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세상을 향하여 도전하라 수1:1-9. 2023. 10/15. 주일 설교
이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되려는 시점인 1945년 4월 12일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미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탁월한 지도력으로 이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던 장본인이기에 미국과 서방세계는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크게 놀란 사람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루즈벨트 뒤를 이어야 할 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이었습니다. 그는 시골이라 할 수 있는 미주리주 출신으로 경력도 일천하고 아직 능력도 검증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루즈벨트가 누구입니까? 그는 경제 대공황을 이겨냈고, 역사상 처음으로 세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됐고 당시 이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이런 신화 같은 존재였던 루즈벨트를 대신해서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했던 트루먼은 두려워 떨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취임 직후 기자들이 취임 소감과 국민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그 때 트루먼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통령이 서거한 순간 하늘의 달과 별, 모든 행성이 나를 향해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일생에 한번이라도 기도해 본 일이 있다면, 지금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얼마나 두려움이 왔으면 이런 고백을 했겠습니까?
우리는 이 시간 두려움 가운데 새로운 출발점에 서있던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여호수아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40년의 긴 광야 생활을 마감하는 감회가 어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 눈앞에 펼쳐진 현장까지 와 있습니다. 여기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이제 그들 앞에 펼쳐진 약속의 땅, 얼마나 마음이 설레겠습니까? 이제 요단강만 건너면 그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큰 슬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40년 동안 인도했던 모세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은 가져다 준 사람입니다.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을 때, 모세가 나타나서 ‘여기서 나가자.’고,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가자.’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생활 도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좌절하고 불신에 빠져 고통을 겪을 때마다 모세는 그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었습니다.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고 가나안 땅 바로 앞에까지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그런 모세가 세상을 죽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를 이어 여호수아가 새로운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백성들의 마음 한구석에 과연 이 여호수아가 자기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던 것 사실입니다. 항상 모세라고 하는 위대한 지도자의 조수에 불과하던 여호수아가 과연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여호수아 자신도 백성들도 의문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사건이 오늘 본문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여호수아가 세상을 향해 거룩한 도전을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리더십을 가졌던 것입니다. 도대체 어느누구도 그가 이런 지도력을 발휘할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모세의 뒤를 이어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던 그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었겠습니까? 여호수아가 이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Ⅰ.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민감한 반응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강하고 담대하라.” 그리고 7절에서도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라.”고 말씀하고 있고, 9절에서도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지금 여호수아가 어떤 상태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연속해서 세 번씩이나 ‘강하고 담대하라.’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한마디로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이 변화의 장에서 그가 얼마나 두려움이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요즘 대한민국이 매우 어렵습니다. 과거에 비해서는 상상도 못할 경제 도약과 삶의 질이 풍부해 져 있지만, 작금에 코로나로 인해 가뜩 어려워진 경기는 더 위축이 되고 경기침체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우리 안에 일어나는 현저한 현상은 미래를 향한 두려움과 염려입니다. 염려는 무익할 뿐 아니라, 아주 해롭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전사자가 35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엄청나죠. 그런데 자식이나 남편을 보내놓고 두려움과 염려로 심장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 무려 100만 명입니다. 두려움이 무서운가요? 전쟁이 무서운가요? 두려움이 전쟁보다 보다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한 심리학자는 두려움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두려움은 우리 인간을 서서히 죽이는 느린 형태의 자살 행위이다.” 염려와 두려움은 이와같이 몸과 마음을 망가뜨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까지 망가뜨립니다.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맡겨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정복’과????정착‘ 두 가지입니다. 먼저 가나안 땅을 모두 정복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온전하게 정착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 5절에 보면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9절에서도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약속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내가 모세와 함께 하던 것처럼 너와도 함께 할 것이다.’는 말씀 앞에 그는 다시 일어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있는 믿음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씀에 대한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박하게 받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는 하늘과 땅처럼 달라집니다. 묻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견디기 힘든 고난일까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의 연약함일까요? 주변에 우리를 도울 누군가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정말 큰 문제는 우리에게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문제들, 나를 절망하게 만드는 상황들, 죽고 싶을 만큼 나를 궁지로 몰고 가는 일들 주님께 기도하고 맡기면 주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고후 13:5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확신이 있는지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두려움이 우리에게 엄습할 때, 이 두려움을 이길 힘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의 언약과 약속을 다시 붙들 수 있다면, 어떤 위기 속에서도, 우리의 모습이 때로는 실패와 배신으로 누더기처럼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자비와 긍휼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붙드신다는 약속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약속이 내 것이 되도록 외치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약속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삶을 가장 복되게 세워 가신다는 약속을 붙들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최대의 위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내것으로 삼으려는 절박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번 터치 153 새생명 축제가 나에게 절박함으로 와 닿으면 지금 여러분의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 여호수아는
Ⅱ. 말씀을 의지하고 일어설뿐 아니라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13절입니다. “여호아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아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그랬더니 그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16절입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그들은 과거에 모세에게 순종했던 것 같이 지금 여호수아에게 순종하겠다고 약속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1:18,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 그러나 역사를 보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당시 토착민이던 7족속을 다 쫒아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남겨둔 가나안 족속이 있습니다.
이 순종치 않은 일은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범람하는 요단을 건너는 것도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자금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은 한때 조상들이 살았던 땅이지만, 자금은 그 가나안 땅에 이미 정착한 사람들이 무려 7족속이나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7년 반이나 가나안 땅에 있는 사람들을 쫒아냅니다. 그러데 수11:2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아낙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았더라’
여기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은 불레셋의 5개 중요 성읍 가운데 해안가와 북쪽에 자리잡은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매우 거칠고 잔인한 사람들이 거주한 지역인데 이스라엘은 이곳을 정복하지 못한 채 남겨두게 됩니다. 이 순종하지 않고 남겨둔 땅에 거주민이 누군지 아십니까? 팔레스타인 이말은 불레셋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지금 가자 지역을 통치하는 하마스와 북쪽 레바논 근처에 살고 있는 ( ) 그들을 남겨준 이것이 화근이 된 것입니다. 중동지방에 이스라엘과 가자 지구를 통치하는 하마스와의 전쟁은 하루 아침에 일어난 싸움이 아닙니다. 이 피의 분쟁 역사는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불레셋을 보세요. 구약의 사사인 삼손을 죽음으로 내몬 델릴라는 가자에 살던 블레셋 사람입니다. 그리고 초대 왕인 사울왕은 블레셋과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무릎 꿇린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역사는 지금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이스라엘의 골치덩이로 다가 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순종’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순종’을 혐오스러운 것, 고루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합니다. 지성인이라면 딴지를 걸고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매력적으로 생각합니다. 요즘은 교회에서도 ‘순종’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순종은 매력적인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진정한 용기는 겉으로 드러나 사람들에게 보여진 모습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드러내놓고, 그 말씀에 자신을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용기입니다. 잠언4: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서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그렇습니다. 성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덕목입니다. 그만큼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용기를 갖고 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을 향하여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Ⅲ. 믿음은 후진이 아니라 전진이기 때문입니다. 8-9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 인생의 나침판입니다. 나침판을 자세히 보면 항상 바늘 끝이 떨고 있습니다.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자석은 자기에게 지어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바늘이 떨리고 있다면 이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바늘 끝이 어느 한 쪽에 고정될 때 그 나침반은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떨어야 합니다. 나침판의 바늘 끝이 항상 북쪽을 향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적인 것들로 인해 영혼이 무디어지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떨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즉 죽도록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분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또 있습니까? 사랑에 눈이 먼 연인들에게는 둘이 함께 지낼 수만 있다면 살집이 좀 작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괞찮습니다. 고생을 해도, 욕을 먹어도 견딜 수기 있습니다. 그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같은 원리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세상에 이것만큼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 행복이 마음속에 담겨 있어야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은 다시 이렇게 표현 될 수 있습니다. “종이 되어 나를 섬기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을 하신 주님은 우리의 생각과 계획보다 더 멋진 것을 갖고 계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이 일에 자신을 포기하는, 종으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믿음의 삶에는 후진이 없습니다. 전진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번주간 ‘그 땅을 들어가 밟으라’는 주제로 특별 새벽 기도회를 가지려고 합니다. 누가 말했는지 '특새'라고 말을 생각해 보면 은혜가 됩니다. 새벽에 나오는 성도는 '특새'를 통해 특별한 비상(飛上)을 꿈꾸는 특별한 새입니다. 이른 새벽 찬바람을 가르며 거룩한 성전의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되어 아름다운 영혼의 색깔로 성전을 그려갑니다. 지나간 밤의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비상의 날갯짓을 하면서 성전 문을 두드리며 지나간 밤 아픔의 상처를 채 싸매기도 전에 또 다시 나를 일으켜 하늘 길을 달려 그분께 달려옵니다.
요즈음 온통 신음소리입니다. 어느 누구라 할 것 없이, 어떤 특정의 사람들이라 말할 것도 없이 사회 전체가 겨우겨우 하루를 버티는 질곡의 시간들로 채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그 질곡의 순간에도 "이런 고생쯤이야"라며 단단히 마음먹고 주 앞에 바짝 다가가서 기도의 힘을 쏟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도자의 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 마음의 스크린에 영상으로 담아두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대속의 고통을 당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고, 사랑으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