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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무리 - 나의 갈길 다가도록(4)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3-12-31 | 조회: 214
아름다운 마무리 나의 갈길 다가도록딤후4:17-18. 2023. 12/31
 
벌써 금년 한해의 마지막 주일,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분수령에 서서 각자가 느끼는 것도 다양할 것이고, 또 생각하는 것도 많은 차이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특별히 여러분 각자가 처한 형편이 어떤가에 따라서 많이 달라집니다. 건강하고 형통한 사람은 밝은 눈으로 새해를 기다리고 묵은해를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병들고 실패하고 좌절감에 빠져있는 분들은 세월이 흐르는 것이 더없이 처량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또 앞으로 살아갈 일에 대해서 많은 걱정들이 쏟아져 들어오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한 나이로 보아서 어떤 연령에 지금 속해 있느냐에 따라 한 해를 보내고 맞는 감정이 틀립니다. 인생을 좀 살았다는 사람들은 다 이런저런 어려운 사연이 있었고 그 어려움 앞에 좌절하기도 했지만 참고 견디고 싸워서 이기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금년 한 해도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혹 의식하든지 못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름다운 마무리란 제목을 가지고 사도바울의 생애의 마지막 장면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저는 본문을 보면서 달려갈 길을 마지막까지 완주를 하는 바울을 생각합니다. 울트라마라톤이란 경기가 있습니다. 달려야 할 거리가 100킬로나 됩니다. 42.195킬로인 일반 마라톤도 완주하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이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을까요? 완주자들이 말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충분한 훈련과 컨디션 조절이 필수적이라고 합니다. 특히 70킬로 지점에서 한계를 맞게 되는데 이때부터는 정신력싸움이라고 합니다. 완주하겠다는 의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합니다. “가는 데까지 가보지!”하는 마음으로 참여한 사람은 절대로 완주할 수 없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완주하겠다!”라는 마음을 참여한 사람들만 완주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바울이 차디찬 감옥에서 자신의 마지막 죽음을 감지하면서도 어떻게 이렇게 당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이유는
 
.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오늘 본문은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정말 가슴 벅찬 감동의 메시지입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지난날 그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 했던 일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더라면 성도들을 계속 박해하면서도 인생을 마치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도 아시지만, 원래 바울이 이런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초대교회가 핍박받을 때 교회를 잔멸할 만큼 앞장을 섰던 자입니다. 참으로 잔인한 핍박을 서슴없이 했던 자가 바로 바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사로 잡으셨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를 붙잡은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뀌는 엄청난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가 그토록 경멸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얼떨떨했고 '무슨 이런 일이 있나? 왜 내가 이렇게 비참해지나?' 하고 느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예수님이 왜 자기를 갑자기 붙들고, 자기를 손에 꽉 쥐시었는가 하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 그의 마음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격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한 자기를 불쌍히 여기셔서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사도로 불러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것입니다.생각해 보세요. 자기가 무슨 염치로 복음을 전할 자격이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자격 있다고 하십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그는 자신을 감히 사도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시며, 자신은 죄가 많아서 안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문제삼지 않으시고 그를 사도로 세우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파격적인 대우, 즉 연약함과 잘못을 불문에 붙이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바울은 예수를 영접한 후에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 한 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니 그는 자신이 처한 어떤 자리에서도 자기가 만난 예수를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는 감옥에서 인생의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졌던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다 버린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병든 노구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아픔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신이 패배했다고 이야기 안합니다. 오히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임마누엘로 함께하시고 힘을 주셨다는 외침입니다.
 
우리 교회에 어머니 기도회에 오셔서 큰 은혜를 끼친 위기상담 전문가이신 정태기 교수님께서 쓰신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는 책에 보면, 정 교수님께서 한 때 심각한 신앙의 위기를 당할 때에 소록도에 갔던 경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정 목사님은 기도가 목구멍으로 넘어오지 않고, 알 수 없는 분노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소록도에 무작정 들어갔습니다. 그가 소록도에 도착하던 날은 마침 수요일이었고, 예배당에 가보니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통성기도가 시작되었는데, 목사님은 아무리 애를 써도 기도가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기도가 목사님의 귀를 파고들었습니다. 그 기도소리는 머리를 치고 가슴속을 후벼 파는 소리였습니다. “하나님, 제게 주신 은혜가 어찌 이리 큽니까? 주님, 어찌하면 제가 주의 은혜를 갚을 수 있습니까?” 기도소리는 계속되었습니다. “주여, 당신의 이 큰 은혜에 제가 어찌하면 만 분의 일이라고 갚을 수 있겠습니까?” 정목사님은 그 기도소리를 듣다가 도대체 무슨 은혜를 그렇게도 많이 받았기에 저런 기도를 할 수 있는가 싶어,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60이 넘은 듯한 흉측하기 이를 데 없는 늙은 노인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한센병이 얼마나 심했던지 얼굴의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머리, 떨어져 나가 움푹 패인 코, 짓무르다 못해 위아래가 붙어 버린 눈...그 눈으로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손목뿐인 손바닥으로 박수를 쳐가면서 목이 터져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정목사님은 자신의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곧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피처럼 붉은 통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두 시간이나 정목사님은 그렇게 통곡을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가 끝난 뒤에 그 노인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정 목사님은 그 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뭐가 그렇게 고마우세요? 무슨 은혜가 그렇게 크신 것입니까?” 그 때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문둥병에 걸리자 세상도, 피붙이들도 다 나를 버렸어. 물론 친구들도 다 떠나버렸지. 그런데 말이야, 이 소록도까지 나를 따라온 분이 계셨어. 그리고 내게 소망과 기쁨을 주셨지” “, 할머니가 따라 오셨군요?” “아니야, 할머니는....예수님이 따라 오신거야!” (침묵) 그렇습니다. 세상이 버린 이 문둥병 환자의 인생에 이 기쁨과 이 감격이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바로 주님이 임마누엘로 내곁에 서서 내 인생을 어떤 상황 환경 속에서도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는 감옥에서 인생의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졌던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다 버린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병든 몸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드려움과 아픔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신이 패배했다고 이야기 안합니다. 오히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임마누엘로 함께하시고 힘을 주셨다는 외침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 생명을 걸고 사명을 위해 살아가는 계기가 됩니다. 17 하반 절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무슨 말입니까? 여기 복음 증거하는 삶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무엇인가요? 복음을 아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복음을 더 들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게 몇 마디로 정의하고 끝날 내용이 아닙니다. 복음을 제대로 알려면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암이 무서운 것은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 있다가 한참 진행이 된 후에 알게 되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즘 병원에는 초정밀 입체 영상 진단기(MDCT)를 갖추고 인체 안을 훤히 들여다보며 아주 작은 종양까지도 찾아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에 대한 진단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정확히 볼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보는 눈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란 기준이 무너진 상태로, 나를 보는 눈도, 남을 보는 눈도, 하나님도 못 봅니다. 무엇이 죄인지에 대한 기준이 없습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얼마나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는가를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초고속 초정밀 입체 진단기 역할을 해서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가를 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신이 멍한 가운데 그저 요식적인 절차를 거치면서 아멘 하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의 십자가 앞에 정면으로 마주치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우리 자신이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붙들고 자랑해왔던 모든 자존심들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을 맞아야 합니다. 인간의 자존심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죄로 인해 똘똘 뭉쳐진 인간의 자아가 그렇게 간단하게 죽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를 뒤집어쓰고 냄새 나는 끔찍한 존재인 것을 인정하고, 예수가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나는 죽을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십자가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죄의 무게가 얼마나 큰가를 알게 됩니다.
 
그 죄의 무게가 자신의 인생을 짓누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도무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때 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야만 했는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복음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 하신 예수를 만난 그 사건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사명자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기위해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이 끝나기 전에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끝까지 도와주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시편 3318절에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 시에 살게 하시는도다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를 지키시고 도와주십니다. 지금 바울은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 면류관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것을 확신합니다.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보십시오. 우리는 하늘나라에 속한 자이지만 동시에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 둘 사이에 끼어 사는 고통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왜 고통과 아픔이 옵니까?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려하니까 세상이 우리를 놔두지를 않습니다. 이 때문에 오는 어려움이 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라톤처럼 달려가는 인생길에 얼마나 많은 장애물이 있는지 모릅니다. 오스기니스가 쓴 저항이라는 책을 보면 오늘 우리 시대를 신앙의 변절을 요구하는 시대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지난날의 신앙의 선배들이 살았던 시대는 신앙의 포기를 요구하는 시대였다면, 오늘은 신앙의 변절을 요구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 당시의 시대에는 박해를 통해서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면, 오늘은 유혹과 미혹을 통해서 신앙의 변절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처럼 박해에 저항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유혹과 미혹으로 우리의 신앙을 변절하게 하는 모든 것들에 저항해야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바울은 롬12:2에서 이렇게 권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따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저항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풍조에 저항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세상 풍조에 저항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다며 추구하는 세속주의 세상 풍조에 저항하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장차 이 땅에서 누릴 수 없는 하늘나라의 면류관의 주인공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헨리 C. 모리슨이라는 아프리카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금세기 초 아프리카에서 40년 동안 개척적 선교 사역을 하는 동안 건강을 잃고 가족을 잃기도 하고 이젠 늙은 선교사가 되어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타고 돌아오던 배에는 아프리카의 한 국가를 방문 후 코끼리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데오도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뉴욕 항구로 입항하고 대통령이 내리자, 붉은 레드 카펫이 깔리고 군악대의 팡파레 소리로 대통령을 환영하고 있었습니다. 대통령 일행이 항구를 빠져 나간 후 모리슨 선교사가 항구의 출구로 나서자 레드 카펫도 없었고 군악대의 팡파레 소리도 멎은 후였고 그를 마중 나온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선교사는 저녁 노을 진 하늘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답니다. “주님, 이것이 40년간 아프리카에서 저의 청춘을, 저의 건강을, 그리고 저의 일생을 바친 결과란 말입니까?” 그때 그는 저녁 노을 사이로 말씀하시는 조용한 한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헨리야,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오지 않았단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레드 카펫이 아닌 황금의 유리길로, 군악대가 아닌 천사들의 나팔소리와 함께 내가 너를 마중 나오마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직 고향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이 한해를 보내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의 순례를, 섬김의 순례를, 그 영원한 사랑의 순례를 계속해야 합니다. 여기에 한 분의 낙오자도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삶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인생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는 그래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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