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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무리(3)- "겨울이 오기전에"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3-12-17 | 조회: 211
아름다운 마무리 – 겨울이 오기 전에③ 딤후 4:9-16. 21. 2023.12/17

몇해 전 EBS 방송국에서 특집으로 한국산 호랑이가 시베리아에 서식하고 있는지를 조사한적이 있습니다. 제작팀이 무려 6개월 간 야영을 하며 호랑이를 촬영할 때 그 제작진의 한 PD가 한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노련한 사냥꾼은 발자국 하나만을 보고도 많은 것을 안다고 합니다. 발자국을 보고 그 자국을 남긴 사람이나 동물의 특성을 금방 압니다. 사람의 경우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이인지, 어른인지를 아는 것은 기본이고 이 사람의 몸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걸음걸이가 어떤지, 몸 상태는 어느 정도인지, 얼마나 빨리 걸어갔는지, 언제 그 자리를 지나갔는지 까지도 안다고 합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발자국 하나만 남겨도 이렇게 전문가는 판단을 합니다. 

인류 역사에 화려한 발자국을 찍은 사람들, 인간의 잣대로 거인이라고 평가된 사람들은 자신의 야망과 권력과 재물과 인기로 열심히 발자국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바닷물이 몰려오면 흔적도 없이 지워지는 모래 위의 발자국처럼, 영원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그들은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자신의 정리된 삶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모습을 봅니다. 너무 진실하고 가식이 없으며 솔직한 이야기들입니다. 그의 한편의 인생의 발자국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오면서 부딪히는 인간관계의 문제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에 보면 자신과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 그러나 함께 그 길을 가다가 결국 세상을 향해 간 사람들, 어찌 그뿐입니까? 자기를 괴롭혔던 사람에 대해서 말합니다. 마치 원수와 같은 비난자들입니다. 그리고 정말 미안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인생의 발자국에 남겨진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았던 사도 바울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두 번째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그 당시 정황으로 보아서 그는 이제 머지않아 순교하게 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현재 나이도 칠십이 넘어서 노인이지만,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게 아니라 정황이 '내년 봄에 어느 시간에는 내가 순교하게 될 것이다'라고 미리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6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전제와 같이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죽음이 바로 앞에 있음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그는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오랜동안에 경긴 경기를 끝내고 앞에 골인시점이 눈앞에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 말합니다.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라고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씁니다. 21절에도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말합니다. 이것은 지중해 연안을 배로 와야하기 때문입니다. 지중해 연안은 겨울이 되면 업니다. 추울 때는 얼어버려서 그 당시 2000년 전에는 접안 시설이 좋지 않아서 배가 항구에 접안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겨울에는 배가 운행하지 못합니다. 항해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비활동기가 온다는 말이죠. '활동할 수 없는 겨울이 온다. 그러므로 겨울 전에 어서 오라' 라고 간절하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계절적으로도 겨울을 만났지만, 그는 육체의 겨울을 맞았습니다. 

여러분, 겨울이 가까웠다면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습니다. 봄과 같이 희망에 찬 때가 있는가 하면, 또 뜨거운 여름 속 많은 시련 속에서 성장, 성장일로로 성장하는 그런 성장기가 있고, 또 한 여름 동안 성장한 대로 거두어야 하는 심은대로 거두는 가을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제 활동할 수 없게 얼어붙고 마는 동결되는 겨울이 있습니다. 겨울이 눈앞에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인생의 겨울을 맞아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기 위해 감옥에서 







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했습니다. 13절
13절 말씀에 아들 디모데에게 얘기합니다. “네가 올 때 내가 드로아 가보에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책은 특히 가죽종이에 쓴 것을 가지고 오라” 70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 인생의 문턱을 습기 차고 칙칙한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사도바울은 현재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겨울을 나기 위해 외투 한 벌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무엇이 필요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구약성경은 양가죽의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피가 크고 무거웠습니다. 늘 가지고 다니기에는 힘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회당에 두고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신의 말씀을 별도로 두었습니다. 선교여행으로 정착할 수 없었던 바울은 어느 집에 맡겨두어야만 했습니다. 인생의 겨울이 와 모든 것은 떠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도 없어졌을 때에도 힘과 용기 그리고 소망을 줄 수 있는 마지막 의지, 그것은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은 신약성경을 13권이나 기록한 사람이었습니다. 헬라철학에 정통했고 유대역사와 성경에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대학자로서 감명 받은 책도 여러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택한 책은 성경이었습니다. 왜일까요?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 속에 자신의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고독하고 외로운 감옥 속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었던, 인생에 길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혼란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분별할 지혜를 주었던, 즐거울 때 그 즐거움이 교만으로 남거나 타락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었던 그 말씀이 마지막 생애에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말씀을 가까이 했습니다. 마지막 순간 인생의 겨울에 서서도 말씀과 함께 했습니다. 소망의 나라로 인도하실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죽음 앞에 비굴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자기 삶을 아름답게 살았노라고 고백하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오늘 내 고백이 되기를 원한다면 지금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읽으십시오. 묵상하십시오. 이 말씀의 의미를 해석하십시오. 그리고 그에 따라 삶을 다시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사람은 겨울을 준비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봄, 여름, 가을에 준비하는 사람은 인생의 겨울을 춥게 지내지 않습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결산을 위해 말씀으로 준비하는 인생을 사십시오.Ⅱ.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마지막을 위해 인간관계를 정리합니다. 11절
11절에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는니라 네가 올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그리고 오늘 본문 성경에 보면 "마가를 데려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함이니라." 참 궁금한 얘기입니다. 왜 마가를 데려오라고 했을까? 왜 유익하다고 했을까?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할 때 "마가의 다락방, 마가의 다락방" 그 다락방의 주인입니다. 부잣집 아들인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1차 전도여행을 할 때 그가 따라나섰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가고 이렇게 수고를 많이 했는데 그만 전설대로는 잠깐 병에 걸렸던 일이 있어요. 그리고 나서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간다고 그러니까 "나, 안가겠습니다" 도중하차해서 집으로 가버렸어요. 

이런 유약한 마가가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따라나서겠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주 박절하게 거절했습니다. 물론 '내가 다시는 도중하차해서 돌아오는 일이 없겠습니다' 라고 맹세했겠지만 아니요, 너같은 부잣집 아들은 안된다고 딱 끊어버렸습니다. 이 일로 바나바와 심히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이 나누어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유럽을 향해 떠납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울에게 일평생 가장 부담되는 사람이 있었다면 누구였을까요? 바나바가 아니었겠습니까? 자신이 다메섹에서 회심하고 나서 예루살렘성에 들어갔을 때 모든 사람이 믿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멀리할 때였습니다. 바나바는 그런 바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했던 사람입니다. 박해를 받고 고향 다소에 가서 10년간 묻혀 지낼 때 안디옥에 파송되었던 바나바가 다소까지 찾아와 그를 안디옥 교회 지도자로 세운 것도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오늘의 바울은 바나바 없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와 심히 다투고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원인 제공자는 마가였습니다. 

그것이 바울 삶에 큰 부담이 되지 않았을까요? 선교에 필요 없는 존재, 선교할 자격이 없는 존재라며 마가에게 상처를 준 바울은 마가가 그러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상처를 남긴 존재로써 그에게 기억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가를 데려오도록 부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가는 지난날 사람들에게 부담되는 인생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훗날 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마가가 쓴 복음서라는 말입니다. 이 복음서는 제일 먼저 쓰여진 복음서입니다. 초대교회시절 성도들은 이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 저자들도 다 이 복음서를 읽었고, 이 복음서를 기초해서 자기들의 복음서를 썼습니다. 눈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정말 중요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 마가가 보고 싶은 것입니다. 마가와 인생의 마지막에 서서 그와 함께 거하며 서로의 가슴에 남은 응어리를 풀고 하나님의 교훈과 사랑으로 그를 다시 한번 사랑할 기회를 갖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






Ⅲ. 그러나 이 인생의 장에 함께 하지 못한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10, 14-15
10절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났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으니 이제는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난 '데마'와 갈라디아로 간 '그레스게,' 그리고 달마디아로 가버린 '디도' 같은 사람들입니다. 시련에 처한 바울을 지켜주는 사람은 오직 누가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 데마, 그레스게, 디도, 알렉산더, 이들이 누구입니까? 

한때는 바울의 제자요 동역자로서 예수를 잘 믿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손해와 고통이 닥치자 예수와 바울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세상 속으로 돌아가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한 싸움을 중단하고 악한 싸움에 휘말려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가지 못한 채 중간에 기권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믿음의 지조를 버린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재판을 받을 때 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주는 사람, 변호해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서운하고 화날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바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여기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서운하게 여겨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올 한 해 동안 나에게 큰 손해를 입힌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교회 일을 하는 동안 마음에 상처를 안겨준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더라도 올 해가 가기 전에 서운한 감정들은 다 씻어버리고 꼭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자를 이야기합니다. “14.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15.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여기 구리 장색이란 옛날에 구리로 우상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이 우상을 만들어 장사하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로 인하여 장사에 막대한 손해를 보았기 때문에 바울을 심히 괴롭혔습니다. 바울에게는 그의 목회사역을 방해하던 아주 원수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괴롭히던 사람들에 대하여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희에게 갚으시리니" 하며 하나님께 맡겨 버렸습니다. 바울은 롬12:19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더 이상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께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는 "너희도 저희를 주의하라"고 얘기할 뿐입니다. 내 인생의 겨울이 오면 어떻해야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을까요? 
Ⅲ. 우리 역시 사랑의 빚을 갚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앨버트 슈바이처라는 이름을 우리는 다 기억합니다. 그가 아프리카 람바네레로 떠나가기 직전에 그가 살던 고향 도시지역 신문들은 닥터 앨버트 슈바이처가 아프리카로 떠난다는 사실을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가 좋은 의료인의 조건, 또 여러 개의 학위, 보장된 미래와 출세를 포기하고 떠나간다는 것이 그 때만 해도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은 이런 결단을 하셨습니까?” 닥터 앨 버트 슈바이처는 조용히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빚 갚기 위해 서입니다.’ ‘제가 철이 들면서 생각해 보니까, 저라는 인생은 온통 빚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을 제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오늘이 있기까지 저는 온통 빚지고 산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감상적인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다음 주는 성탄의 말입니다. 요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더럽고 추악한 냄새가 나는 이 세상 한 복판에 당신의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악으로 물들고 오염된 나 하나를 건지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신 것입니다. 뭐 자격 따지셨나요,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나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나의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고, 희생 제물로 나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누리는 구원입니다. 우리는 정말 주님으로부터 큰 사랑의 빚을 진 자들입니다. 






그 구원받은 것도 감사한데 이렇게 직분까지 주시는 여러분 어떻습니까? 내가 누구입니까? 도대체 내가 뭔데, 도대체 나란 인간이 뭐길래, 하나님께서 외아들 독생자를 아무 조건 없이 주셨습니까? 우리는 이 성육신의 사랑을 입고 죄 사함의 은총과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임마누엘로 나와 함께 하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성탄의 깊은 의미를 가지고 섬김과 나눔으로 주님의 사람을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한사람의 섬김보다 모든 성도들이 함께 이웃을 돌아봅시다. 

오늘 오후 예배는 20년이 넘게 우리가 섬긴 등대 교회 성도들이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참 많은 성장을 했습니다. 노숙자로 있던 분들이 이젠 그리스도인들로서 아름답게 세워졌습니다. 우리가 주일 오후에 그 교회 방문하고 선물을 전달했지만, 이번에 교회 행사가 많아서 함께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정말 행복한 성탄을 가집니다. 다들 오후에 모여 주 앞에 영광 들리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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