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땅을 향하여 (9) - 또 원망 (므리바와 맛사)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4-04-16 |
조회: 155
약속의 땅을 향하여– 또 원망하며(므리바와 맛사) (9) 출17:1-7. 2024. 4/14
사람들은 큰일을 경험하거나 목적하는 큰일을 이루고 나면 기념비를 세우려고 합니다.
그 일을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또는 누군가의 업적을 기리거나 치하하기 위해서 기념비를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기념비들이 많이 있습니다. 후일에 후손들이 ‘이 기념비가 왜 여기에 세워져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까?’하고 묻는다면, 바로 그 기념비가 세워진 이유를 설명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면 누가 기념하고 싶겠습니까?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생소한 지명이 나옵니다. ‘므리바’ 또는 ‘맛사’입니다.
7절을 보면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여기 맛사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시험하다’라는 말이고 므리바는 ‘다투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곳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여 그를 대적했기 때문에, 모세는 이곳의 이름을 ‘하나님과 다투다’라는 말로 이들의 패역함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다툼의 현장을 잊지 않기 위해 “맛사” “므리바”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맛사” “므리바”는 좋은 일로 붙여준 이름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광야를 지나 시나이반도 남쪽 호렙산 근처 르비딤에 진쳤을 때 물을 마시지 못했습니다.
물로 인해 고통을 당하자 군중들은 이제 이성을 잃어버린 이리떼처럼 폭도가 되어 모세를 돌로 치려고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당하는 이 고통에 대해 침묵하고 계신 것을 보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신가 보다."
이제는 백성들이 심판자의 자리에 서서 여호와 하나님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보면서 절망감 같은 것이 일어납니다.
사람 – 참 안 변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문제를 만날 때마다 이성을 잃고 원망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원망이 어떤 습성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만큼 나쁜지 이런 문제들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Ⅰ. 원망은 나쁜 습관에서 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가는 이 백성에게는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노예의 비참한 인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민으로 택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그 희망을 품고 광야의 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자신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어려움이 오고 힘든 상황이 있어도 견디고 인내해야 하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출애굽 직후에 경험한 홍해를 건넌 사건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눈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기적의 현장이었습니다.
그 기적의 현장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주가 되시며, 구원자가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뒤따르던 애급 사람들이 자기들 눈앞에서 수장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대신해서 싸워주시는 분이시며 어떤 상황 중에서라도 자기들을 구원해내셔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 생활을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거리가 없는 그 광야 한 가운데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서 그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또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심으로써 광야 생활 중에도 그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하셨으며, 그들의 생명을 지켜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또한 마라에서는 웅덩이에 고여 있는 쓴 물을 단물로 바꿔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갈증을 해결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출애굽이후 르비딤에 도착하게 되기까지 그들의 삶은 온통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삶이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 않고는 그들의 삶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해하기 힘든 놀라운 사실은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온 그들이 비록 지금 잠시 어려운 일이 닥쳤다고 해서 금방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향해서 원망하고 불평함으로써 결국은 이제껏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문제 앞에 누구하나 나서서 “자!! 여러분, 우리 기도합시다. 우리에겐 가나안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비전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원망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3-4절입니다.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이 사건은 하늘 양식인 만나를 먹고 난지 얼마되지 않은 시간입니다.
모세가 얼마나 다급했는지 저들을 조금만 나두면 자기에게 돌을 던지겠다는 아픔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는 광우병 사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가짜 뉴스 앞에 나라가 곧 망하는 것처럼, 유모차까지 끌고 와서 절규하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백성들의 원망하는 모습이 광야에 용광로처럼 끓고 있습니다.
원망의 원어는 '룬'인데 그 뜻은 '고집세다', '중얼거리다', '밤새워 머물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밤을 새워가며 감정을 다해 불평했음을 나타낸 것으로 보입니다.
습관이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날을 거치면서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이 습관입니다. 좋은 것도 쌓이면 습관이 되고 나쁜 것도 쌓이면 습관이 됩니다.
그중에 원망은 나쁜 습관입니다. 나쁜 습관은 내 속에 뿌리내리기 전에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히12:1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여기 ‘쓴 뿌리'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은 이 마음의 종양을 쓴 뿌리라고 부릅니다. 종양에는 양성과 악성이 있습니다.
양성인 경우 간단히 수술만 하면 되는 것도 있고, 그냥 두어도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악성입니다. 악성 종양은 급속도로 번져서 사람의 생명에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던 반석에서 물을 내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마시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의 택한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한결같은 은혜와 사랑, 긍휼과 자비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Ⅱ.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5-6
5-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여기 원망하는 백성들 앞에 하나님의 행동은 우리의 상상이나 계산을 초월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지팡이를 잡고 호렙산에 올라 ‘한 반석’을 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 반석을 치자 거기 반석에서 의외로 목이 타는 백성들이 필요로 했던 샘물이 솟 아나기 시작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날 모세가 내리친 그 반석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건을 예표 한다고 말합니다.
고전10:4절에 보면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인생들이 필요로 하는 샘물이 솟아났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샘물을 얻기 위해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은혜를 모르고 원망을 계속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땅한 대접은 지팡이요 채찍이요 심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을 치시는 대신에 반석을 치시고 반석이 쏟아 놓은 샘물을 값없이 그대로 마시게 한 것입니다.
반석에서 솟은 샘물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이 샘물이 하나님의 은총이었고,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이 아닙니까?
그런데 묻고 싶습니다. 이 반석을 친 현장을 성경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1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여기 어디다 장막을 쳤습니까? 르비딤입니다.
이 ‘르비딤’의 의미가 ‘원기회복’이나 ‘지원받음’(supports)이라는 것도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원망이 하늘을 찌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서운 폭도가 되는 이 아수라장인 그 원망의 현장에서 그들이 그토록 찾던 생수가 반석에서 터집니다.
Ⅲ. 생수의 강이 터짐
사랑하는 여러분, 목이 타는 사람들에게는 한 모금의 물도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가까스로 목을 축이는 모습을 보시는 것만으로 만족하실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르비딤에서 제공하신 샘물은 풍성한 샘물이었습니다. 호렙산 깨어진 반석에서 솟은 샘물은 한 두레박의 샘물이 아닌 르비딤 일대를 모두 적시는 강수의 물이었습니다.
그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시105:41을 보십시오. “반석을 여신 즉 물이 흘러 나와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 이제 본문의 사건의 큰 그림을 보십시오.
작은 반석에서 솟은 샘이라면 그것으로 몇 사람이나 마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강물처럼 마른 땅을 적시던 그 물로 그 많은 사람들이 해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10:10의 약속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으시나요?
“---내가 온 것은 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가장 정상적인 믿음의 행진의 도상에 약속된 인생은 풍성한 삶인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의 도상에도 고난이나 역경이 낯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당신의 자녀들의 고난은 그분의 본심이 아니라고 그는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을 향한 모든 어버이의 자연스러운 소원처럼 그는 우리가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행복의 강수를 헤엄하며 생의 찬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들의 원망소리 앞에 반석에서 생수가 터집니다.
그리고 그들은 용기백배 새 힘을 얻고 회복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은 말씀을 하십니다.
요7:37절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셨습니다.
그 우리 주님은 오늘 우리를 향하여도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환영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모두를 향하여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모습이 어떻든, 네 삶의 형편이 어떻든, 네가 어떤 자리에 있든 그 모습 그대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20세기 복음주의 지성 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금박으로 인쇄해야 할 말씀이 있다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말씀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내 모습 그대로를 주님 앞으로 가지고 나아가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풍요로 채워주십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에는 거룩한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오시면 됩니다.
단 하나 갈망하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이란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습니다.
영적인 갈급함을 느끼는 사람이 주님을 찾습니다.
세상을 향해, 자신과 이웃을 향해 원망, 불평하지 마시고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은 예수님께로 나아옵니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영혼의 갈급함을 느끼면 주님 앞으로 나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적인 갈급함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그 어디에서도 우리의 갈급한 영적 목마름을 채움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명예로도 영적인 갈급함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영혼의 메마름을 해갈시켜줄 수 없습니다.
세상의 지식은 우리에게 지적 만족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영혼의 갈급함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영혼의 갈급함을 해갈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삶의 자리에서 어떤 기념비를 세우시길 원하십니까?
언제가 우리 역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날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잘했다 칭찬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그리스도인들 답게 나그네로 사는 이땅에서 빛과 소금의 삶이 일상화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그렇게 달라집니다.
행복을 찾지 못해 불행의 나날을 살던 사람이 주님을 만남으로 원망이 사라지고 행복해집니다.
삶에 웃음을 잃어버렸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세상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이 주님을 만나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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