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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약속의 땅을 향하여(7)-마라에서 엘림으로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4-03-17 | 조회: 208

약속의 땅을 향하여 - 마라에서 엘림으로  15:22-27.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사람들은 인생을 일컬어 수수께끼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잘 몰라. 크면 다 알게 돼!” 하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나이를 먹고 인생을 살다보니까 더욱 모를 것이 인생이요, 안다고 하는 그 자체가 사실은 모른다는 것을 다른 면에서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그 인생의 한 복판에서 좀 더 나은 행복을 다들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행복이 우리에게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어 표현에 ‘happiness short-lived’라는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단명하다  오래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이 경험하는 행복의 감정이 그렇다는 말일 것입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행복의 절정감을 맛본 순간이 홍해를 건널 때였을 것입니다. 죽음의 절망 앞에 섰던 그들에게 상상할 수 없었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갈라진 바다를 육지처럼 건널 때의 그 스릴과 감동이 어떠했을까요? 그리고 그 백성들이 다 그 바다를 건넜을 때 바다는 다시 닫히고 그들을 추격하던 바로의 군대는 물속에 수장되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지도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격에 겨워 노래하기 시작했고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15:2절 말씀을 보면 견딜 수 없는 감격 속에서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이런 기쁨과 감격이 계속 될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서 한평생 행복하게 살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푸른 초원이 아닌 수르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사흘 길을 걸어가게 합니다. 장정만 60만 명이니까 적어도 아내와 어린이를 합하면 족히 200만 명이 넘습니다. 광야의 사흘 길을 상상해 보셨나요? 광야에는 풀 한포기 조차 자라기 힘든 곳입니다. 가끔 광야 가운데 서 있는 유일한 나무들이 보이는데 싯딤나무입니다. 성소의 법궤를 만들 때 쓰여진 나무입니다. 광야에는 뜨거운 태양이 있습니다. 보이는 산은 모두 바위뿐입니다. 그리고 어디에도 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곳에는 독성이 강한 뱀이 있고, 전갈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홍해를 건넌 후에 이런 광야로 들어갔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하루 이틀이야 그냥 버틴다고 해도 삼일이 되도 끝없는 광야길이라면 한 마디로 황당했겠죠? 그런데 사흘 뒤에 마라라는 곳에 이릅니다. 드디어 물이 보입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모든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갑니다.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물도 없는 광야로 인도 하실리 만무하지!’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고 다시 저 푸른 초원에 그림 같은 집을 지을 기대를 가지고 물을 마십니다. 그런데 갑자기 난리가 났습니다. 물은 있는데 쓴물입니다. 마실 수 없는 독성이 강한 물입니다. 원래 마라라는 말은 쓰다(bitter)’라는 뜻입니다. 물은 마신 사람들이 복통을 일으킵니다. 여기저기서 신음소리와 함께 쓰러집니다. 기대에 찼던 백성들이 술렁입니다. 그때 인간의 마음에서 본능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원망입니다. 불평입니다. 기대가 클수록 원망과 불평은 큽니다. 왜 이런 원망과 불평이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 문제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왜 그들에게 마라의 고통을 안겨주셨는지 설명합니다. 25절에 보면 그들을 시험(test)하셨다 여기서 시험은 나쁜 길로 이끌기 위한 유혹(temptation)’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도를 가지시고, 그들을 훈련하시고자 함입니다. 시험은 왜 주어집니까? 우리가 학교 다니던 시절 시험을 즐긴 분이 계실까요? 그렇다고 시험은 필요 없다고 감이 주장할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저에게 두 가지를 동의하신 것입니다. 아무도 시험은 즐거워할 수는 없지만 시험은 필요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시험을 치고 나면 우리는 우리의 부족했던 면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부족을 보충함으로 더욱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게 되지 않습니까? 바로 이런 목적으로 마라의 시험도 주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출에굽기를 보면 이런 광야의 연단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16장에 가면 신광야에 갑니다. 먹을 것이 다 떨어집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불평합니다. 17장에 가면 르비딤에 이르렀습니다. 역시 물이 없었습니다. 또 원망합니다. 무엇을 하나님이 말씀해주시고자 하는 것입니까? 문제를 만났을 때 문제만 탓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으로부터 해결받으라는 것입니다. 마음 바꾸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살려는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방법이 없다는 마음을 하나님께 나아가면 방법이 있다는 마음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현실이 전부라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미래를 보는 마음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해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앞길에는 홍해도 있고, 마라의 쓴 물도 있고,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신광야도 있고, 반복되는 르비딤도 있습니다. 그럴 때 환경 탓만 하고 원망만 하면 망합니다. 하나님은 극단적인 상황을 통하여 우리가 바뀌길 원합니다. 사람은 극단적 상황을 만나지 않으면 잘 바뀌지 않습니다. 이미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애굽의 농경 생활에서 광야 생활로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노예에서 자유민으로, 애굽의 이방신 문화에서 하나님의 의지하는 광야문화로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마음은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도태되고 죽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40년 동안 머물게 하셨습니까? 성경을 보면 광야가 참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수르광야, 신광야, 바란광야 그리고 시내광야입니다. 다음으로 가나안 땅 안에도 광야가 있습니다. 바로 유대광야입니다. 그러면 이 광야는 어떤 곳일까요? 글자 그대로 넓고 거친 들입니다. 일반적으로 광야는 연평균 강수량이 200미리 이하입니다. 물이 없어서 가축을 기르기도 힘들고, 농사는 더더욱 힘든 곳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지 못하고 버려진 곳입니다. 게다가 길을 찾기도 힘들고, 뜨거운 태양을 견디기가 힘들고, 일교차가 커서 특별한 사람들 아니고는 여행조차도 힘든 곳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 광야는 특별한 곳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 광야를 히브리어로 미드바르’(םדבר)라고 합니다. 이 말에서  “~으로부터라는 뜻이고, ‘드바르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어로 볼 때 글자 그대로의 광야의 뜻은 말씀이 나오는 곳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의 땅이라는 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가 하나님의 말� �이 들려오는 곳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요 그래서 버려진 땅으로 생각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땅 다시 말해서 거룩한 땅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사람 살곳이 안되지만,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 하나님의 숨결이 깊이 담겨있는 은혜의 현장입니다.

 

이 광야에서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늘 원망과 불평 덩어리로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언제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까? 기대가 무너질 때입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갑자기 잃었을 때입니다. 은혜를 잊어버릴 때입니다. 신앙의 건망증 환자들이 항상 원망과 불평이 많습니다. 삼일 전에 보았던 하나님의 기적과 바로의 압제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를 금방 잃어버린 건망증 환자들은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입술에 원망이 많다는 것은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망각한 결과입니다.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감사와 찬송이 나옵니다. 조급증이 우리를 원망하게 만듭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 시간, 내� � 원하는 대로 이루어져야 우리는 만족합니다. 그런데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맛보고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함이 원망하게 만듭니다. 여기 광야의 문제 앞에 모세는

 

. 부르짖는 기도를 합니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25) 백성이 원망할 때, 모세가 한일은 부르짖는 일입니다. 마라의 쓴물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낙심하고 원망하는 길이 있고, 마라의 쓴물 앞에서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정말 원망스러운 사람은 모세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지요. 200만 대군은 모세만 바라보고 있지요. 백성들은 모세를 향해 원망합니다. 하나님 내가 가겠다고 했나요? 책임져 주신다고 하셨으니 제게라도 말씀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극단의 상황에서 다만 무릎을 꿇을 뿐입니다.

모세는 마라의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자기를 죽일 듯 달려드는 백성을 향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기서 부르짖다는 말은 영어로는 “cried out"입니다. 내 속에 있는 것을 다 쏟아 내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부르짖을 때 여호와가 우리를 고통에서 건지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부르짖을 때 그가 우리를 곤경에서 구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부르짖을 때 그가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33: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 마라의 쓴물이 단물로 바뀌는 역사를 보게 됩니다. 25-26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 본문에서 모세가 부르짖었을 때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지시하셨습니다. 나무 조각을 물에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쓴 물이 달아졌습니다. 샘이 치유된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사건이후 26절에서 자신을 치료하시는 여호와’(여호와 라파)로 계시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고통이 치유되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본문에 의하면 단순합니다. 우리가 충분히 부르짖어 기도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지금은 부르짖어 기도할 때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모든 가족들이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와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사순절 속에 경건의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순절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금식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우리가 이 기간동안 조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특히 부활절을 기다리며 한주간 우리는 고난주간을 보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기 전에 주님이 당한 심적, 육적, 영적인 모든 고난을 우리가 좀 더 기억하면서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를 가진 것이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이 남을 위해 죽으셨다면 기념할 이유가 전혀 없죠, 그러나 그가 고난당하고 죽으신 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면 365일 우리가 기념해도 절대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잘못하면 우리는 이 사순절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3제자처럼 조는 제자가 될 수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예수님의 고난을 아랑곳하지 않고 조는 자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우리는 이 기간동안 원망을 삼가고 기도속에 내 삶을 온전히 드려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인생에는 고통이 따를 수 있습니다. 인생의 노고가 있습니다. 허무가 있습니다. 슬픔이 있을 수 있지요. 그때 우리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는 고통에 직면할수록 마라가 휘몰아올수록 더욱 주께로 가까이 가야 합니다. 이 세상은 마라의 연속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마라의 자리에서 세상을 원망하고 탄식하고 있나요? 오늘 27절은 예수 안에 사는 우리에게 기막힌 은혜를 주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엘림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샘 열둘과 종려 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 이 정도면 사막의 광야에서는 환상의 오아시스라 할 만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를 떠나 남방 약 10km에 왔을 때 도달한 곳이 엘림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엘림 참나무라는 뜻입니다. 메마른 광야에 오아시스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라에서 불과 10km 남방에 위치한 이곳은 전혀 그 백성이 예측할 수 없었던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생수가 있고, 그들의 안식처가 있습니다.

 

사막에서는 물 샘 하나도 귀한데 물샘이 무려 열두 개, 그늘을 만드는 한 그루의 종려나무도 귀한데 무려 일흔 그루의 나무들, 자 이런 놀라운 오아시스가 불과 10km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전 마라에서 그들은 불평했습니다. 원망했습니다. 왜 입니까? 단순합니다. 엘림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엘림이 보이지 않아도 엘림은 우리를 위해 예비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엘림을 우리는 몰랐어도 하나님은 미리 엘림을 아시고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엘림은 마라를 통해서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마라에 주저앉아 계신 성도들이 계신가요? 조금만 참으십시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곧 우리는 엘림에 도달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제가 좋아하는 청교도들의 인사법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믿음 때문에 많은 고난을 견디고 당시의 사회 속에서 오해당하고 핍박당하고 소외당하는 고통의 삶을 견디던 시절에 그 청교도들의 인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삶이 힘드십니까? 이렇게 자신에게 외쳐 보십시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고단하게 살고 있는 이웃들이 보이십니까? 그 곁에 조용히 다가가 이렇게 말해 주시겠습니까?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 말을 오늘의 본문 식으로 바꾸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아직 엘림에 오지 않았습니다.” , 그러면 이제 일어나 다시 한번 외치고 여행을 계속하십시다.

 

우리는 아직 엘림에 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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