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시작, 위대한 결과 마13:31-32. 2023. 9/17
지금은 지방의 명문 대학으로 수많은 인재를 키운 한동 대학이 경제적인 위기를 겪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학교의 재정 사정은 날로 악화되어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고 교직원들의 월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 때 한 교수님이 다소나마 학교에 도움을 주기 위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한 계좌 천원 운동”을 벌리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후원 운동을 한동대 ‘갈대 상자’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갈대 한 올은 약하지만 수많은 갈대가 모여 우리 시대의 나일강에 던져질 수많은 모세를 지킬 바구니를 만들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한동대 갈대 상자 운동이 탄생합니다.
여러분 아시지만, “모세가 태어날 무렵 애굽에서 태어난 히브리 남자아이는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모세의 운명도 폭풍속의 촛불 같았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이 아이를 더이상 숨길 수 없어 하나님 앞에 드리는 마음으로 갈대 상자를 만들어 강물에 띄워 보냅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께서는 죽어야 할 아기를 바로 공주의 손을 통해서 기적ì ��으로 살아났습니다. 이 한 알의 씨처럼 나일강에 던져진 모세를 실은 갈대 상자는 430년 동안 애굽의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 민족의 거룩한 열매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들을 가르켜서 비젼을 가진 사람, 꿈을 가진 사람들. 시대가 어두울수록, 시대가 고통스러울수록 이런 꿈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명의 제자를 부르셨을 때 예수님은 이들을 단순히 제자로 써먹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꿈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 그 시대를 바꾸었으면 좋겠다. 주님은 열 두명에게 인류 역사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걸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모아 놓고 제일 먼저 하신 이야기가 꿈 이야기를 하셨어요. 하나님 나라의 꿈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작은 겨자씨 하나를 심었습니다. 아주 작은 겨자씨 하나, 그런데 그 겨자씨는 자라납니다. 나물이 됩니다. 나물보다 더 커다란 나무가 드디어 됩니다. 가지를 펼치게 되고, 펼쳐진 가지, 가지를 가진 울창한 나무가 되었을 때 새들이 날아와 둥지를 짖고, 이 나무는 새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노래를 부르게 만드는 아름다운 겨지씨 한 알 속에 들어 있는 꿈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기대하고 싶었던 하나님 나라의 꿈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꿈입니까?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꿈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주께서 저와 여러분을 제자로 오늘 이 시대에 부르셨다면 여러분과 저에게 우리 주님은 어떤 꿈을 기대하고 계실까요? 우리가 어떻게 이 시대, 이 고통의 시대, 이 어둠의 시대에서 우리가 주님이 기대하시는 비전을 가진 사람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 위대한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는 한 생명을 주님께로 인도하려는 기간을 갖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겨자씨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Ⅰ, 작은 겨자씨이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작다는 이유 때문에 겨자씨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은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모래알도 작고 먼지도 작습니다. 그러나 그것들과 겨자씨가 다른 것이 있다면 생명이 있습니다. 모래나 먼지는 정성을 다해 땅속에 심고, 최선을 다해 물을 주고 가꾸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겨자씨는 다릅니다. 그 안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싹이 나고 자라납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겨자씨는 대단히 작습니다.
겨자씨의 직경은 약 1mm정도 됩니다. 눈이 나쁜 분들은 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작습니다. 그런데 작은 씨 한 알을 심었을 때, 나물보다 자라서 나무로 성장합니다. 보통 1.5미터까지 자라고, 어떤 종자는 높이가 3~4미터에 이를 만큼 자라나, 새들이 날아와서 그곳을 안식처로 삼을 만큼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겨자씨는 작지만 나중에는 창대케 됩니다. 겨자씨 안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엄청난 역사를 일으킵니다.
여러분, 그 12명 제자들의 이름을 가만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 중에는 사실 예수님의 제자가 될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신경질적이고, 교만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사람들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제자가 될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불러서 제자를 삼으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이 3년 동안 끊임없이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꿈을 심어 준 것입니다. 이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씨가 담겼기에 하나님 나라가 온 땅에 퍼졌던 것입니다.
이 아침, 묻습니다. 우리의 최대 자산. 우리 인생의 꿈. 우리의 소망. 우리의 능력. 우리의 모든 것. 그것은 예수가 모든 것이 되는 것을 믿습니다. 바로 그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한줌의 제자 밖에 안되는 11명의 제자를 향해 그가 남기신 교훈이 무엇입니까? "가서 모든 족속으로 네 제자를 삼으라. 세계 모든 곳을 바꾸어라"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마지막에 어떻게 말씀하세요?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생명의 약속을 붙잡고 나갈 때, 그 작은 생명의 씨앗 하나가 자라서 12명이 70명, 70명이 다시 120명, 120명의 초대교회가 3천명, 5천명으로 늘어나면서 유다와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결국 로마까지 복음화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이 생명의 복음은 지중해를 넘어서 유럽을 점령하고, 바다 건너 영국을 점령했습니다. 영국에서 다시 대서양을 건너 오늘날 미국 대륙을 점령하더니 이제는 태평양을 건너와서 우리나라에까지 복음이 전달되었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여러분에게까지 이 복음이 들어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전도는 생명을 살리는 역사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많아지면 그 교회는 성장하고 변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변화는 곧 일상의 파괴입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매일 습관적으로 반복하던 패턴을 깨는 것입니다. 처음엔 낯설었고, 설레었고, 자극이 되었던 것이 습관이 되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됩니다. 변화는 이 매너리즘을 깨는 것입니다. 변화는 성숙의 다른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변화되고 싶고 성숙하고 싶지만 모두 변화되고 성숙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변화하고 싶지만 변화로 인한 대가는 치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란 사실을 알고 나서 그녀 삶의 수치의 상징인 물동이를 버렸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깃배를 버렸습니다. 바나바는 전 재산을 바쳤습니다. 바울은 삶을 드렸습니다. 변화에 따르는 대가이며 순종입니다. 이 순종이 변화를 결정짓습니다. 그런 변화가 일어날 때 그의 마음에, 그리고 그가 살아가는 삶에 천국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겨자씨 비유를 통해 우리기 알 수 있는 것은
Ⅱ. 이 겨자씨 안에 위대한 가능성을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에 여러분이 품은 태신자를 보십시오. 분명 이 땅에 사는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이 태신자는 여러분의 피를 나눈 가족이고, 함께 삶을 나누는 분명한 관계를 가진 분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분명한 진단을 합니다. 엡2:1절에 보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지금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우리보고 죽었다니 이해가 됩니까?
문제는 이 죽음이 어떤 죽음이냐입니다. 이 죽음은 육신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죽음의 본질은 생명의 근원과 단절되는 것입니다. 나뭇가지가 줄기에서 잘려 땅에 떨어져 있으면 그 가지가 아무리 파릇 파릇해도 죽은 것입니다. 현상과 존재는 다릅니다. 현상은 파릇 파릇한 나뭇가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존재는 나무로부터 단절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모래 속에서 꽃이 필수 없는 것은 모래는 생명인 물을 머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물을 뿌려 주어도 이내 흘러 내려 버리거나 금방 말라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생명을 머금지 못하고 품지 못하는 모래밭은 언제 어디서나 황폐함과 죽음의 대명사일 뿐입니다. 만약 우리 역시 우리의 심령에 생명을 머금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의 호칭과 직책과 경력과 지위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그의 인생은 황폐함 이상일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품지 못하는 인간의 삶이란 황량한 사막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까닭입니다.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세계적인 미녀 스타였던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한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한 여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나는 평생 화려한 보석에 둘러싸여 살아왔어요. 하지만 내가 정말로 필요로 했던 건 그런 게 아니었어요. 누군가의 진실한 마음과 사랑 그것뿐이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7명의 남자를 거치며 8번의 결혼과 이혼을 하는 등 화려한 남성편력과 사생활로 유명세를 탔습니다. 재산도 6000억원을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우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많으면,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인기가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가지고도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고백합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 - 얼마나 갈증이 일어났으면 이런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그녀는 수많운 곳울 거머쥐었지만, 예수 생명을 머금지 못하고 품지 못하는 모래밭 같은 삶을 살았기에 그의 삶의 공허함을 채울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 역시 우리� ˜ 심령에 생명을 머금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의 호칭과 직책과 경력과 지위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그의 인생은 황폐함 이상일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품지 못하는 인간의 삶이란 황량한 사막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행하다고 외쳤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는 달리,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도 오히려 행복하게 살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울이었습니다. 로마의 옥중에서 쓴 편지인 빌립보서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 3:6-7).
사도 바울은 또 며칠 후면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그 절박한 순간에도 계속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그리고 죽음을 코앞에 두고 디모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들을 다 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치 미친 사람처럼 한평생을 그 예수를 위해 뛰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감옥에 갇혀 억울하게 죽게 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은 후에 받게 될 의의 면류관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살면서도 불행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는 달리, 사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도 행복해했고, 감옥 속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장차 받을 상급을 그리면서 기대에 찬 삶을 마감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바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의 심령에 하늘의 생수를 공급 받았기에 작은 겨자씨 같은 존재 속에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태신자가 우리의 진리이신 예수를 만나면 주님의 은혜 앞에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 겨자씨가 자라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Ⅲ. 우리의 성장이 이웃들에게 축복이 되리라는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32절에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생각해 보세요. 눈으로도 잘 안 보이는 겨자씨가 커서 새들의 안식처가 되고 길 가는 나그네의 쉼터가 되는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이 세운 태신자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들어가면 그 한사람의 영향력은 얼마나 위대한지 모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기도 카드를 드렸습니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고 구원의 자녀가 된다면, 그리고 이들이 성장해서 사60:22절 말씀처럼 ‘작은 자라도 천을 이루고 약한 자라도 강국을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이’ 된다면 얼마나 근사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가 이 일에 관심이 없거나 두려워합니까? 이는 영혼 구원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우리를 먼저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빨리 가서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잃은 양들을 찾아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학려 들지 않으면서 이웃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지는 않습니까? 내 가족이 구원받기를 원합니까?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위해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들이 구원받기를 기도하는 것은 보통 큰 희생이 아닙니다. 제가 몇 사람을 놓고 시간을 내어 기도를 해보니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바쁜 일과를 끝내고 피곤에 지쳐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시간인데, 몇 사람을 생각하면서 계속 엎드려 기도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만한 대가도 치르지 않고 어떻게 죽은 영혼이 살아나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는 인격적으로 멸시를 받릉 수도 있습니다. 돈을 써야 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돈을 쓸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바쁜 세상에 중요한 약속이나 스케줄을 뒤로 미루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만나 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의 형편을 이해해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조그마한 수고 하나 하나가 희생의 제물이 되어 활활 타오르며 향기를 토할 때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육신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비하여 영혼을 살리는 일은 얼마나 더 중요합니까? 전도는 영원히 사는 생명을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위하여 내가 희생하지 않고서 되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희생하신 주님의 사랑에 감동 받은 우리가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전도는 희생 없이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전도한 그 한사람이 선한 영향력을 가지고 믿음으로 산다면 얼마나 소망이 넘치겠습니까? 이 희망을 안고 우리 함께 나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기도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