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말하게 하심따라 고전2:1-5. 2023. 9/3
이 시간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귀를 열어주셔서, 오늘 말씀을 단순히 어떤 한 사람의 설교로 듣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게 되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싫어하시는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는 나오지만, 도중에 잘못되고 나중에 패가망신하는 것입니다. 마7:21절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리고 23절에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소위 나는 헌신했고 충성했다고 하는데 주님은 도무지 모른다고 합니다. 나를 떠나가라 하십니다. 이처럼 비참한 인생이 어디있습니까?
또 한 가지는 복음을 듣지 못해서 아까운 사람들이 영원히 멸망하도록 내버려지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성도의 직무 유기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기 때문에 특별히 자기 자녀들에게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막13:33절 같은 말씀이 아주 대표적입니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살전5:6절도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니라." 잘못되지 않으려면 깨어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잠들거나 혼몽한 상태에 빠지면 자신도 모르게 실수하고,잘못된 길로 발을 들여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로 하여금 잘못되지 않도록, 깨어있도록하기 위해 2가지 경보시스템을 마련하셨습니다. 하나는 역사적인 경고이고 또 하나는 현실적인 경고입니다.
교회는 지난 주일 태신자를 세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제자들과 이 세상에 등장할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 복음을 전하라는 특별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적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무나 잘 아시잖아요. 마28:19~20 “2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모든 족속에게 가서,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명령이라는 뜻으로 이를 가리켜 지상명령(Great Commission)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명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대수롭게 않게 여기면서 세상을 산다면 예수님의 가장 큰 명령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도 안하고 그저 적당히 신앙생활 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분들은, 천당이야 갈 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가장 큰 명령을 고의적으로 거부하거나 무시하고 살았다는 점에서 책임을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만큼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순종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대단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형제들을 볼 때' 아, 이 형제 구원해야지. 예수 믿도록 해야지. 어떻게 하면 전도할 수 있을까?'하면서 안타까워 합니까? 예수님께서 전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안타까워 하는 것입니다.
Ⅰ. 아덴에서의 실패
오늘 우리가 보는 이 본문에 복음을 전하다 탈진에 빠졌던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3절을 보면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사실 우리가 바울이라고 하면 담대하고 강인한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고후1:8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보세요. 바울은 ‘살 소망이 끊어졌다,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살아날 희망이 없는 이 절망감! 보통 사람 같으면,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바울이 여기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까?
바울은 고린도 도시에 들어오기 전에 아덴이라는 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아덴은 철학의 도시입니다. 여기서 토론과 논쟁의 장이 펼쳐졌습니다. 특히 아레오바고라는 곳은 가장 대표적인 곳입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총동원해서 복음을 설명하고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덴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울을 비웃으며 조롱하고 거부하였습니다. 심지어 말쟁이라는 소리를 듣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목숨 걸고 복음을 증거 하였지만 결실을 거두지 못했을 때, 그 마음에 얼마나 낙심이 되겠습니까?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무력함을 느꼈습니다.
바로 그런 마음을 가진 바울이 고린도라는 도시에 왔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가장 현대화된 문화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과 사치, 부도덕과 음란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오죽하면 "고린도인이 된다"는 말은 "방탕한 사람이 된다"는 말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거기다가 이 도시는 매우 자유로운 사상이 넘치는 도시이었음에도 유독 기독교에 대해서만은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복음의 핵심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바울이 담대하게 복음을 위해 산다하더라도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는 그 순간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비단 바울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여기 모인 우리 역시 얼마든지 세상에서 사는 동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동안에 그 당당하던 모습도 그 멋있는 비전도 다 잃어버린 채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 있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정말 깊이 자신의 연약함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Ⅱ. 새생명 축제
우리 교회도 전도에 대한 열망을 갖고 지난주부터 모든 교인들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라는 엄청난 태풍을 맞아 정말 힘든 시간들을 보냈고 마침내 지난 6월 1일부로 사실상 코로나가 종식됐습니다. 2020년 1일 20일 국내에 첫 코로나 환자가 나온 뒤 3년 4개월 만에 완전한 일상회복이 시작된 것입니다. 짧지 않은 이 코로나 기간을 지나면서 우리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최근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한국기독교분석리포트-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라는 책으로 펴냈습니다. 이 책에서 코로나 이후 일어난 변화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개인의 신앙생활의 변화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서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소위 ‘가나안교인’들이 급증했습니다. 이런 분들이 코로나 기간을 지나면서 무려 1/3이나 더 늘어났습니다. 다음으로 교회생활의 변화입니다. 교회의 주일예배 출석이 감소했습니다. 평균 코로나 이후 주일예배출석이 20-25% 감소했습니다. 특히 교회학교의 경우는 더 심각해서 약 30% 가까이 감소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사역이 위축되었습니다. 교세가 감소되었습니다. 헌신하는 성도가 급격히 줄어들고 교회가 어려움이 일어날 때, 때로 자신의 소중한 것을 바쳐서라도 충성하려는 사람들이 적어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적어지고 있습니다. 시13편에 보면 ‘기도 안하는 사람들을 사망의 잠에 빠진 자들이라’하지 않습니다. 이런 객관적 통계자료를 통해 우리가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코로나가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적지 않는 피해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마치 강력한 태풍이 지나간 뒤 곳곳에 갖가지 피해가 나타난 것과 같습니다. 오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럴 때 바로 우리 교회에 터치 153 새생명 축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Ⅲ.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고린도에 들어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영적 탈진 속에 있던 바울에게 꿈에 하나님이 다가오십니다. 본문에 포함 된 행18:8-9절에 보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보세요. 그가 얼마나 두려움에 빠져 절망 가운데 있었으면 주님이 한밤에 찾아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하셨겠습니까? 그리고 이 도시에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패배감과 좌절 때문에 더 이상 아덴에서 사역을 할 수가 없어서 고린도로 왔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정말 깊이 자신의 연약함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면 사역을 중단하거나 포기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사역을 계속한다고 해도 열매도 없고 큰 실패를 겪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고린도 사역은 그 어느 곳의 사역보다도 큰 열매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ì ��수를 믿게 됐고, 교회도 크게 부흥하게 됐습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4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고린도에서는 아덴에서와 다르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아덴에서 설득력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에, 자신을 내려놓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붙잡고 사역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특히 아덴에서의 사역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사역을 해서는 안 되고 철저하게 성령의 능력으로 해야 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연약함이 오히려 자신에게 큰 약이 됐다는 점을 감사했습니다.
고후 12:5를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10절을 보면 “내가 약한 그 때 강함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밤하늘을 쳐다보면 어두워질수록 별이 잘 보입니다. 해질녘이나 해 뜰 때 별들이 희미합니다. 그러다 한 밤중이 돼서 이 땅에 빛이 다 사라지고 나면, 별 빛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강하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가 약하면 그 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건강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던 사람이 질병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사업이 잘돼서 승승장구할 때는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던 사람이 사업이 망해서 절망할 때 하나님을 깊이 체험합니다.
행20:2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이 말씀의 의미는 예루살렘에 가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자신에게 중요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23절에서는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다’고 스스로 말합니다. 바울도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가를 말입니다.
바울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바울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23장에 보면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 40명을 중심으로 ‘바울 살해 결사대’가 조직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환난이 기다린다 하여도, 내가 사람들에게 붙잡혀 결박을 당하고 모욕을 당한다 하더라도 로마에 갈수만 있다면 예루살렘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았기 때문에 그까짓 것 환난이나 결박당하는 것쯤은 개의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이와 같은 담대함이 일어났습니까? 바로 “성령에 매여” 살았기 때문입니다.여기서 “매여”라는 말은 원어로는 “데데메노스”라는 말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묶여 있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한때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다 결박해서 묶어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다메섹을 향해 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오히려 자기가 성령께 묶였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계속 성령께 묶여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계속 주님을 사랑하며 살고자 하면 성령에 매임을 받아야 합니다.내 뜻대로 내 기분대로 내 감정대로 주님을 사랑하면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조금만 상황이 변해도 달라집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에 기복이 심하게 됩니다. 때로는 주의 사랑을 잃어버리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에 매여 사는 것은 내 생ê � , 내 경험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의 나타나심을 이야기합니다. 어디로 가야할 지,가는 도중 어떤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갑니다. 성령께서 다 잘 아시고 나를 위해 최선의 길로 이끄실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이 세상에서 전도만큼 귀한 일이 없습니다.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전도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 희생을 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 나를 위해 희생해준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간을 바치고 심지어 돈을 써가면서 나를 위해 수고한 사람이 있었기에 내가 오늘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우리를 먼저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빨리 가서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잃은 양들을 찾아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학려 들지 않으면서 이웃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지는 않습니까? 내 가족이 구원받기를 원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한강에 뛰어들겠다는 사람이 내 곁에 있으면 대화보다도 팔을 비틀어서라도 우선 살려놓고 봐야 합니다. 달리는 고속 기차에 뛰어들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설득할 겨를이 없습니다. 옆구리를 발로 걷어차서라도 살려놓고 봐야 합니다. 이것을 강권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엔 시간이 무시되어집니다. 장소가 무시되어집니다. 방법이 무시되어집니다. 대상이 무시되어집니다. 무조건 데려다 천국을 채우라는 겁니다. 이것이 강권하는 것입니다.
이제 동성의 가족들은 반드시 태신자를 품고 기도해 주십시오. 모든 성도는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힘을 모으십시오. 부지런히 이 일을 이루어 가십시오. 이 생명을 구원하는 일은 내힘으로 안 되니까 10/22일까지 벧엘전에서 성령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한 명이라도 전도를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예수를 믿는다면서 한명도 전도하지 못한, 사람 전도의 열매를 갖지 못한, 사람 이번 기회에 힘을 한번 다해 보십시요. 반드시 태신자로 세운 분들의 영적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가운데 가득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