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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새로운 변화를 위하여-종교개혁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3-10-30 | 조회: 197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은 전 세계 모든 개신교회가 지키는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 506년 전에 일어났던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하는 뜻깊은 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종교개혁이란 용어는 몰라도 작년에 용산 이태원 참사는 기억을 하실 것입니다. ‘할로윈 데이를 즐기기 위해 이태원에 수많은 인파들이 가파르고 비좁은 골목에서 압사 사고로 159명이 사망을 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정의 희망의 상징인 자녀들이 이 잘못된 축제에 갔다가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이 죽음 앞에 자녀들을 잃은 부모들의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일년이 지났지만, 그 당시의 가족을 잃은 분들은 아마 마음에 평생 무거운 상처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할로인 데이의 기원은 천주교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순교하였거나 생존 시에 출중한 덕행으로 명성이 높았던 신자가 사망한 다음, 엄ê ��한 조사를 거쳐 우선 지역적으로 공경할 수 있도록 복자’(福者)로 선포합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복자들에게 열심히 기도하여 기적의 은혜를 입은 경우, 엄밀히 조사한 뒤 교황이 행하는 시성식(諡聖式)을 통해 성인으로 추대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만 103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성인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4세기부터 11 1일을 만성절 즉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축일로 지켜왔습니다. 여기에 편승되어 영국의 켈트족들은 사람이 죽으면 1년 동안 하늘을 떠돌아다닌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성절이 되면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나와서 누군가의 몸에 들어갈까 돌아다닌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1년 동안 들어가 있을 집(사람)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영혼들이 자기에게 오지 못하도록 무서운 귀신으로 분장하고, 귀신처럼 입는 날이 바로 할로윈 데이입니다. 한 마디로 귀신 놀음하는 날입니다. 이 사실을 모른채 현대인들이 귀신의 탈을 쓰고 광란의 축제에 빠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하는 것을 무시하고 성인숭배로 일반 세상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축제가 된 것입니다.

 

루터가 살던 시대는 영적으로 깊은 타락에 빠져 있던 때입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1517 10 31일 만성절을 기점으로 삼은 것은 이런 미신적인 행습에 대한 반기의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거짓된 교리로 백성들을 현혹하거나 착취하는 로마 교황청에 개혁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은 젊은 사제인 루터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루터는 1517 10 31일 비텐베르그 대학 성당 문에 로마 교황청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는 95개 반박문을 내걸게 됩니다.

 

그럼에도 로마 교황청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젊은 사제 하나가 한 말이 가져올 엄청난 개혁의 물줄기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은 견고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변화하지 않고 이대로 가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변화를 꺼려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변화하지 않으면 새로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변화 없이는 새로운 내일이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변화를 두려워하지만, 그럼에도 변화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갔던 요시아왕의 종교개혁을 단행한 이야기입니다. 요시야가 8살 때 왕이 되었습니다. 그 때는 이미 전국적으로 우상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온 땅이 우상과 타락 속에 빠져 있을 때 무슨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단행하게 된 출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요시야 왕은 통치 18, 요시아 왕이 26세 되었을 때 성전 수리를 지시하였고, 그 과정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종교개혁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당시 성전을 수리하던 중에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 안에서 율법책을 발견합니다. 그동안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므낫세와 아몬이 통치하던 시기를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말씀을 잃어버렸고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도 없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일에만 열중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요시아 왕은 그 옷을 찢고 회개했습니다. 왕의 권위나 자존심을 벗어던지고 말씀 앞에 엎드리는 모습입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상대방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회개하고, 그가 먼저 옷을 찢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 ‘오직 말씀으로 개혁을 단행합니다. 24절 상

24절 상반절입니다. 요시야가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보면 드라빔을 없앴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드라빔은 가정수호신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나올 때, 그의 아내인 라헬이 자기 아버지가 아끼던 드라빔을 훔쳐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이것을 모시면 가정의 축복을 준다는 기복 신앙입니다. 그동안 므낫세와 아몬이 통치하던 시기를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말씀을 잃어버렸고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도 없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일에만 열중했습니다.

 

요시야 왕이, 옷을 찢으며 남 유다가 지은 죄에 대해서 분개하며 신앙의 개혁을 더욱 단행하게 되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기 전에는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 가운데 있는지를 몰랐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보니까 명확하게 자신들의 삶의 거짓과 죄악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개혁의 근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왕하23: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 우리가 그동안 말씀을 떠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살던 1500년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시대였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 천주교의 잘못된 성경관입니다. 천주교는 성경뿐 아니라 전통도 동등한 경건한 사랑과 존경으로 받아들이고 경외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 이후에도 천주교회는 성경과 전통을 둘 다 동등하게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는 길을 고수하게 되었고 지금도 이 입장은 변함이 없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오늘까지 천주교와 우리 기독교의 입장은 성경 우선’(prima scriptura)이냐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냐의 차이로 나뉘어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까?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까?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바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려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바로 구원관 때문이었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심된 관심사입니다. 사실 루터는 천주교의 잘못된 구원관 때문에 오랜 세월 큰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루터도 구원의 공적을 쌓기 위해서 수도원에서 수련도 했고, 고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지인 로마도 방문하고, 면죄부도 사봤습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자신은 구원받을 만큼 의로운 자가 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사람이 성취할 수 없는 구원의 엄격한 기준을 제시한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워하며 증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루터가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증오하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달았을 때입니다. 마틴 루터는 로마서1: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 앞에 섰을 때 천주교의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우리의 구원이 나의 공로나 어떤 전통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일어섭니다.

 

.반드시 값비싼 희생의 댓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4절 하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여기 이루려 함이라는 말은 애를 쓴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그렇게 애를 씁니까? 말씀이 사라진 영적 암흑의 시기에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 앞에서 서 잘못된 것은 고치고 새롭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굳어진 습관을 변화시키는 것은 너무도 힘이 듭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곧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었지만, 그의 종교개혁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로마 천주교회의 면죄부 판매가 회개가 없는 용서와 거짓된 평안을 주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로마 교황은 루터를 사제직을 파면하고 맙니다. 여러분, 종교개혁에 나선 루터는 너무나도 고달픈 삶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로마 천주교의 교리가 성경과 다르다는 것을 알더라도, 그대로 로마 천주교의 주장을 따랐다면 그는 평생 평탄한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당대 엄청난 힘을 가진 천주교회의 신부였고,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였습니다. 학생들에게 인기를 얻고, 평안하게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루터는 신앙을 위해서, 그리고 바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평안한 길을 거부하고 불편한 길을 택했습니다. 불편함을 넘어 생명에 위협을 받는 험난한 길이었기만 루터는 끝까지 그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른 신앙으로 사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신앙생활하는 것 때문에 불편을 겪어 보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태복음7:13-14)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왜 크고 넓은 길이 아닌 좁고 협착한 길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그게 우리 신앙인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사람들이 가야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과 결코 놓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말은 내 말이 아닙니다. 이오니카 선교사로 떠났다가 꽃한번 피지 못한채 순교한 짐, 엘리어트의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에 인생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명예도, 부도, 명성도, 성공도, 다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설령 내가 그것을 누렸다 할찌라도 바닷물을 들이키듯 갈증만 더 날 뿐입니다. 그러나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 인생을 붙잡고 계신 주님입니다. 그 진리를 향한 희생이 있었기에 온 땅에 복음의 향기가 진동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말씀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 그의 전 생애를 말씀에 붙잡혀 살았습니다. 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요시아왕의 아름다움은 말씀 앞에 서서 살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여기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율법을 따라 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변화에 대한 갈망 아니겠습니까? 이 절박함이 개혁을 이룰 수있었고 다시한번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위기를 기회로 극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 3년 가까이 코로나 시대를 지내면서 한국 교회는 너무도 큰 어려움을 겪어왔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예배와 공동체 그리고 사역이 기초가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로인해 많은 부분에서 교회다움을 잃어버렸고, 교회가 많이 변질되었습니다. 마치 강력한 태풍이 지나간 뒤 곳곳에 갖가지 피해가 나타난 것과 같습니다. 이제 코로나 이후에 교회가 교회답게 다시 개혁되어야 하는 정말 절심함이 묻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종교개혁 506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모두 함께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도록 우리의 마음과 자세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진실된 회개와 순종이 따를 때 나로부터 종교개혁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 한 사람부터입니다. 다른 사람 핑계될 것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변명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한 사람의 결단을 요구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후회없는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실수투성이인 우리 인간이 후회없는 삶을 사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후회없는 삶을 사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후회에 머물지 않고 회개하며 사는 것입니다. 회개는 우리의 삶을 후회 이전으로 리셋(reset)해 줍니다. 그 어떤 죄와 허물, 실수와 과오라 하더라도 깨끗하게 씻겨주어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회개를 통해서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이 시대를 다시 한번 하나님의 나라로 충만하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거룩성과 보편성을 회복하여 교회가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바르게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가 이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기대이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도하십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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