓸 곳이 없었겠습니까? 그에게도 가족이 있었어요. 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취미생활도 하고 싶고, 저축도 해야 되고, 쓸 곳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바나바'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Ⅱ. 격려자는 사람을 믿어줍니다.
최연소/최소 경기 2000안타, 최연소 1000득점, 7년 연속 150안타, 10년 연속 200루타…. 프로 야구 선수 가운데 누군지 아십니까? 손아섭입니다. 그는 프로 야고에서 1군으로 뛸 수 없는 수비 실책의 약점을 가지 선수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나이 40십이 넘도록 활동을 하고 14년 연소 100안타를 치고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감독의 격려 한마디 그를 믿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감독으로부터 자신의 인생을 바꿔 놓을 한마디를 듭습니다. “네가 수비를 못해서 1점을 잃으면 잘 쳐서 2점을 얻으면 되고, 수비로 2점을 놓치면 3점을 얻으면 된다. 너는 타격에 장점이 있는 선수니 수비에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지 마라. 나는 너를 믿기 때문에 너가 수비를 잘하든 못하든 너를 경기에 내보낼 것이다.” 이 감독의 믿어주는 격려의 말 한마디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수비하다 실수하면 기가 죽고, 눈치를 봤을 텐데 그 이후로는 실수를 해도 타격을 잘 해서 팀에 도움이 되면 된다는 마음가짐이 생겼습니다. 격려 한마디에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성경에서 바나바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바울입니다. 존재감이 없던 바울을 위대한 사역자가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행 9:26-7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 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심한 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사도들과 교인들이 선뜻 받아들지 못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해하던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여라도 위장전술로 교회 내부를 파악하기 위한 것으로 의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바나바가 나섰습니다. 우선 바울의 회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과 지도자들을 설득했습니다. 바울은 과거의 사울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주님께 사명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교회가 바나바를 보고, 바울을 형제로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 땅에 최초로 세워진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가 목회를 할 때, 초야에 묻혀 잊혀져가는 바울을 다소까지 찾아가 그를 데리고 목회를 합니다. 그 당시 안디옥 교회를 보면 지도자, 훌륭한 평신도 지도자들이 너무나 많아서 사도 바울 없이도 충분히 교회가 커 갈 수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나바는 왜 사도 바울을 불렀는가? 사도 바울에게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은 참으로 차갑습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너무도 매정합니다. 쓰고 나서 쓸모 없으면 가차없이 버립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사람을 쓰고 나서 버리는 사회라는 겁니다. 사람을 길러주는 사회가 아닙니다. 저 사람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저 사람은 내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위험한 세상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행15장에 기록된 마가에 대한 바울과의 의견충돌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차 전도 여행기간 중 떠나간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와 그런 사람은 데리고 갈 수 없다는 바울과 의견이 대립된 것입니다. 성경은 심히 바울과 다투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갔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만일 바나바가 그때 쓰러진 마가를 일으켜 세우고 격려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성경책 중에는 그토록 중요한 '마가복음'이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실패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바나바가 그를 격려했기 때문에, 그는 다시 세움을 입어서, 결국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놀라운 사도가 된 것입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도 이것을 깨닫고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후서를 쓰며 디모데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려 오라! 저가 나에게 유익한 사람이니라!" 마가와 화해하려고 한 겁니다. 그때 만약 바나바가 마가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한 사람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 그 가능성을 키워주는 사람, 비록 그의 과거가 우리를 실망시켰어도 비판하기 보다, 버리기보다, 포기하기보다 그 사람을 믿어주며 병들고 약하고 쓰러져있는 형제의 손을 붙잡고 함께 가자고 소리치는 바나바 같은 이 사람이 부럽지 않습니까?
Ⅲ. 사람을 수단으로 보지 않고 목적으로 바라봅니다.
심지어 그는 격려자 일뿐 아니라 사도행전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앞부분에서는 '바나바와 바울' 그렇게 나옵니다. 조금 더 뒤로 넘어가게 되면 ‘바울과 바나바’, ‘바나바와 바울’로 순서 없이 나오다가, 뒤로 갈수록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나중에 바나바는 소리 없이 사라집니다.
그래도 성경을 보면 섭섭했다는 소리가 없습니다. 사라져야 될 때를 알고, 소리 없이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던 바나바는 놀라운 사람입니다. 자기가 세워야 될 사람을 세워 격려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빠져야 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조용히 사라질 줄 알았던 바나바가 그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세워서 나보다 더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행복해 할 수 있었던 사람. 그가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자신이 당당하게 안디옥교회 담임목사이면서도 불구하고 나보다 더 훌륭한 바울을 계발하여 그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전도자로 세워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기는 조용히 역사에서 사라져 갈 수 있었던 사람. 내 주변에 있는 뭇 사람들을 세워주고 내가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사람, 그가 바로 「바나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바나바 아니겠습니까? 기독교 역사 속에 바나바가 없었다면 우리는 사울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세상엔 부정적인 비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서로 상대의 문제점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교회가 격려와 돌봄 사역을 제대로만 감당하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고 R.A. 토레이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성령님을 '보혜사'라 부릅니다. 보혜사란 격려자요 돌보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는 돌봄과 격려사역이 충만한 교회입니다. 오늘도 성령이 함께 하실 때 하시는 사역이 있습니다. 상처 난 여러분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되어 있을 때에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갈 길을 알지 못할 때에 갈 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리주변의 이웃들에게 격려의 사역자, 돌봄의 사역자로 새롭게 부름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기러기가 갈매기 모양으로 날아가는 것은 멋있어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류학자들이 밝혀냈습니다. 갈매기 모양으로 날아갈 때 71% 더 날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맨 앞에 날아가는 새가 뒤따라오는 새가 받을 공기 저항을 줄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러기가 날면서 우는 이유는 뒤에 따라가는 새가 앞서 가는 새를 격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참 날다가 힘들면 앞서 가던 새와 자리를 바꿔 먼 여행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한 마리가 이동하다가 아프면 다른 두 마리가 같이 내려와 있다가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다른 갈매기때들과 합류하여 다시 날아갑니다. 격려하고 위로할 때 본래 역량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하게 됩니다.
히10:24절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신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에게 그 십지가의 사랑의 띠로 서로 격려하며 살아가도록 하신 은혜입니다. 이 은혜 앞에 섰다면 우리의 격려는 예수님을 닮아가고 거룩한 삶으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사는 인생으로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격려는 우는 아이에게 젖을 주어 달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자는 자를 깨우는 겁니다.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격려의 삶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삶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묻습니다. 여러분은 격려자이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바판과 편견된 자세로 살아가는 자 이십니까? (반주 부탁) 너 위해 무엇 주느냐?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오늘의 세상은 바나바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바나바를 소리쳐 요구하고 있습니다. 누가 바나바가 되어 낙심하여 멸망해 가며, 격려가 필요해서 아우성치는 저 사람들의 소원을 채울 수 있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이 사람이 되어 보지 않겠습니까? 바나바와 같이 남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고, 남을 믿어 주며,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목적으로 생각하며, 넘어진 자를 과감하게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자!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가정과 교회, 불신과 낙담으로 인해 넘어져 가는 이 한국 사회가 다시 일어날 줄 믿습니다. 지금은 바나바처럼 격려자가 그리운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