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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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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형제를 위하여(롬9:1-5) 2010. 6.27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0-06-28 | 조회: 1910
나의 형제를 위하여 롬9:1-5. 2010. 6/27. 주일 설교



요즘 전 세계가 조그마한 공 하나로 기쁨과 탄식이 교차되는 ‘팬들럼(pendulum) 현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낯과 밤이 바뀌는 일상의 삶의 변화가 있음에도 불과하고 감정의 극과 극을 오가는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월드컵 그리스 전에서 2:0의 통쾌한 승리를 경험 한 후 우리 국민은 이미 월드컵 우승을 거머쥔 것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전에서 4:1로 참패한 후 역시 실력은 어쩔 수 없다고 이제 월드컵의 꿈은 접어야 한다고 모든 기대를 땅에 던진 국민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꿈을 접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난 수요일 새벽에 밤잠을 설치며 나이지리아 전에서 2:2로 비기는 순간 다시 꿈은 살아났다고 온 통 대한민국이 흥분의 도가니가 되어 저가 있는 중국 땅에도 그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어느 성도가 너무 기뻤는지, 또 제가 운동을 좋아한다는 그 사실을 알고 새벽에 이기자 마지 문자가 날라 왔습니다. “목사님 기뻐해 주십시오. 2:2. 16강입니다. 선교 사역 잘하시길 바랍니다.” 어제 밤 우리는 이제 8강을 향해 가는 우루과이와의 혈투에서 비록 아쉽게 졌지만, 거의 까무러칠 정도의 긴장의 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월드컵의 열기에 묻혀 생각보다 국민들의 큰 관심을 유도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지난 6/10일 오후 5시 1분 우주를 향한 꿈을 안고 하늘을 올라간 나로호가 발사 137초후 고도 70km 상공에서 공중 폭발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후 신문 사설에서 두 가지 상반 된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 언론인은 두 번씩이나 실패했다는 것을 역설하며 이제는 꿈을 접고 다른 분야에 그 돈을 투지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분의 과학자는 이제 겨우 두 번 실패한 것이라고 우주를 향한 꿈은 계속 되어야 한다고 쓰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두 번이나> 실패했다고 말하고, 또 한 사람은 겨우 <두 번만> 실패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실패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에 대한 그릇된 반응으로 실패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인생의 대부분의 성공은 실패를 디디고 일어섬으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들이 일어서 걷기까지는 보통 2000번의 넘어짐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인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처음에 예수를 만났을때 자신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점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은혜 속에 들어가면 무엇보다 주님의 깊은 사랑을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또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시면 바울에게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 불편한 심정은 1-2절에서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그 고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큰 근심이 되었고, 그 근심이 지나쳐서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육체가 아픈 것을 고통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아픈 것을 슬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아픔이 지나쳐서 그것이 바울에게는 육체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자기 동족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하는 걱정 때문에 큰 근심이 되었고, 이 근심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까 나중에는 큰 고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얼마큼 고통했느냐 하는 것은 3절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라는 말씀에서 저주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저주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데마’인데,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구약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명령이 있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물론, 그 성에 있는 물건 하나까지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불태워서 없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데마’가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바울은 자기의 사랑하는 형제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리 없지만, 끊어진다 할지라도 나의 형제, 나의 친척이 구원만 받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열정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이 그들에게 한 때 도움이라도 받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이들은 바울에게 어떤 관계입니까?



바울이 피를 토하듯 끌어안고 기도하며 사랑했던 그들은 다름 아닌 바울을 배척했던 자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같이 바울은 일생동안 자기 동족으로부터 쉬지 않고 박해를 당했습니다. 바울은 평생동안 괴롭히고 해를 끼친 사람은 이방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동족이었습니다. 돌로 친 사람도, 태장을 때린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재판에 붙인 사람도 동족이요, 감옥에 가두어 놓은 것도 동족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고 예루살렘에서 소동을 벌인 자도 동족이요, 사사건건 미움과 박해를 가한 사람도 동족이었습니다.



어찌 이런 자들을 사랑할 수 있으며 기도할 수 있으며 자기의 단 하나밖에 없는 그 생명을 바칠만큼 희생할 수 있겠습니까? 이를 갈며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는 미워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핍박할수록, 견딜 수 없는 자리까지 고난에 빠뜨려도 오히려 바울은 자기 동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더욱더 간청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와 같은 자리에 서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워해 달라고 눈물로 매달렸습니다. 그는 안타가운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밤낮으로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았습니다. 10장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동족을 보면서 바울은 끊임없이 고통하고 괴로워했습니다. 바울의 고통에는 자기 민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원통해서 답답해하는 마음, 무엇이나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에 북한 접경 지역을 돌아보며 느낀 것이 참 많습니다. 특히 과기대에 김진경 총장을 만나서 긴 시간 동안 북한 실정을 들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그리고 남북 나눔 운동에 몸담고 있는 홍정길 목사를 통해 지금 북한 땅에 사는 주민들이 얼마나 황폐해 있는지에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들에게서 느낀 것은 얼마나 북한 동포들을 위해 아파하는지, 그저 아파 할 뿐만 아니라 그 일에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찾아 몸부림을 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1995년 이후 가장 최악의 굶주림이 북한 땅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분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눅 10장에 선한 사마리아 비유가 나오지 않습니까? 거기에 보면 예수님은 한마디도 강도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강도만난 자를 누가 도와주었는가? 여기에 주님은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기득권층인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호되게 닦아 세웠지 않습니까? 이 비유에서 주님은 강도에 초점을 맛춘 것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를 도우지 않은 종교적 지도자들을 책망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마땅히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아야 할 책임을 가진 자리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종교적 활동을 이유로 그 죽어가는 현장을 외면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사람,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에게 고통을 주고, 멸시하던 유대인을 보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시간, 정성, 물질 모든 있는 것을 다 주는 그 모습 속에서 과연 우리의 자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이야기 합니다. ‘지금 우리가 퍼 주는 것이 효과적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우리 한국 교회가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합니다.’ 라고 절규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도전을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에 예수를 위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 무슨 말입니까? 성장이 없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신앙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고전 3:3절에 보면 “시기와 분쟁”입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린아이 신앙은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고, 자꾸 남을 의식합니다. 비교의식에 빠져서 시기하고 질투한다. 자기 성장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남을 깎아내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분쟁을 일으킨다. 한마디로 유치한 신앙입니다. 여러분 왜 김구 선생을 이 민족 지도자가 영향력을 끼친 지도자로 인정을 하시는 줄을 아심니까? 그것은 ‘민족에 대한 아픔’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나라 잃은 백성에 대한 아픔, 먹고 살기 위해서 만주 등지로 흩어진 동족에 대한 아픔이 민족 지도자로 만든 것입니다. 김구 선생은 많이 아파했습니다. 가슴으로 아파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스펙을 쌓으면 인물이 되는 줄 압니다. 유학 다녀오고, 경험을 쌓으면 지도자가 되는 줄 압니다. 아닙니다. 지도자는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아파하는 사람이 백성을 이끌 수 있는 것입니다. 아픔을 모르는 사람이 지도자 행세를 할 때, 시대의 어둠이 옵니다. 마귀의 유혹이 무엇입니까? 어린아이로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로 머물게 하는 것은 아픔을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부인은 아픔을 품는 것에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 속에 남의 아픔에 우는 통곡이 숨겨져 있습니다. 아픔을 모르면 영원히 어린아이입니다. 하나님이 왜 고난을 주십니까? 아픔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아픔을 느껴야 지도자가 됩니다. 아픔 없는 능력은 ‘꾼’이 되게 하지만, 아픔을 느끼는 능력은 ‘지도자’가 되게 합니다.



북한의 식량 사정이 어느 정도 어려운지 아십니까? 김진경 총장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김책 공과대를 졸업하고 중학교 교장 선생으로 있던 한 공산당 간부가 공무 수행으로 나갔다가 3개월 만에 집에 돌아오니 아내와 아들 그리고 딸 모두가 굶어 죽은 이야기는 어떻게 들어야 할지 통증이 일어나더라구요!! 그러나 그들에게 육체적인 굶주림보다 더 커다란 굶주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굶주림입니다. 적어도 북녘 땅에 내 사랑하는 겨레의 95% 이상이 저들의 생애 속에서 단 한번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소식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바울의 고백을 다시 들어 보십시오? 우리가 구원의 영광을 확신하면 할수록, 구원의 기쁨을 경험하면 할수록 우리는 나같이 이 영광스러운 구원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는 내 친구와 형제와 골육과 이웃들은 어떻게 될까하는 관심을 갖게 됩니다. 바울 자신도 자신의 골육과 친척, 더 나아가서 자기 민족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은 내 이웃과 내 민족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사역에서 탈북 여성 한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자기 마을에서 예수를 믿는 믿음을 표현 할 길이 없어 하나님을 큰 아버지라고 부른답니다. 그리고 가족과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이곳에서 예수를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과 자기처럼 김일성 부자에게 속아 사는 자기 형제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겠다는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무엇이길래 저 남은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저렇게 얼굴에 기쁨이 충만하여 저렇게 간증을 하는가?’



이 시간 주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1) 너에게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가? 2) 너의 형제, 너의 동족을 위한 아픔의 눈물이 있는가? 이 질문을 받고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바울처럼 양심적으로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남편이 믿지 않습니까? 아직도 부모가 예수를 모릅니까? 아직도 자식이 교회에 안 나옵니까? 아직도 이웃이 예수 믿지 않습니까? 아직도 직장 동료가 예수 믿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내 양심에 고통도 없이 나 혼자만 구원받았다고 하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주님은 여러분을 가증스럽게 보실지도 모릅니다. 나 혼자만 구원받아서는 이 땅에서 진정한 행복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같이 구원받아야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직도 안 믿는 사람을 보아도 가슴에서 아픔이 저려 나오지 않는다면 북극의 빙산처럼 얼어붙은 이 마음을 녹여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두만강 끝자락인 연해주 마지막 지역인 병천을 가보았습니다. 거기엔 두만강 물줄기가 동해안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곳입니다. 그 길을 가기 전에 도문이라는 곳에 끊어진 다리 하나가 있는데 바로 그 앞에 북한 땅이 눈앞에 쑥 들어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작년 12월 25일 성탄절 날에 스스로 북한 땅에 걸어 들어간 우리 교포 2세 로버트 박 선교사가 두만강을 건너가서 외쳤던 바로 그 끊어진 다리에서 그 젊은이를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무모하리만치 저 강물에 뛰어들게 만들었는가? 만용인가? 객기인가? 그이 몸에는 전단지가 있었습니다. “정치범 수용소를 폐지하라, 지하 성도들의 박해를 중단하라, 그리고 굶어 죽어가는 불쌍한 동족들에게 외부 세계의 구제물자가 자유롭게 들어가게 하라 ”



그런 그가 42일 만에 북한 땅에서 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자기가 북한에 들어가 모든 북한 내 상황을 보고 들은 후에 깊이 깨닫고 뉘우치게 되어 공개적으로 반성과 사죄를 한다는 것입니다. ‘평양에 들어가 보니 마음껏 예배하고 성경을 읽고 교회를 자유롭게 출입하고 빼았겼던 자기 성경을 돌려주며 때리지도 않았으며 기도 시간을 방해하지도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권 침해도 없고 종교자유도 완전히 보장받는 북한의 체제에 시비를 걸고 비난 한 것을 공식 사죄한다’는 식의 기자회견 성명서를 북한 중앙 통신이 발표한 것입니다.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 아닙니까? 성령으로 불타서 끊어진 다리를 건너 무모하리만큼 두만강을 건넌 그 패기와 열정을 가여우리 만큼 공포와 폭력으로 사람을 바꿔놓는 저들의 무서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 길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시간!

내 안에 영혼 사랑하는 아픈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적당히 해서 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문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먼저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빨리 가서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잃은 양들을 찾아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들지 않으면서 이웃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지는 않습니까? 내 가족이 구원받기를 원합니까? 이 부패한 한국 사회가 치료받기를 원합니까? 희생 없이 말입니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위해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들이 구원받기를 기도하는 것은 보통 큰 희생이 아닙니다. 제가 몇 사람을 놓고 시간을 내어 기도를 해보니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쁜 일과를 끝내고 피곤에 지쳐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시간인데, 몇 사람을 생각하면서 계속 엎드려 기도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만한 대가도 치르지 않고 어떻게 죽은 영혼이 살아나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는 인격적으로 멸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돈을 써야 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돈을 쓸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바쁜 세상에 중요한 약속이나 스케줄을 뒤로 미루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만나 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의 형편을 이해해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조그마한 수고 하나 하나가 희생의 제물이 되어 활활 타오르며 향기를 토할 때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그런 희생을 통하여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도 우리 자신의 그와 같은 희생을 통해서 예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계를 가슴에 품고 세계 선교를 꿈꾸었던 바울 사도, 그러나 동시에 꿈에도 잊을 수 없었던 자기의 조국, 자기의 골육, 친척, 이웃을 향한 이 애타는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 골육이, 내 친척이, 내 형제가, 내 이웃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나는 이것을 소원한다”



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우리 민족, 우리 역사, 우리 이웃에 대한 이런 구원의 부담을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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