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행복한 인생입니까? 신33:26-29 2023. 10/22
오늘 참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습니다. 소풍 오는 자리도 아니도 특히 교회 처음으로 오는 분들은 많은 걸등을 가지고 오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동성교회는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감사드립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휘몰아쳤던 코로나 광풍은 인류역사상 가장 크고 심각한 피해를 남기고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3년이라는 기간동안 현재까지 집계된 감염자가 무려 7억 명에 육박합니다. 그리고 사망자도 거의 7백만 명에 이릅니다. 단일 바이러스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감염되고 또 죽었다는 것이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 일일까요?
게다가 3년 동안 현대문명 자체를 멈춰 세웠습니다. 경제적인 피해는 집계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기업들이 파산했고, 실업률이 급증했고, 경제성장률은 일제히 마이너스를 기록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로 갖가지 문제가 생겨났고, 개인적으로는 스트레스와 불안 , 우울증 등 정신 건강에도 큰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최첨단 현대의학이 이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 보기 좋게 두 손을 들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초기에 이 바이러스에 대해 알지 못해 허둥댔습니다. 그리고 치료법이 없어 사망자가 급증하고 있는데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백신을 개발하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려서 전 세계로 확산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코로나사태는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바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자랑하고 큰소리치던 최첨단 현대과학과 현대의학이 작은 바이러스 하나의 등장에 이렇게 허둥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동안 우리 인간이 대단한 존재인 줄 착각하고 살아왔는데 이번 이 코로나사태로 우리 인간이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 연약한 인생을 향하여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도대체 어떤 자들이었기에 행복자란 이야기를 듣습니까?
Ⅰ.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9절 가운데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도대체 너희들은 아무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의 선민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 엄청난 일 앞에 모세가 외친 것입니다. 지금 모세는 그토록 가고 싶은 가나안이 자신의 눈앞에 들어옵니다. 애굽에서 나와 천신만고 끝에 40여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이제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이 보이는 모압 평지에서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이 있습니다. 지난날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지금 만감이 교차되는 현장에서 모세가 백성에게 이야기한 단 한마디는 당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광야 40년의 삶은 끊임없는 불순종의 삶입니다. 광야를 거치는 동안 항상 감사하기 보다 불평과 원망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들이 마침내 그토록 기다리던 가나안 땅을 먼 시야지만 보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아무 자격도 조건도 없는데 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는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저들의 행위와 노력을 보지 않고 그들을 언약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이 가나안 길목에까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격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너는 행복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 같이 구원 얻은 자가 누구냐’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 구원은 나는 아무 공로없고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일방적으로 택하여 자녀 삼으신 신학적 용어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의 자녀 삼으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자녀삼기 원하십니다. 요 3:16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하신 아들 예수를 나대신 십자게에 달려 죽게 하셨고, 그 대가로 우리는 이 예수를 믿어서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죽기까지 하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갈2:20)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그 사랑이기 때문에 이 사랑을 끊을 자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했던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었습니까? 자살률이 최근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최근 3 년간 자살자가 4만 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특히 20대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고, 자살 시도자도 지난해 자살을 시도해 응급실에 실려간 수는 3만 6,754명으로, 심각한 수준입니다. 그리고 고독사 문제가 심각합니다. 4000여명이 아무런 돌봄이 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3시간에 한 명씩 아무에게도 관심받지 못한 채 외롭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갈수록 풍요로워지고 살기 좋은 사회가 되는데, 풍요와 문명의 이면에는 고독의 그늘이 더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인터넷 게임에 중독돼 생후 3개월 된 친딸을 굶겨 죽인 비정한 부모를 바라보는 찹찹한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불과 얼마 전의 일입니다. 우리는 보지 않습니까? 자기 쾌락을 위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면서 조금도 안타까워하지 않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짐승 같은 사람들이 자고 깨면 우리 앞에 벌어지는 곳이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입니다. 성적 쾌락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가진 지위로 잘못된 욕정을 채우는 이 세상입니다. 인기 연예인들이 마약에 손대지 않으면 하루도 불안을 극복할 수 없는 이 세상입니다. 이 땅을 바라볼 때 희망을 둘만한 곳이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전 우주에 유일한 신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가장 권세 있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요,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찬송해야 될 영광의 주님, 승리자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사건이 바로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도 무덤덤해요. 별로 감동도 받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죄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롬3:23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6:23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 인간을 보시고 구원받아야 될 존재로 선언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말씀에 의하면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거침없이 이 사실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죄의 값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이 심판을 면하려면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으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죄를 들추어내지만 그 목적은 우리를 살리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이 오신 것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1: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런 구절이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죄 문제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고민해본 사람입니다.
암에 걸린 분들은 평소에 암을 치료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암이 낫는다는 말만 들으면 눈이 번쩍 뜨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성경이 죄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문제를 처리하기 원할 것입니다. 행16:31절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말씀을 하십니다. 모세가 외친 여러분은 행복자란 말은
Ⅱ. 구원 이후에도 내 인생을 끝까지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29절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방패나 칼은 다 전쟁에 쓰이는 방어용과 공격용 도구입니다. 전쟁에서 이것이 없으면 백전백패입니다. 미국이 왜 무서운 줄 아십니까? 핵항공모함이 뜨면 왠만한 나라는 그대로 무너집니다.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변변한 무기도 전략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광야 생활 속에서 그들은 전쟁에서 고도화된 이방 군대를 초토화시켜습니다. 그 이유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히13:5의 말씀에 보면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여기 과연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never’입니다. '결코'라는 말입니다. 한번 택한 나를 언제나 보호하시고 도우시겠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내가 나를 보아도 늘 죄의 더미 속에 빠지고 일어서면 또 넘어지고 하는 연약한 인생인데 어디가 이뻐서 한번 택한 나를 결코 버리지도 포기하지도 놓치지도 않으시겠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구원받은 백성들의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오늘 초대받은 여러분, 여러분,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여기 올 때 우연하게 온 것이 아닙니다. 요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우물에 온 것이 아닙니다. 물을 길러 우물에 왔다가 예수님을 만났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만남을 통해 새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사건은 우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이 우물을 찾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가지 않는 사마리아인의 마을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물을 길러 나올 그 시간에 맞춰서 우물을 찾으셨습니다. 이 여인을 구원하시고, 이 여인에게 새로운 인생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일부러 그 우물을 찾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실 때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니고 의도된 필연이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우연 같은 일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일들이 우리 입장에서 보면 우연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우연이 아니고 필연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고 2때 우연히 친구 따라 교회를 가게 됐습니다. 당시 교회에서 문학의 밤을 하는데 보러가자고 해서 그냥 따라 나섰습니다. 그날 고등부 선생님을 만나게 됐고, 그분이 저를 따뜻하게 대해주셨고, 주일예배에 참여하도록 권하셔서 제 교회생활이 시작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많은 사람들이 저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선생님이 제가 오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도하고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제게는 우연처럼 찾아온 그 날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준비해 놓으신 날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역사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보면 우연 같은 일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우연 같다고 말하는 것은 그 뒤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과 역사하심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연처럼 보이는 일들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필연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놀라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어떤 인생의 짐도 심지어 내가 내 힘으로 벗어 던질 수 없는 죄 짐도 그분은 당신이 나 대신 짊어지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을 우리가 믿기만 하면 이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 우리의 미래를 주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모든 염려, 근심, 걱정을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염려, 근심, 걱정을 다 하나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와 우주만물을 위해 일하십니다. 우리를 보존해 주시고, 선하신 뜻대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이 은혜가 오늘 초대 받은 여러분 위에 항상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