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마무리 - 직무 ① – 딤후 4:1-5 딤후 4장을 중심으로 2023. 21/3
벌써 한해의 마지막 12월의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생각해 보면 한 것보다 못한 것이 더 많은 것 같아서 후회 아닌 후회를 하기도 합니다. 유명한 거장 화가인 미켈란젤로가 씨스틴 채플의 그 천장 벽화 프레스코를 거의 완성할 때의 일이었습니 다. 작품은 이제 끝난 것으로 보여 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천장 을 향해서 마지막 그 finish 터치를 위한 손질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도왔던 조수들 가운데 한 사람 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이젠 끝나지 않으셨습니까?" "자네 눈에는 끝난 것으로 보이는가? 내 눈에는 아직 끝나지 않았네, 내 눈에는 아직 끝나지 않았네" 그리고 몇 달을 더 그는 계속해서 이 작품에 매달렸습니다. 마침내 작업은 완전히 마쳐진 것으로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작업 도구를 치우지 않고 계속 천장을 응시하면서 그 장소를 맴돌았습니다. 다시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이제는 정말 다 끝나지 않았습니까? 그때 미켈란젤로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남겼습니다. "내 눈에는 끝났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어떨지 모르지" 주님 보시기에는 어떨지 모르지"
우리 역시 언젠가 모두 우리의 일생을 결산하는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라도 우리는 지나온 시절을 종종 되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한해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다짐을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무리입니다. 마무리를 잘해야 합니다. 이 마지막 후회 없는 결산을 위한 일종의 중간 결산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 그런데 인생을 마무리 할 때 중요한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관점에서 내 인생을 평가해야 하느냐인 것입니다. 누구의 관점에서 인생을 평가해야 할 것이냐는 물음입니다.
저는 이 한달 동안 딤후 4장을 가지고 바울이 예수를 만나서 은혜 앞에 살아왔던 삶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점검을 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함께 하는 디모데 후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서 최후를 맞을 준비를 하면서 디모데에게 준 유언서와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디모데 후서를 '원로의 유언장'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신앙의 대선배요 스승이요 원로인 바울이 믿음의 후배요 제자요 젊은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준 마지막 고별사와 같다는 뜻이지요.
특히 오늘 봉독한 말씀은 디모데 후서 중에서도 가장 개인적인 색채가 짙은 한 원로의 최후 유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전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하면서 바울은 자신의 순교가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여기 “전제”라는 말은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태웁니다. 그때 그 제물이 다 타서 재가 되지 않습니까? 바로 그 때에 남아 있는 제물에 포도주를 다 쏫아붓는 제사를 말합니다. 이 말씀을 하는 바울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약 삼십여 년 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에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그의 직무를 다하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아낌없이 불태웠습니다. 마지막 남아있는 피한방울까지도 제단에 뿌려짐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완결되는 것처럼,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생명까지도 주를 위해 마무리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Ⅰ. 직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5절에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여기 ‘직무를 다하라’고 말씀을 합니다. 이 직무에 해당되는 헬라어 ‘디아코니안’은 ‘여러 가지 봉사’를 말합니다. 이 말은 교회 안에 다양한 은사를 가진 자들이 모여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너무너무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삶 속에서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젠지 아십니까? 내가 주님을부터 쓰임받고 있다는 것, 내가 쓰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가 갈망해야 할것이 있다면 바로 내게 맡겨진 이 직무를 잘감당해야 합니다. 이는 내 힘으로는 안됩니다. 롬12:11절을 보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여기 “열심을 품고”란 말은 헬라어로 “프뉴마제오”인데, 이 말은 “성령”이라는 뜻의 “프뉴마”와 “물이 끓듯 열정적이다”는 뜻의 “제오”가 합쳐진 말로 “성령의 뜨거운 열정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영어 성경에도 "agloy with the spirit" 성령으로 불타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열심”이란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도, 기도생활도, 교회봉사도, 성령의 뜨거운 임재를 경험하고 체험하고, 열정적으로 충성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약한 존재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자녀라 할찌라도 계속 성령의 간섭을 받지 않으면 세상의 정욕과 마귀의 권세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불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요즘 쓰는 단어인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란 단어를 이해하시면 됩니다. 자! 여기 등이 있습니다. 기름이 있으면 빛이 잘 퍼지고 드러납니다. 그러나 기름이 마르면 빛은 약해지고 이내 냄새만 나다가 꺼지고 맙니다. 신앙생활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말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늘 성령의 기름을 채워야 윤기 나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네 직무를 다하라’는 말씀 앞에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이솝의 우화 중에 사냥 잘하는 들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들개는 너무나 빨라서 어떤 짐승들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토끼를 쫓다가 놓치고 말았습니다.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다른 짐승들이 놀려댑니다. “야 발 빠르다더니 별거 아니구나. 이제 그 실력도 녹슬었구나. 앞으로 어디 제대로 먹고 살겠니” 이 때 들개가 이렇게 해명을 했습니다. “그 놈의 토끼는 목숨을 위해 뛰었고, 나는 저녁식사나 하려고 뛰어서 그래” 그렇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당해내기가 힘이 듭니다. 어떤 일을 맡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그들이 일을 냅니다. 반면에 능력이 있고.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어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일을 낼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금년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셨습니까? 우리의 여건을 탓하기 보다는 우리가 최선을 다했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의 상황에서 핑계거리를 찾기보다는 최선을 다했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어떤 일을 맡았든지, 또한 어떤 상황 속에 놓여있든지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 우리는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 내게 맡기신 이 직무를 잘 감당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Ⅱ. 모든 일에 신중하라 5
계속해서 5절에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여기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자! 여기
신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경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신중하게 살라는 말입니까? 그 이유는 때가 악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3-4절에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둠이 뒤덮인 세상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둘러보면 어둠의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밤을 밝히는 휘황찬란한 불빛들 저 이면에서 죄악들이 얼마나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한국교회는 세상 앞에 거센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사탄이 마치 제철을 만난 듯이 이리저리 교회를 흔들고, 이단들이 극성을 부리며 사회도 시도 때도 없이 여기저기서 흔들어대고 있기 때문에 멀미가 날 지경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숨이 막히지 않습니까? 이곳 저곳에서 우상들이 판을 치고 있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는 영적 어두움이 우리를 덮으려하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한순간 잘못 선택하면 천길만길 낭떠러지에 떨어집니다. 이럴 때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바로 신중해야 합니다. 이 신중을 ‘근신’이라고도 옛날 성경을 말씀합니다. 벧전 4:7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신중)하여 기도하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는 지금도 굶주림에 시달린 사자가 먹잇감을 찾아 울부짖으며 헤매듯이 우리를 집어삼키기 위해서 달려들고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달려든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죄의 유혹 앞으로 끌고가서 그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긴장의 끈을 놓치면 안됩니다. 여기에 대해 베드로는 외칩니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만큼은 가장 솔직하고 거짓이 없어집니다. 기도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정확히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단둘이 만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며 년 초에 계획했던 많은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한번 확인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합니다.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도 열심히 뛰어 다녔는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수고와 땀을 흘렸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고 참회하는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산다고 했지만 과연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했는지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신중이란 단어는 우리가 잘 아는 잠 29:18의 말씀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에 ‘방자히 행한다’는 이 말속에는 신중하지 못하면 방자해진다는 말입니다. 이 신중함을 잃게 되면 우리는 경거망동합니다. 이 비전은 신중함에서 나옵니다. 이 신중함이 없으면 사람은 경고 망동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비전이란, 꿈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비전을 가진 사람의 시선은 오늘을 뛰어넘어 언제나 먼 곳을 향해 있습니다. 먼 곳에 시선이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거기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신중함이 없는 인간은 방자해집니다. 꿈이 없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자기를 벗어나지 못한 채 항상 목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대로, 감정대로 욕구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신중함이 없으면 목회자이든, 교인이든, 어떤 인간이든 방자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꿈을 가졌다, 가지지 않았다 하는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결과는 이처럼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할 때 신중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성급하게 판단하고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려다가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좋은 결정을 내린다면 그 후에 우리에게 좋은 결과가 주어집니다. 반대로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면 그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결정하고 선택할 때까지는 신중하게 무엇이 올바른 결정이고 선택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
Ⅲ. 목표를 가지고 흔들림이 없이 나가야 합니다.
5절 하반절에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여기 ‘고난을 받으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고난을 받으며는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엄청난 핍박과 고난 속에 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믿고 나서 복음 전도자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는지를 스스로 고백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명을 감당할 때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빌3:14절을 보면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한 마디로 목적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은 자기의 인생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 원래 바울은 나름대로 인생의 목표가 있던 사람입니다. 야심이 대단했던 사람입니다. 일찍이 고향 다소에서 예루살렘으로 청운의 꿈을 안고 유학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그는 유대교에서 촉망받는 차세대 인물이었습니다. 이제 최고의 랍비가 돼서 한 시대를 풍미할 야심 찬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대단한 스펙을 가진 자입니다. 로마의 시민권 가졌어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사람이에요. 바리새인이에요. 권력도 가졌고 지식도 가졌고 부유함도 가지고 좋은 것은 다 갖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얻은 다음에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면서 주님 한 분을 내 가슴, 내 마음속에 모시면서 이 땅이 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삶의 이유를 알고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한 때 내 것으로 차 있었고, 내 노력, 내 의지로 가득차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없었던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내 운명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주님 앞에 거꾸러집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자신이 쏟았던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 순간부터 쓰레기처럼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마치 아름다운 보석들이 각각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낼 때 갑자기 영롱하고 찬란한 다이아몬드가 들어오자, 이제까지 광채를 빛내던 모든 보석이 빛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 참된 인생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삶의 새로운 목표를 발견합니다.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기쁨. 뜨거운 감격, 가슴 깊은 곳에 저미도록 스며드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사의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알 수 있는 넘치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파도처럼 밀려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고난은 장차 누릴 영광과 족히 비교가 안된다며 당당하게 주어진 � �을 감당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사도 바울만의 믿음이어야 합니까? 사도 바울에게 주신 사명과 우리의 사명이 다르고, 사도 바울의 삶과 우리의 삶이 다르다 하더라도 믿음의 방법과 가치는 동일합니다.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두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망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우리에게 그렇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나에게 맡긴 사명을 위해 최선의 자세로 목표를 가지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감당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