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한국의 희망(겔37:15-22)2010. 6.20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0-06-20 |
조회: 1854
1964년 동부 전선인 화천 백암산 기슭에 잡초가 우거진 비무장 지대를 순찰하러 가던 한 소위가 있었습니다. 양지 바른 산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이끼가 낀 채 허물어져 있는 돌 무덤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어느 무명용사의 무덤인 듯한 그 옆에는 녹이 슨 철모가 뒹굴고 있었고, 돌무덤 머리에 꼿힌 십자가 모양의 비목은 금새라도 무너질 듯, 한 모습이었습니다. 한 소위는 이 모습을 보고 글을 하나 남겼습니다.
1. 초연히 쓸고 간 깊은 계곡/깊은 계곡 양지녘에/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2.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달빛타고 흐르는 밤/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울어 지친 비목이여/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파/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비목(碑木) 그것이 우리나라 3대 애창곡으로 불리는 비목이라는 시가 쓰여 진 사연입니다.
오늘은 이 땅에 전쟁의 비극이 일어난 지 60년이 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1950. 6.25일 새벽에 북한은 고요한 아침에 남한을 침략을 했고, 이 전쟁은 4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국군의 사망이 58,809명. 우리의 우방인 16나라에서 온 연합군의 사망자가 36,991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민간인은 학살을 당한 자를 포함하여 370.599명이나 되고 생사를 알 길이 없는 행방불명자가 302,212명이나 되었습니다. 온 강토가 피로 물든 처참한 전쟁이었습니다. 요행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 피난 길을 나선 사람만도 240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뭐, 경제적 손실이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6900억 달러니까 뭐 상상이 안가는 엄청난 희생을 치른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전쟁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6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만, 아직도 한 민족이 남, 북으로 갈리워서 철책선을 두고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습니다. 이젠 천안함 사건 이후로 남북의 긴장 상태가 극도에 달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아닙니까? 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심각한 자리에 까지 와 있습니다. 북쪽과의 문제도 문제지만, 이 사건은 바라보는 우리나라의 진보와 보수의 시각차의 갈등이 얼마나 큰지 목회자로서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에 모인 여러분은 남북간의 통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난 2000년 이후의 우리 겨레의 통일 의식 조사 연구를 살펴보면 통일 의식은 세월이 흘러 갈수록 후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 져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아직도 80% 정도의 국민이 지속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만, 되도록 신속하게 통일이 이루어 져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2000년에는 69%가(남북 정상 회담의 기대치가 끼친 영향), 2004년에는 30% 정도로, 그리고 2006년도 말의 한 통계에는 약 14%의 국민들만이 동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기에는 통일 비용 부담을 꺼리는 경제 의식이 가장 중요한 반통일 의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과연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소원해야 할 통일은 어떤 통일이며 이런 통일 한국의 비전을 위해 우리가 할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에스겔서 37장입니다. 저 유명한 솔로몬 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처럼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왕국으로 분열된 분단국가가 되었습니다. 그 후 북방 이스라엘은 앗시리아 왕국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남방 유다는 바벨론 왕국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조국이 멸망하는 이 시점에 유다 왕국에 살면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에스겔이라는 젊은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때는 주전 약 586년경의 일입니다. 그는 포로로 끌려간 바벨론에서 자기의 조국 유다가 완전히 망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엎드려 기도하는 이 선지자의 가슴속에서 탄생한 중요한 민족사적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과연 남북 분단의 상처를 입고 쓰러진 자기 조국이 다시 통일된 하나의 나라로 부활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남북 분단 상황에 살던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둘로 갈라진 민족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어떻게 둘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가? 1. 네 손에서 하나 되게 하라. 17절 ‘네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나님은 오늘도 인간의 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갈라진 민족의 화해와 통일은 그리스도인의 손을 통해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서로 악수를 합니다.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면 악수를 합니다. 손으로 끌어 앉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병든 자와 어린이를 어루만지셨습니다. 손은 사랑과 용서와 관심을 의미합니다. 분단을 극복하고 화해와 통일은 그리스도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서로 손가락질하고 때리고 저주하는 손이 아니라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하고 악수하고 서로 돕고 섬길 줄 아는 손으로 평화통일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만들어 가는 손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일하길 원하십니다. 네 손에서 하나 되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2. 내 손에서 하나 되게 하라. 19절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이 사람들의 손에서 이루어지도록 일해야 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의 분단된 민족이 하나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통일은 인간의 힘만 가지고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은 분단된 민족이 하나 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에 귀환하면서 통일만족으로 회복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오늘의 역사 속에서도 철의 장막이 있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게 만드셨습니다. 세계에서 공산주의를 포기하게 하시고 사회 민주주의로 돌아서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독일을 통일하게 만드셨고 미국과 소련을 동반자 관계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늘 세계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살면서 통일은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손은 오늘도 둘은 하나 되게 하는 것을 위해 일치하고 있습니다. 네 손에서 하나 되게 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은 둘을 하나 되게 하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평화통일을 만들어 내시는 복된 손들이 되어야 합니다.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통일 민족이 되는 것은 어떤 정치력이나 경제력이나 무력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강대국들의 힘이 한반도의 통일을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적화통일, 흡수통일, 민족이 다 망하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통일 한국을 말할 때 피해갈수 없는 질문의 하나는 우리가 희망하는 통일 한국의 이데올로기적 정체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통일 지상주의자들은 어떤 정체성을 선택하던 상관없이 통일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 주신 통일 조국은 그냥 단순히 하나 된 조국이 아니라, 성소가 재건되어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길 수 있는 미래의 조국이었습니다. 다시 37:26의 하반부를 읽어 보십시오. “--내 성소를 그들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적어도 우리가 소원하는 미래의 조국은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고 경배할 자유로운 조국이지, 어떤 측면에서도 신앙의 자유가 위축되고 견제되는 전체주의나 사회주의적 통일 조국은 아닙니다. 지금 북한의 실태를 보십시오.
여러분! 저는 이번에 북한 선교에 대한 꿈을 가지고 한 주간 2000여 km 북녘 땅 접경 지역을 돌아보려고 합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북한의 산야가 왜 그렇게 다릅니까? 같은 산야인데 중국은 유월의 햇빛 속에 산야가 얼마나 우거지는지 모릅니다. 또 농사 역시 순조롭게 잘 경작되는데 왜 내 조국 북녘땅은 같은 햇살을 받고 같은 물줄기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완전히 민둥산이고 땅은 경작을 안 했는지 붉은 색 그대로 드러난 모습을 보고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이는 두만강 줄기를 타고 가서 보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옥수수 박사 김순권 장로님이 가져간 개량 옥수수도 북한에서만은 실패를 보았습니다.
몇해 전 북한 원자력 발전소 프로젝트인 케도에서 일하시고 돌아오신 우리 교회 김 집사님의 표현은 북한은 저주받은 땅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택 앞에 조그만 텃밭을 만들어 한국에서 가져간 씨를 뿌려 보았지만, 자라나지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저주를 받지 않고서야 어떻게 무엇을 심어도 자라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북한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김일성 부자의 우상숭배로 백성들을 비참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들은 북녘 땅에 교회를 잔멸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를 색출하여 공개 재판을 해서 죽이고 얼마나 잔혹하게 다루는지 모릅니다. 공산주의는 하나님이 없다는 주의입니다. 철저한 무신론으로 북한 백성들을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방법으로 그런 미래 통일 조국을 만들어 갈수가 있겠습니까? 사실 그 대답은 에스겔 37장 전반부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말씀과 성령이 아닙니까? 선지자 에스겔은 죽은 뼈로 가득 찬 민족의 골짜기에 생기가 불어오고 말씀이 대언되는 순간 죽은 뼈들이 거대한 군대가 되어 일어나는 민족 부활의 환상을 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답은 부활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통일 조국은 부활의 복음으로 새로워진 조국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이렇게 1000만이 넘는 믿음의 사람을 심어 놓으셨습니까? 이는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증인자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보세요. 우리 한국인이 전 세계에 안 들어간 나라가 없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중국이 들어가면 차이나 타운이 생기고 일본 사람이 들어가면 장사를 하는데 우리가 들어가면 꼭 교회를 세웁니다. 하나님은 이 민족에게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 마음이 북한 땅에도 미쳐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통일 한국이 과연 이 땅에 올수 있을까요?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해야합니까? 나는 누구보다 한국의 통일을 열망하며 이 나라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시다가 돌아가신 고 대천덕 신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제 생각에는 한국의 통일을 위해 하나님이 행동하실 기도의 잔이 다 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잔이 다 채워지기 까지 기도할 중보자들이 그 어느 때보다 그 누구보다도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중보의 용사들의 중보의 잔이 다 차면, 그리고 마침내 때가 이르면 주께서 일어나실 것입니다. 분단의 벽은 무너지고 평화 통일의 그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피 흘림이 없이 서로를 안고 통일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다음세대에게 다시는 비극의 전쟁터로 이 땅을 물려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약에 바울을 보세요? 그가 은혜 받고 난 다음 마음에 고토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롬9:1절에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그 고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큰 근심이 되었고, 그 근심이 지나쳐서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육체가 아픈 것을 고통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아픈 것을 슬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아픔이 지나쳐서 그것이 바울에게는 육체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자기 동족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하는 걱정 때문에 큰 근심이 되었고, 이 근심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까 나중에는 큰 고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얼마큼 고통했느냐 하는 것은 3절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는 말씀에서 저주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데마’인데,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구약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명령이 있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물론, 그 성에 있는 물건 하나까지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불태워서 없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데마’가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바울은 자기의 사랑하는 형제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리 없지만, 끊어진다 할지라도 나의 형제, 나의 친척이 구원만 받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었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열정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와 같은 동인한 기도가 출 32:32에도 나와 있습니다. 모세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사하지 아니하시려거든,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려 주옵소” 정말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다른 이의 영혼을 위해 간구하는 기도를 드린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이 부르짖음이 있습니까? 바울이 그들에게 한 때 도움이라도 받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이들은 바울에게 어떤 관계입니까? 바울이 피를 토하듯 끌어안고 기도하며 사랑했던 그들은 다름 아닌 바울을 배척했던 자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같이 바울은 일생동안 자기 동족으로부터 쉬지 않고 박해를 당했습니다. 바울은 평생동안 괴롭히고 해를 끼친 사람은 이방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동족이었습니다. 돌로 친 사람도, 태장을 때린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재판에 붙인 사람도 동족이요, 감옥에 가두어 놓은 것도 동족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고 예루살렘에서 소동을 벌인 자도 동족이요, 사사건건 미움과 박해를 가한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어찌 이런 자들을 사랑할 수 있으며 기도할 수 있으며 자기의 단 하나밖에 없는 그 생명을 바칠만큼 희생할 수 있겠습니까? 이를 갈며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미워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핍박할수록, 견딜 수 없는 자리까지 고난에 빠뜨려도 오히려 바울은 자기 동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더욱더 간청했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와 같은 자리에 서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워해 달라고 눈물로 매달렸습니다. 그는 안타가운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밤낮으로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았습니다. 10장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동족을 보면서 바울은 끊임없이 고통하고 괴로워했습니다. 바울의 고통에는 자기 민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원통해서 답답해하는 마음, 무엇이나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제 천만 그리스도인들이 민족의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손안에서 하나 되는 민족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삼각산에 가면 추운 겨울에도 산속 바위 위에서 통곡하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요즈음 살만하니까 하나님께 나라와 민족을 위해 부르짖는 기도가 끊어지고 있습니다. 분단을 극복하고 하나 되는 것은 사람의 손만 가지고는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안에서 통일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갈라지고 분열되고 분단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나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남북으로 동서로 갈라지고 전보와 보수가 갈라지고 심한 갈등구조 속에 있습니다. 하나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분열의 손 파괴의 손이 아니라 평화의 손으로 살며 하나님의 손에서 통일을 이루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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