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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2024~2009

잃었다가 다시 찾는 기쁨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3-08-28 | 조회: 207
 
 
잃었다가 찾는 기쁨 15:20-24. 2023. 8/27
 
여러분은 뭔가 중요한 것을 잃어본 적이 있습니까? 작년에 합동신학대학원 이사회 연말모임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회의를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하고 숙소로 나왔는데 핸드폰이 없습니다. 아찔하더라구요. 급한 회의 장소로 가보았는데 핸드폰이 거기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한지 아무리 찾아도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여기저기 있을 법한데를 알아보았지만, 어디에도 없기에 체념하고 지하 주차장에 들어와서 차를 시동걸려고 보니까 재차 밖에 트렁크 위에 제 핸드폰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알았습니다. 무엇을 잃었을 때 충격과 또 그것을 찾았을 때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것이 소중한 것일수록 그 기쁨은 더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잃습니다. 핸드폰만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친구도 잃고, 거래처도 잃고, 그리고 사랑도 잃습니다. 가끔 찾기도 하지만 못 찾는 것도 있습니다. 평생 못 찾는 것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잃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크게 세 가지 잃는 것이 나옵니다. 1-7절은 목자가 양을 잃습니다. 8절에서 10절은 여인이 동전을 잃습니다. 11절부터 24절까지는 아버지가 아들을 잃습니다. 처음에는 짐승을 잃고 다음 돈을 잃고 마지막에 사람을 잃습니다. 잃는 것도 다양하고 잃은 사람도 다양하고 잃는 장소도 다릅니다. 양은 들에서 잃고 동전은 집에서 잃고 아들은 가정에서 잃습니다. 결국은 다 찾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리면서 경험하는 고통은 동일합니다. 양을 잃어버린 목자, 동전을 잃어버린 여인,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 모두 마음 졸이며 잃어버린 것을 찾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이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입니다. 다른 것은 혹시 못 찾으면 큰 마음 먹고 포기하면 됩니다. 그러나 아들을 잃어버리면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아들은 어떤 경우에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셋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입니다. 이것이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삽니다.
 
. 둘째 아들이 잃어버린 아버지
오늘 본문에도 고향 길을 가는 한 아들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소위 돌탕,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한 청년이 집이 너무 싫은 겁니다. 형제가 둘이 있었는데 형도 보기 싫고 부모의 간섭도 싫고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을 좀 벗어나서 멋지게 살고픈 생각이 있던 차에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물려줄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여 그 돈을 받아가지고 고향을 떠나 먼 외국으로 가버리고 맙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중동지역에서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물려 달라.’고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유산은 반드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만 물려받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한 것은 살아계신 아버지를 죽은 사람 취급했거나, 아니면 아버지 빨리 죽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불효막심하기 짝이 없는 아들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떠날 때에는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유산으로 받은 것을 가지고 가서, 해보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에게 귀속된 존재가 아니라, 떳떳하게 독립된 로 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을 떠난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자신이 꿈꾸던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돈이 그에게서 사라지자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아버지께 받아 갔던 유산만 잃은 것이 아닙니다. 돈을 물 쓰듯 할 때 그의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그는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돈이 많을 때에는 친구도 많았고, 쾌락을 위해서 예쁜 여인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고 그의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먼 나라에서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육체적으로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별수 없이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혐오하던 돼지들의 쥐엄 열매로 굶주린 창자를 채워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동안 그의 자존심은 구겨졌고 그는 죄책감과 소외감 그리고 거절 감으로 몸부림쳐야 하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춥고 굶주린 영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굶어 죽는 것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원래 이렇게 환경에 시달리며 사는 나약한 존재로 지음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모든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유일한 고귀한 존재입니다. 창세기 27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1)생령이 되니라 흙으로 지었어요. 그래서 우리의 육체가 죽으면 썩어 어디로 돌아갑니까? 흙으로 돌아갑니다. 100% 그러나 우리는 끝나지 않아요 우리는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육체를 만드시고 오지 우리 인간에게만 자신의 형상 영혼을 불어넣어주었다. 이 땅에 하나님을 닮은 유일한 존재는 우리예요. 여러분 왜 우리는 왜 때로 저렇게 바다를 바라보며 하염없는 마음이 드나요? 왜 때로 달을 바라보며 허전한 마음을 가집니까? 이 작은 존재가 어떻게 이 우주를 품습니까? 묵상합니까?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개를 많이 키웁니까? 어린이 대공원에 산책을 하면 유모차가 참 많이 다닙니다. 구나하고 보면 개가 들어앉아 있습니다. 뭐 이런 세상이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사랑하는 개라도 그 개가 달을 바라보며 왜 인생이 이런가 하는 개를 보셨나요? 없습니다. 우리에게만 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만드셨는데 그리고 에덴동산 주어 살게 했는데 성경에 보면 인류의 조상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어요. 하나님의 곁들 멀리 떨어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포인트예요. 선악과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리가 둘째 아들처럼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한 선을 넘었습니다. 우리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고, 하나님의 곁을 멀리 떠나갔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지금 이렇게 환경에 휘둘리며 탕자가 돼지 우리에 사는 것처럼 이렇게 살게 되었고 그렇게 사랑하고 싶지만은 사랑보다는 미움을 갈등을 유발하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싶은데 그렇게 살아지지 않습니다. 내 마음대로 절대 인생이 살아지지 않아요. 강하게 살고 싶은데 자꾸 낙담과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왜 그래요. 바로 우리가 하나님 곁을 멀리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는 요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탕자 역시 이렇게 고향을 떠나고 아버지의 품을 떠날 때, 이렇게 살 줄 알았으면, 누가 집을 떠났겠습니까? 좀 편안하게 살아보려고, 자신의 계획을 가지고 떠난 길인데 모든 것을 다 잃고 상거지가 된 것입니다. 그 때 이 아들은 비로서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굶어죽지는 않았을텐데.’라는 생각이 들자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습니다. 본문 17절이 바로 그 고향으로 가는 인생의 전환점을 보여 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여기 돌이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본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 왔다는 말입니다. 그는 참으로 오래 만에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모습-아버지를 떠나 방황하는 자신의 비참한 실존(죄인 됨)을 의식한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오래 만에 아버지를,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를 떠난 것을 아파하며 뉘우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회개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아직도 회개는 아닙니다. 회개는 뉘우치는 감정 이상의 의지적인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20절이 바로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이때가 바로 고향으로,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는 순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주신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우리로 그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길이 되어주시기 위한 것임을 아십니까? 그가 친히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14;6) 왜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는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 없습니까? 인간과 하나님사이를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은 죄입니다. 죄책감은 하나님께 나아오려는 모든 사람의 발목을 잡는 무거운 사슬입니다. 탕자도 얼마나 주저했을까요? 과연 아버지가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받아 주실까? 그는 내게 소리치며 내 집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말라고 하지 않으실까?
 
. 기다리시는 아버지
우리는 기다리시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다 탕진한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갈 마음을 먹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거지꼴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모습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습니다. 양복 대신에 다 떨어진 옷 단정한 머리 대신에 헝클어진 머리 건강한 몸 대신에 아마도 동네 사람들이 그를 마주쳤다면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20절을 직역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갔다. 그런데 아들이 아직 집에 가까이 오지 않았음에도, 아버지가 아들을 보았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는 순간 그 마음이 불쌍한 마음으로 가득 찼다. 아버지가 아들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아들을 얼싸 안고 입을 맞추었다.' 여기 '아들이 아직 집에 가까이 오지 않았음에도'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너무 거리가 멀어서 아직 사람을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을 의미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나간 그날부터,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 아버지의 눈에는 저 멀리에서 오는 그 사람이 바로,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이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 측은히 여긴다는 것은 ’compassion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실망만 잔뜩 안겨주고 떠났던 아들이 괘씸할 수도 있었지만, 그 많은 재산을 다 날리고 거지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의 모습에 화를 낼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측은히 여겨주었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얼싸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원래 원어는 입을 한번만 맞춘 것이 아니라, 맞추고 또 맞추고 계속해서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내가 너를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끝까지 용서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설명해주고 계세요.
 
하나님은 누구신가 여러분을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여러분을 만드시고 여러분을 이 땅에 보내신, 그리고 하나님의 곁을 멀리 떠난, 여러분을 지금도 기다리시는 여러분의 아버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연히 이 땅에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속지 마세요. 저 우주를 한번 보십시오. 이제 과학이 발달해서 우리가 사는 은하계의 크기가 거의 정확하게 나왔다고 합니다. 지름이 얼만지 아세요. 10만 광년, 놀라지도 않네요. 이는 1초에 햇빛이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돌아요. 빛의 속도로 가도 10만 년을 가야돼요. 그런데 그 은하계 안에 몇 개의 별이 있는가, 최소 사천억 개의 별이 있어요. 4000억개가 넘는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요. 이것이 우연히 만들어졌다구요? 그렇게 어리석습니까? 이 우주의 이런 은하계가 몇 개가 있는가 지금까지 학자들이 발견한 것만 해도 이런 은하계가 1700억개가 있대요. 우연히 만들어졌나요? 아닙니다.
 
이 두꺼운 성경은 무엇으로 시작하는가? 아주 짧은 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그 첫 문장이 창세기 1:1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여러분, 이 땅과 여러분을 하나님이 지으셨어요. 그리고 지금도 여러분이 그분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세요. 수님은 지금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당신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분은 여러분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사랑하시는 아버지십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아들의 모습 아버지의 곁을 떠난 이 탕자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삶을 조명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인간론을 말씀해 주셨어요. 그러나 아들을 기다리는 그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설명합니다. 그 분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아버지십니다.
. 잔치를 베룰다.
여러분, 아버지가 둘째 아들이 완전히 변한 모습을 보고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역겨운 냄새가 물씬 났지만, 신발은 다 털어졌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그 아들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종들을 불러다가 다시 돌아온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혀주고 신을 신기고 가락지를 끼워주라고 명령했습니다. 가락지는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준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아들은 종의 하나로 받아주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아들로 받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하자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는 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을 너무 너무 기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둘째 아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한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주님 곁을 떠났던 영혼이 다시 주님 앞에 나오면 하늘나라에서 큰 잔치를 벌이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또 한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면 천국에서 팡파레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중단할 수 없는 기쁨의 함성이 터질 것입니다. 이번 전도집회를 통해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내 잃은 아들을 찾았고 죽었던 자식을 다시 얻었다. 이로써 기뻐하고 기뻐하자." 이 천국의 잔치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집회를 준비해야 될 것입니다. 잃은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때 내가 갖는 축복이 있다면 그것은 처음 예수 믿을 때의 감격이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첫 사랑이 회복되는 것은 쉽습니다. 주님 앞으로 인도해서 그 분이 예수 믿는 모습을 볼 때, 주님을 처음 믿었던 감격이 뭉게 구름이 피어나듯이 가슴속에 피어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전도는 첫사랑의 회복입니다. 혹시 구원의 감격을 잃고 무덤덤하게 신앙생활 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너무 옛날에 믿었기 때문에 구원의 기쁨을 잃은 채 살지는 않습니까? 한 영혼이 돌아올 때, 마치 이전에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했던 것처럼 기뻐하시는 우리 주님입니다. 그 기쁨이 충만할 때 우리 영혼도 더 충만해집니다. 이런 은혜가 성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에 아직도 나는 하나님께 찾은 바 되지 못했다고,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이라고 생각되시는 분이 있다면 그 크신 주님의 사랑 앞에 몸을 던지십시오. 그 분은 아직도 사랑이십니다. 내가 주님을 실망시키고 배반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랑하십니다. 이 은혜가 성령으로 역사하는 아름다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이 둘째 아들을 통해서 오늘 나 자신을 발견할 순 없습니까? 내 살아온 인생의 한 진실이 담겨 있지 않습니까? 한 때 푸르른 꿈, 야망이 있었습니다. 물질도 있었습니다. 마음먹은 것을 할 수 있는 의욕도 있었습니다. 즐거움을 쫓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마음대로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지금 내가 진정 바라던 모습과는 영 다르다면 탕자 속에서 우리 자신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인생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바로 탕자가 돌아갔던 아버지 품입니다. 성경은 이 아버지를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강제로 열어젖히지 않습니다. 나를 아버지라 믿어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던 아버지를 무시했던 아버지를 몰랐던지 간에 끊임없이 사랑해 주십니다. 오늘 이 사랑과 공급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 공급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누구에게든지 하나님께서는 일정한 사랑을 공급해 주십니다. 죄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아버지는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아들의 회복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리라결단했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이 비유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돌아온 이 탕지에게 아버지는 탕자를 여전히 아들로 여기고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켜준 아버지였습니다. 아들은 이미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나는 아들의 자격이 없습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써 주십시요.” 라고 말한 것이지요. 아버지는 이 아들을 여전히 아들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4절 이 아들을 죄인이나 품꾼의 하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한가지만 요구하셔요. 한가지만, 용서는 다 해놓았는데 빨리 돌아와서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나의 입술로 한마디만 말하면 이미 용서한 그 사랑을 확인해 주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오늘도 기다리십니다. 한마디 들으실려고, 이미 용서는 해 놓았지만 우리가 그분 앞에서 무릎 꿇고, 아버지, 제가 돌아왔습니다. 저 용서해 주십시요. 저 용서해주세요. 그러면 잔치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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