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땅을 향하여⑪ - 리더십 출18:21-23. 2024. 4/28
요즘에 리더십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점에 가보면 리더십에 관한 책들이 산처럼 쌓여있고, 리더십에 대한 세미나나 강좌들이 봇물 터지듯 넘쳐나고 있습니다.그 이유는 두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느 때보다도 탁월한 지도자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시대가 변화무쌍하고 예측이 불가능한 시대여서 탁월한 지도자가 나와서 앞길을 잘 인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리더십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다른 하나는 제대로 된 지도자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탁월한 지도자에 대한 바람에 비추어볼 때 현재의 지도자들에 대한 실망이 크기에 리더십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 리더십이 무엇입니까? 리더십은 두 가지 단어가 서로 결합된 것이 아닙니까? Lerder와 Ship, 이끄는 사람과 그리고 배가 함께 결합된 것입니다. 우리가 바다를 항해 할 때, 늘 순탄한 행로로 갈 수가 없습니다. 때로 엄청난 암초의 위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 앞에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흔히 '리더쉽을 가졌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리더십을 가진 자는 힘든 세상 속에서 분명한 판단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수많은 난관과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고, 목표를 향해 나갈 수있는가 하는 영향력을 가진 자입니다.
우리가 보는 말씀은 모세가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갈 때 그의 장인이 모세의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여기,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에 오르기 직전인 18장에는 아주 흥미로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그 장인 이드로를 만난 것입니다. 이곳에서 이드로는 충격적인 현장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끝도 없는 일에 메달리는 사위를 본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사람이 몇 명만 모여도 생각이 다르고, 습관이 다르고, 말이 다르지 않습니까?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는 그들로 인해 모세는 과도한 재판에 매달리게 되었고 서서히 그의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는 고갈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백성들을 재판하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이 없습니다. 이런 모든 일을 지도자 모세 혼자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모세도 지치고, 하루 종일 기다려야 하는 백성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본 이드로는 모세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Ⅰ. 리더의 위기 - 탈진이 일어날 것을 염려합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13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이튿날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고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 곁에 서 있는지라” 이때 모세의 장인이 등장합니다. 14절입니다. “모세의 장인이 모세가 백성에게 행하는 모든 일을 보고 이르되 네가 이 백성에게 행하는 이 일이 어찌 됨이냐 어찌하여 내가 홀로 앉아 있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네 곁에 서 있느냐” 그리고 18절에서 그는 정확하게 모세의 상태를 진단합니다. “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없음이라” 여기 ‘기력의 쇠함’-이것이 바로 탈진을 말합니다. 탈진을 영어로 'burnout'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 타서 없어진 상태' 말합니다. 심리학자 '크리스티나 메슬로우'는 '약이 다 달아진 건전지와 물이 다 증발한 주전자'에 비유했습니다. 이 탈진은 몸의 기력이 빠지고 마음의 극도로 쇠약해지고 영혼이 극도로 침체된 상태를 말합니다. 만약 광야 백성들의 문제를 이렇게 혼자 감당할 때 반드시 문제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독불장군’(獨不將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홀로 ‘독’(獨)에 아니 ‘불’(不) 그리고 ‘장군’(將軍)이라는 한자어로 구성되었습니다. 풀이를 해보면 ‘혼자서는 장군을 하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장군이 되려면 병졸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장군으로 지휘를 하려면 병졸들이 따라줘야 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혼자서는 할 수 없으니 협력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말이 원래의 뜻과 반대로 쓰이고 있습니다. “남의 말은 무시하고 뭐든지 제 멋대로만 행동하기 좋아하는 사람” ‘독고다이’라는 은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로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홀로 행동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독불장군이 이 독고다이라는 말과 비슷한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협력하는 일에 힘쓰라는 뜻의 독불장군이라는 말이 제멋대로 혼자 행동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 독불장군이라는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주의 일을 할 때도 독불장군으로 해서는 안 되고, 독불장군이라는 말의 원래 뜻대로 팀을 이루고 협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방치해 두면 약속의 땅에 가기도 전에 쓰러지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본문에서 진정한 리더십에 대해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사실을 만나게 됩니다.
Ⅱ.팀 사역을 위해 동역자를 세우도록 이야기합니다.
14 이하에 보면, 이제 사위가 하는 일을 쳐던 장인이 들어가 뭐라고 말합니까? 충고를 합니다. 일종의 카운셀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지혜로운 제안을 했어요. 혼자 일하지 말고 협력해서 일하라는 제안입니다. 14절에서 “어찌하여 네가 홀로 앉아 있느냐”고 묻습니다. 18절의 마지막 부분을 주목하십시다. “이 일에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모세가 200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혼자서 다 이끌고 다녔는데 얼마나 문제가 많았겠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소원을 들어주다 보니 끝이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21-22절입니다.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큰 일은 모두 네게 가져 갈 것이요 작은 일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너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에 네게 쉬우리라” 다시 말하면 중간 지도자를 세워서 일을 분담하라는 것입니다. 효율적인 일의 성취는 홀로 하는 사역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리더십 연구에서도 강조되는 것이 ‘팀 리더십’입니다. 여기 19-22절에 보면 팀리더를 세우는데 자격 요건을 제시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입니다. 21절에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첫 번째 우선 순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입니다. 삼상 2:30하반절에 보면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그렇습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주께 드리는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이것이 팀 사역의 일 순위입니다.
그리고 여기 능력을 히브리어로 "안쉐하일"인데 '유능한 사람, 능률적인 사람, 강력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덕망과 인격도 있고 사람은 좋은데 능력이 없습니다. 일을 맡겨도 능력이 없어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 반대로 능력과 일은 잘하는데 인격이 부족하고 평판이 좋이 못합니다. 일군은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비전을 제시하는 자들입니다. 20절에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선출된 이들은 끝도 없는 광야의 여정에서 오합지졸 같은 자들에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꿈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저는 오랜 세월 영적인 교제를 나누어 온 가까운 믿음의 친구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이 훌륭한 믿음의 가문 출신입니다. 아버지가 목사이거나 장로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가문이 몇 대째 믿음을 이어온 믿음의 명문 가문이었습니다. 복음의 2, 3, 4세대인 것입니다. 저는 제가 처음 예수를 믿은 복음의 1세대였기 때문에 이들 볼 때마다 참 많이 부러웠습니다. 위해서 기도해주시는 부모님과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이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보고 배워온 신앙의 기본기가 참 부러웠습니다. 게다가 이들의 반듯한 신앙인의 모습이 참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들을 통해서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여기 이 지도자 가운데는 갈렙과 여호수아 같은 분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들어오실 때 5월 가정의 달에 세미나를 열게 된 것은 우리의 가정이 사실 위기인 가정이 한둘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나이가 들어가면 여러분의 자녀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어떨 땐, 눈물이 납니다. 새벽에 엎드려 기도하는 가운데 전단지에 나온 것처럼 우리 시대에 마지막 희망은 가정입니다. 이번에 5월에 아직도 신앙생활을 아니하는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폭력과 음란과 거짓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의 가르침을 받고 진리로 무장을 받아 다음세대에 꿈을 심어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셋째, 믿음의 분량대로 사역을 맡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큰일은 모세가 직접 재판하고, 작은 일은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수 있도록 일의 경중을 나누라는 것이었습니다. 22절에 “그들로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무릇 큰 일이면 그대에게 베풀 것이고 무릇 작은 일이면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그대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그대에게 쉬우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권한의 위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리더십의 최종 목표가 무엇입니까?
Ⅲ. 사명의 완수입니다.
40세 때의 모세는 정말 화려한 이력서를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이력서를 쓴다면 앞뒤 한 장을 빽빽하게 쓴다 하더라도 종이가 모자랄 정도로 쓸 수 있는 이력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화려한 이력서를 가진 모세를 쓰시지 않았습니다. 40년이 지났습니다. 그 40년 동안 모세는 자랑스럽게 내세울만한 이력들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애굽의 왕자라는 이력서도 없습니다. 말을 잘하는 웅변술이나 수사학의 기술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젊음이라는 것도 없고, 몇 사람쯤은 거뜬하게 때려 눕힐 수 있는 무술실력도 없습니다. 나이 80세가 되어 하나님께서 모세를 쓰시고자 부르실 때 모세의 이력서에는 오직 한 줄 밖에 쓸 것이 없었습니다.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 그게 모세의 이력서 전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애굽으로 가서 고통당하고 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력서의 내용은 화려한 경력이 아닙니다. 남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이라는 이력서를 가진 사람을 쓰십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화려한 경력보다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음’이라는 이력서를 가진 사람을 쓰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나 어떤 조건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받은 은혜 앞에 자신을 온전하게 드릴 줄 아는 사람을 쓰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모세는 이처럼 험난한 광야생활을 놓고 백성들과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모세가 혼자만 구름을 타고 다닌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백성들과 똑같이 고생하면서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어쩌면 백성들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80세가 넘은 고령에, 광야에서 수백만 명의 생사를 책임져야 하는 지도자의 자리는 피를 말리는 위치였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숱한 위기를 이기고 약속의 땅으로 200만이 넘는 백성들을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모세의 리더십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민 12:3을 보면 모세의 리더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 한 마디로 모세가 발휘한 리더십은 온유한 리더십이었다는 것입니다. 온유는 어떤 성가신 일도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이런 그의 리더십은 하루 아침에 다듬어 진 것이 아닙니다. 혈기 등등한 그였지만, 하나님이 쓰실 때 자기는 말할 줄 모른다고 극구 사양하는 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장인의 말에 수용를 합니다. 24절입니다. “이에 모세가 자기 장인의 말을 듣고 그 모든 말대로 하여” 그 무엇이 무서워서 굽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보상을 바라면서 굽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수단도 아닙니다.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스스로 자기를 굽히는 마음! 이것이 온유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코로나가 끝이 났지만, 교회는 너무 큰 내상을 입었습니다. 코로나 이전의 열심과 헌신 그리고 희생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지도자의 권위가 무너졌습니다. 사람들은 사사시대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갑니다. 이번 총선을 치루면서 가슴 아픈 것은 최소한의 입법을 감당하는 자를 뽑는 자리에 법을 어기고 윤리나 도덕이 무너진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이러한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해야 합니까?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은 어떠해야 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목사만이 리더자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함께 리더자로 나가셔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마신 자들입니다. 요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당당하게 하나님을 높이고 말씀에 붙잡혀 주님 주신 달란트로 시대 앞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삶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뜨겁게 헌신합시다. 맡긴 사명을 위해 하나님의 기쁨으로 사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