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새롭게 하소서(3) (엡 4:22~24)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4-01-23 |
조회: 280
주여 새롭게 하소서 – 새사람을 입으라 (3) 엡4:22-24. 2024. 1/21
옥스퍼드 대학의 맥그래스 교수가 쓴 ‘내 평생에 가는 길’이란 책에 보면 인생을 묘사한 한 구절이 참으로 제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인생에 대해서 그는 짧고 상쾌한 산책일 줄 알았던 것이 미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마라톤으로 바뀐다. 어린 시절, 철이 없을 때는 인생이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걷는 산책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좀 더 걷다 보면 미처 준비가 안 된 채 달려야 하는 마라톤이 되어버립니다. 이 마라톤을 달리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쳐 쓰러지고 탈락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절망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는 인생길입니다.
더욱 가슴 아픈 현실은 그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야 하는데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그냥 널부러져 체념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2024년이라는 새해를 사는 여러분 가운데 다시 일어설 것인가 주저앉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이미 만세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나하나를 위해 저주와 고통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실 만큼 결코 예수님이 놓칠 수 없는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오늘도 보혜사가 되신 성령께서 어디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나를 은혜로 붙잡으시며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말씀하신 가장 소중한 존재가 여러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과거의 틀에 매여 살아서 되겠습니까? 이젠 달라져야 합니다. 옛사람을 벗어던지고 심령이 새롭게 되어 내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신앙의 향기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에게 친숙한 옷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아주 귀중한 영적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점은 매우 간단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였는데 하나님이 은혜로 저와 여러분을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이제 나는 하나님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은 버린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신분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신분이 바뀌었으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신분이 바뀌었으니까 당연히 그 신분에 맞는 옷으로 이제는 갈아입어야 한다."
무엇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까? "새 사람"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의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은 “주여! 새롭게 하소서” 세 번째 시간으로 ‘새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새해에 우리가 마땅히 입어야 할 옷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 앞에 가르침 받기를 원합니다.
Ⅰ.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23절에 “오직 심령이 새롭게 되어”입니다. 여기서 '심령으로 새롭게 된다'는 것은 정말 신비스러운 말씀입니다. 여기 심령은 바로 마음을 의미하는데 이 마음은 내 의지를 통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으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계신 성령이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에베소에 사는 많은 성도 가운데 자신들이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에 휘둘리고, 마귀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한 채 무력한 삶을 사는 자들을 향한 질책의 말씀이기도합니다.
우리 신앙인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뭐 이 말씀은 오늘 우리도 깊이 들어야 할 말씀이 아닙니까? 특별히 이 아침 성령이 나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너, 정말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강화도령으로도 유명한 철종을 아십니까? 이 철종은 사도세자의 후손입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을 때 아들 셋이 남아 있었습니다. 세자빈에서 태어난 장남은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조 임금이 되었고, 다른 아들 둘은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들은 당시 천주교인이란 사실이 발각되면서 유배지 강화도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되고 후손들은 모두 강화도에서 왕가와는 관계없는 비참하게 살게 됩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조선 왕조에 왕가에 대가 끊기게 됩니다. 새로운 왕을 옹립해야 되는데 권력을 쥐고 있던 세도가들은 똑똑한 왕을 원치 않았습니다. 왕이 똑똑하면 왕권을 강화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권력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왕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왕조가 전주 이씨의 나라였기 때문에 이성계의 피를 타고난 사람 중에 왕을 세워야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수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오래전 강화도로 유배를 떠난 이 집안을 생각해 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사람이 강화도에 살았던 강화도령으로도 유명한 철종입니다. 이 강화도령은 이성계의 피를 타고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왕이 되는데 기본적으로 하자는 없었습니다. 조선 25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다는 것과 왕답게 산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는 왕이 되었으나 전혀 왕답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가 왕답게 살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어떻게 국방을 튼튼히 하고, 농업을 장려하고, 상업의 발전을 도모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살게 할 것인지를 배워야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술이나 마시고 궁녀들 꽁무니나 따라다니면서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철종형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의 보혈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으나 전혀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디도서 3: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가 구원받고 새사람이 된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가능하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선을 쌓고 율법을 잘 지켜도 그걸로 우리의 구원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실 때에만 구원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은
Ⅱ. 거룩함 입은 존재라는 것을 말합니다.
24절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여기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았다“라는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은 신분의 변화를 받았다면 이제 거룩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 바로 믿는 자의 모습입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은 세상 사람과 얼마나 다르냐에 달려있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자기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하나님이 그 고향에서 불러냈셨을까요?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사람, 다른 사람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방인 된 우리를 예수 믿도록 불러내셨습니까? 왜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셨습니까?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보십시오. 800만의 성도가 이 대한민국에 살고 있습니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온 땅에 펼쳐 날 갈 수 있는 엄청난 자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그렇게 낙관적이지 못합니다. 마치 우리의 모습은 머리 잘린 삼손처럼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모습으로 세상 앞에 비춰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3년 4개월 동안 코로나사태를 겪어온 것입니다. 결코 짧지 않은 이 사태는 우리의 삶의 환경을 뒤바꿔놓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환경도 뒤바꿔놓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변화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합니다. 그리고 감내해 가기에 힘들 정도로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세상앞에 구별된 인생으로 부름 받은 우리는 새사람을 입고 이 한해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에베소 도시에는 당시 인구의 1%가 될까말까한 성도들이 복음을 들고 살고 있습니다. 그들 앞에 선 에베소 도시는 마치 여리고성처럼 도무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난공불락의 도시입니다. 에베소는 세계적인 무역 도시였으며 인구가 한때 30만에 달하는 곳이었습니다. 로마 당시 소아시아 최대의 도시로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신 로마로 불리웠습니다. 석주 127개가 동원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테미 신전에서는 매년 5월에 세계의 호사가들을 불러 모으는 아테미 여신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도시의 겉 모습일뿐 이미 영적으로 썩을 대로 썩어버린 도시였습니다. 여기 머물면서 주의 사역을 펼치는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바울이 증거한 말씀 앞에 에베소 전체가 영적인 지진이 일어난 것입니다.
행19:17-20절을 보십시오. “에베 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지금 에베소 광장 앞에 에베소에 사는 불신자들이 은 오만이나 되는 엄청난 마술책들을 가지고 와서 불사르는 장면을 보십시오. 그들은 그 책을 최고의 경전으로 여기며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그 책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책이 얼마나 무가치한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가치 있게 생각해선 모든 내용들이 사실은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두 무가치하게 여겼습니다.
오늘 에베소 교회에 일어난 이 놀라운 일을 보십시오. 무엇이 이 오만한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의 이름을 높이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교만한 헬라인들로 하여금 두려움 가운데 떨며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예수의 이름을 떨리는 음성으로 찬송하게 만들었습니까? 에베소 사람들로 하여금 평생에 생업처럼 여겨 오던 마술책을 불사르며 여호와를 노래하게 만든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자복하게 하고 예수를 믿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거룩한 삶의 모습입니다. 1%도 안되는 그리스도인들이지만, 거대한 세속의 도시를 주님 앞에 무릎꿇게 만든 것이 바로 성도들의 거룩한 삶이었습니다. 살전4:3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구원과 거룩 - 이는 성도의 삶의 여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까지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여기 새사람을 입으라는 이 명령형은
Ⅲ. 구원받은 우리로 하여금 변화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미래는 오늘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미래를 대비하지 않으면, 자칫 도태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동성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래는 오늘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숨 가쁘게 다가오는 미래는 위협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잘 대비하지 않으면, 큰 위기를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대비하면, 오히려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 표어가 “주여! 새롭게 하소서”라는 절박한 자세로 이 한해를 살아가야 합니다. 이 결단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정광호 씨는 「우화경영」에서 솔개의 장수비결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솔개는 가장 장수하는 조류로 알려져 있다. 솔개는 최고 약 70세의 수명을 누릴 수 있는데 이렇게 장수하려면 약 40세가 되었을 때 매우 고통스럽고 중요한 결심을 해야만 한다. 솔개는 약 40세가 되면 발톱이 노화하여 사냥감을 그다지 효과적으로 잡아챌 수 없게 된다. 부리도 길게 자라고 구부러져 가슴에 닿을 정도가 되고, 깃털이 짙고 두껍게 자라 날개가 매우 무겁게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기가 나날이 힘들게 된다.
이즈음이 되면 솔개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약 반년에 걸친 매우 고통스런 갱생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갱생의 길을 선택한 솔개는 먼저 산 정상부근으로 높이 날아올라 그곳에 둥지를 짓고 머물며 고통스런 수행을 시작한다.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 부리가 깨지고 빠지게 만든다. 그러면 서서히 새로운 부리가 돋아나는 것이다. 그런 후 새로 돋은 부리로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그리고 새로 발톱이 돋아나면 이번에는 날개의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낸다. 이리하여 약 반년이 지나 새 깃털이 돋아난 솔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30년의 수명을 더 누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솔개에게 자신을 갱생하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지혜를 주셨다고 해서 모든 솔개가 그 지혜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솔개는 40세가 되었을 때 그의 인생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 이유는 지혜를 따라 살기 위해서는 피눈물 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리가 깨어지고, 발톱과 깃털이 뽑히는 아픔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과정을 잘 거치게 되면 솔개는 다시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30년의 수명을 더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다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에게 직면한 교회 개혁의 과정은 교회 장수를 위해 피할 수 없는 고통의 과정입니다. 구부러진 부리와 노화된 발톱과 무거워진 깃털을 새롭게 하기 위해 통과해야 할 아픔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와 격려로 이 과정을 잘 통과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이 시대를 이길 만한 영적 무기가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히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건강이 아닙니다. 물질이 아닙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되심을 믿는 믿음, 그리고 때를 따라 도우시는 믿음, 더 나아가 내가 어디에 있든지 항상 나와 함께하는 그 믿음을 가지고 내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이 은혜가 늘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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