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을 채우라 눅14:15-24. 2023. 10/8
요즘 우리 주변에 결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아름답지 않습니까? 한생을 함께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기쁨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청년들이 결혼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결혼식에는 하객들이 많이 와서 축하해주는 것이 신랑 신부입장에서는 최고의 기쁨이요 신랑 신부 집안에서는 당연히 바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전에 청첩장을 보냅니다. 날짜와 장소 식장을 알려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결혼식이 시작되어야 하는 시간이 다 되어가는 데 사람들이 오지 않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마음이 초조하겠습니까? 꼭 오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조차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축하 송을 불러주기로 한 사람들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결혼식에서 반주를 해주기로 한 사람도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심지어 주례지도 안 보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신랑 신부라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신랑 신부가 급히 핸드폰으로 전화를 합니다. 특송하기로 한 사람들에게 전화합니다. 반주하기로 한 자매에게 전화를 겁니다. 와서 모든 것을 준비해놓ê ��다는 사람한테도 전화합니다. 주례자한테도 전화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답변을 듣습니다. 한결같이 자기들이 사정이 있어서 참석을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이 말씀은 소위 하나님 나라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우리는 “잔치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미리 초청장을 보냈고 참석하겠다는 대답까지 얻어 놓았습니다. 이제 잔치 시간이 되어 종들을 그들에게 데리러 보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은 대답을 합니다. 자기들이 바쁘다는 것입니다. 오겠다고 약속을 했고, 주최 측에서도 오겠다는 사람들에 맞추어 모든 것을 준비했는데 이제 와서 못 오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당황스럽습니까?
Ⅰ. 왜 초대받은 사람들이 거절을 했는가? 17-20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여기 “다 일치하여 사양하여”라고 말씀했습니다. 주인이 초청했으나 다 거절을 합니다. 그 이유는 밭을 샀기 때문입니다. 또 소를 산 사람, 그리고 장가간 사람이 이유를 들어 거절을 합니다.
이 사람들을 우리 삶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밭은 우리의 일터입니다. 우리의 직장이요 물질세계입니다. 그래서 밭을 산 사람은 우리의 물질문제요 돈 문제를 다룹니다. 소는 우리의 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입니다. 직장일이요 회사일이요 학업이요 가정일입니다. 장가가는 일은 이제 가정을 꾸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남편이요 아내, 아들, 딸, 그들과의 관계,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셋은 우리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밭은 물질, 소는 일, 장가는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지는 궁금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를 때 우리는 그 순간 모든 일을 중단하고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부르면 베드로처럼 배와 그물을 버리고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까? 어렵게 합격한 공무원은 공무원 사표쓰고, 힘들게 들어간 회사를 다 그만두고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까? 우리가 교회 생활하면서 고민이 있습니다. “나는 교회 제긱인데 주님이 부르면 직장이든 가정이든 모든 일을 멈추고 교회에만 나와야 할까?” 이것이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실제 하는 질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정말 그것이 하나님 마음입니까? 정말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면 곤랂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속마음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에만 가둬 놓는 분이 아닙니다. 밭이든 소든 가정이든 다 팽개치고 교회에만 오라는 하나님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렘29:1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전5:19절의 공동번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라”.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원하십니다. 행복을 원하시는 분이 우리의 일, 우리의 생계, 우리의 현실에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모든 직업과 생계를 버리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우선순위는 필요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우선순위가 있습니까? 어느 교수가 학생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항아리 두 개와 큰 돌, 자갈, 모래를 올려 놓았습니다. 교수가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것들을 다 항아리에 담을 수 있지 생각해 봐라”. 학생은 생각하다가 항아리에 모래부터 부었습니다. 그랬더니 항아리가 모래로 가득 차서 더 이상 돌이나 자갈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교수 차례였습니다. 교수는 항아리에 먼저 큰 돌부터 넣었습니다. 그 다음에 자갈을 넣고, 그 다음에 모래를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모래가 빈틈으로 스며 들었습니다. 그날 교수가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우선순위였습니다. 무엇을 먼저 할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큰 것부터 넣어야 합니다. 큰 것부터 하면 작은 것은 자동적으로 따라 들어갑니다. 이렇게 초대에 이핑계 저 핑계를 대는 사람들에 대한 주인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Ⅱ. 강권하여 채우라 23-24
23-24절에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여기 ‘강권하다’는 원어가 “아낭카손”이고 영어성경에는 ‘twist arms'라고 번역했습니다. ‘팔을 비틀어서라도 데려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실천할 어리석은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랑과 기도로 끈질지게 권하여 거절하려는 그 마음을 꺾어 데려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누군가를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끈질지고 집요하게 접근하고 권해야 합니다. 그럴 때 상대방의 마음이 꺽이게 됩니다. 우리는 쉽게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여기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리는 이 말은 우리를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강제로 권하여 데려오라는 이 말씀에서 우리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딤전 2:4절에 ‘이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말씀을 항상 명심하여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에 힘써서 하나님의 집을 채워야 할 것입니다(딤후 4: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강권하여 교회를 채울 것을 원하시고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죽게 한 것도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여 천국잔치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한 영혼이 돌아오면 하늘에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왜 이렇게 내집을 채우라고 명령 하십니까?
Ⅲ. 반드시 전도에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의 문도 닫힐 때가 있습니다. 전도의 문이 지금처럼 언제까지나 열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늘 열려있던 노아의 방주 문도 때가 되자 닫혔습니다. 언제까지나 마냥 열린채로 있지 않았습니다. 노아의 방주의 문은 홍수 심판이 시작될 때 닫혔습니다. 그 문에 붙어 애걸복걸 매달린다고 열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닫힌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천국 문이 닫힐 날도 머지않아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안믿으면 구원의 문이 닫히면 지옥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긴박한 마음을 가지고 태신자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고후6:2절에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말은 우리 신앙생활에 골든타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세월호 참사 당시 구조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쳐서 많은 희생자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화재 현장에서도 화재 진압의 경우 초기 5분이 중요한데, 그 골든타임을 놓쳐서 많은 인명 피해를 입게 되지 않습니까?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내 집을 채우라는 주의 음성을 깊이 들어야 합니다. 이 말은 구원의 때가 있습니다.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우리나라의 최고의 핵 과학자요 과기처 장관을 지내고 명지대 총장으로도 계셨던 정근모 박사가 있습니다. 그에겐 아주 절친한 친구ê �€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복음을 증거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잖아요.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을 지냈던 김재익 박사입니다. 정근모 박사는 김재익 박사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쳤는데, 김재익 박사는 대통령을 수행하기 위해 동남아를 갔다가 그만 ‘아웅산 폭발사건’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후 정근모 장로님은 가장 절친했던 친구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회란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미뤄서 될 일이 아닙니다. 복음이 유일한 능력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결코 전도를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보는 이 성경책은 우리를 목놓아 부르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녹취한 책입니다. 우리를 포기할 수 없어서, 우리를 끝까지 그의 품에 안으시려는 하나님의 추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호세아라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가와서 호세아를 버리고 창녀가 된 아내를 데려와 살라는 것입니다. 3:1절 하반절을 보면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고멜은 ‘아내’라는 자리를 버리고 다른 남자를 좇아 떠나간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여인 고멜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비록 그녀가 배신했을지라도, 비록 그녀가 잘못 했을지라도, 비록 그녀가 가출하여 허랑 방탕하여 살았다 할지라도, 또 다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 상상이나 가는 일입니까? 오늘날 한번만 외도를 해도 이혼의 사유가 되어 이혼을 하겠거든, 몇 번씩이나 외간 남자의 아이를 가진 그 여자를 데리고 와 같이 살라니요? 하나님이 도대체 어떻게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소설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 성경에 기록된 호세아 선지자의 얘기입니다. 호세아서를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은 왜 이 잔혹한 일을 선지자 호세아에게 시켰습니까? 우리를 포기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 여러분, 오는 10월 22일 새생명축제인 총동원전도주일을 앞두고 이 말씀을 잘 듣고 묵상하고 깨달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종들이 됩시다. 우리 모두 기도하고 열심히 준비하여 많은 사람들과 함께 천국잔치를 즐깁시다.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참석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큰 기쁨을 같이 나눕시다. 할렐루야!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교회를 채우는 일에 무관심하고 열심히 없었다면 회개합시다. 하나님이 한 영혼이라도 구원받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에 불순종하면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교회를 채우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상급이 주어지고 교회로 인도함을 받은 자들은 놀라운 구원과 영생을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 사람들을 강권하여 교회를 채웁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