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자녀 어떻게 키워야 하나? 삼상2:30. 2024. 5/5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자식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각성하도록 가르쳐줍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어린아이들 역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른들만이 아니라 아이들 역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답게 소중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요즘 다 같이 걱정하는 문제는 바로 다음세대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출산율저하는 세계 최고의 수준입니다. 1970년 한 해 동안 태어난 출생아가 100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2000년에 55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그리고 2015년에 40만을 기록한 뒤로 지금은 30만대로 주저앉았습니다. 그러니까 50년 만에 1/3로 줄어든 것입니다. 작년 한 해 출생아는 약 23만 5000천명이고, 사망자는 35만 3천여명으로 나왔습니다. 지난 2020년부터 출생자보다 사망자수가 현격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인구절벽은 앞으로 더욱 가파르게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상황은 이것보다 더 심각합니다. 다른 교단을 보지 않고 우리 교회도 교회학교 수가 정말 많이 줄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인구가 감소하게 되고, 노동력이 저하되어 국력이 쇠퇴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하나님이 주신 이 선물인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키우는 것이 중요한가를 살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한나의 가정과 엘리의 가정의 자녀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엘리의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 �느하스만큼 잘못된 자녀도 보기가 드뭅니다. 얼마나 불행한 자녀들인지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엘리는 사무엘 선지의 스승으로서, 이스라엘의 제사장으로 40년을 봉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와 그의 자녀들은 말년에 인생이 너무나 비참하고 비극적이었습니다. 두 아들은 이스라엘이 불레셋과 전쟁에서 그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한 날에 똑같이 전사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두 아들이 전쟁터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 아버지 엘리 제사장에게 들려왔습니다.
나이가 많고 비둔한 엘리는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의자에 앉아 있다가 자빠짐으로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삼상4:18). 얼마나 충격적이면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부모에게 자식이 잘못되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불행은 그것으로 또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밴 며느리가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며느리 역시 갑자기 배가 아파 아이를 낳고는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 며느리는 죽어가면서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는데, 그 뜻은 '하나님의 영광이 � ��나다'라는 뜻입니다(삼상4:21). 한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었던 가정, 그런 가정이 이제는 졸지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리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비참한 가정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이름입니다. 성경에 얼마나 훌륭하고 복된 자녀들이 많습니까? 순종의 아들 이삭, 꿈의 아들 요셉, 용기의 아들 다윗, 믿음의 아들 디모데 등 참 많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엘리의 두 아들은 가장 축복된 환경과 선택받은 반열에 서 있으면서도, 가장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장 불행한 아버지,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할 것입니까?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불행한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된 자녀로, 실패와 불행의 자녀가 아니라, 참으로 성공적인 자녀들이 다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면 "아멘!"으로 화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러면, 우리의 자녀들을 복된 자녀로, 믿음 안에서 성공적인 자녀로 어떻게 양육할 수 있습니까?
1. 먼저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본문 삼상 2:30절에 보면,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그랬습니다. 여기서 존중히 여긴다는 말씀은 “무겁게 하다. 즉 귀중히 여긴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프랑스 올림픽의 영웅인 리틀 엘릭을 위시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린 사람들이 이 시대에 별처럼 빛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의 가정은 그 누구보다 축복의 조건이 많았지만, 성경 역사를 볼 때 정말 불행한 삶으로 시대에 사라지고 맙니다. 이렇게 불행하게 된 이유가 오늘 본문 29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엘리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보다도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귀중히 여기면 자식이 더 잘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결국 엘리의 아들들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불량한 사람인지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불량자가 되어 악한 자들의 행실을 좇았습니다. 다시 13절에 보면, 하나님을 무시했고, 14절에 보면 신성한 제사 제도를 문란케 하고 다른 사람들을 실족케 하였습니다. 15절, 16절을 보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제물로 자기 배를 채웠고, 다른 사람들의 충고도 듣지 않았습니다. 17절을 보면, 제사를 멸시하였고, 22절에 보면 간음죄를 범하였으며, 24절을 보면 아비의 책망을 무시하고 백성들의 범죄를 조장하였습니다. 장차 아버지의 대를 이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해야할 막중한 위치에 있었으나 자신들의 행악으로 말미암아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선택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그 선택을 포기했습니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가문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그 명예를 버렸습니다. 삼상2:12절에서 성경은 아주 명백하게 이들을 “행실이 나빴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 다음이 어떻게 됐겠습니까? 역시 삼상2:12에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고 했습니다. 무엇입니까? 결론적인 이야기입니다. 엘리가 아버지 된 입장에서 자식들의 신앙교육에 실패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치지를 않았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교육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가르치지 않았는데 신앙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가문이 아무리 좋으면 무엇 합니까? 신앙이 없으면 망할 가문입니다. 명예가 아무리 빛나면 무엇 합니까? 신앙이 없는 명예란 허세에 불과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업신여기기까지 했습니다. 그 행위가 어찌나 악했던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같을 정도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저주를 자청하는 어리석은 짓이었는데도 이를 훈계하지도 못하고 올바르게 이끌지도 못했던 부모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 자녀 뒤에 반드시 문제 부모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부모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문제아가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문제 아버지 엘리가 있었기 때문에 패역한 일을 저지른 홉니와 비느하스가 생긴 것입니다. 엘리는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며 자식을 우상화했고, 자식을 책망하지 않고 관대하게만 대했고, 자식의 신앙교육을 소홀히 했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갈6:7절에 보십시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결국 엘리의 두 아들들은 악행을 저질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고, 가문은 완전히 몰락해버리고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아픔의 시대에 한나는
Ⅱ. 기도하는 어머니로 자식의 장래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삼상1:11절에 보면, 한나는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불임 여성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부르짖습니다. 그의 기도는 엘리 제사장이 보았을 때 술취한 여인의 모습 같았습니다.
그러나 한나의 기도는 간절했습니다. 이 기도는 불임의 아픔을 가졌던 한나의 탯문을 열게 하고 사무엘이라는 자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무엘이라는 말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셔서 태어난 아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이름을 지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꾸어놓으셨습니다. 사사로서 그리고 최초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이 역사에 별처럼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는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통해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는 한 사람이 가정을 살리고 시대를 살립니다. 기도하는 여인의 영향력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여인의 기도가 한 가정을 일으킵니다. 기도하는 어머니, 기도하는 � ��내가 자녀와 남편을 일으킵니다.
여러분, 그러면 인생을 풀어가는 게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입니까? 부모입니까? 아닙니다. 내 인생을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제아무리 잘나도 별수 없습니다. 시127:1-2절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잠16: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그러므로 기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렘33:3저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의 자녀가 탈선의 길을 갑니까? 부모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까? 포기하지 마십시오. 자녀를 위해 소망을 잃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여기 사무엘은
Ⅲ. 배운데로 삶을 살아갑니다.
삼상 12:23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말입니다. 자기는 기도하기를 쉬는 것을 죄로 여기고, 기도를 쉬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사무엘이 사사자리에서 은퇴하며 한 말입니다. 지금까지 사무엘은 영적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보기도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감당해 왔습니다. 당연히 사사요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보기도를 쉬는 것을 죄로 여기며 헌신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은퇴합니다. 더 이상 사무엘에게 백성들을 위한 중보기도는 공적인 사명이 아닙니다. 쉬어도 됩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비록 공적인 사명은 아닐 지라도 사적으로라도 백성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중보기도를 쉬는 것을 죄로 여기며 계속 헌신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할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행군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한 순간도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잠들어있지 않다면 우리가 걷는 인생길이 이와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를 쉴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묻습니다. 이런 쉬지 않는 기도를 누구한테 배웠습니까? 어머니에게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무엘은 격동하는 시대에 태어나서 그는 평생 기도의 줄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그는 무너져가는 조국 이스라엘의 사사로 선지자로 한평생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살아갔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어머니 한나의 삶을 배운데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늦게 얻은 아들이었지만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고 기도로 양육했기 때문에 나중에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구하는 민족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 한나 가정은 점점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녀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고 기도하시기 바람니다. 이것이 자녀들이 잘되는 최대의 비결이요 진정 사랑하는 자녀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녀들을 존중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셨으니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녀들로 다 양육할 수 있기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합시다. 자식의 장래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식의 장래는 기도하는 부모의 무릎에 달려 있다.” 사실 우리가 자녀들을 뒷바라지 한다고 하지만 얼마나 잘 할 수 있겠습니까? 하루 24시간 내내 할 수 있나요? 어디든지 따라다니며 할 수 있나요? 우리 인생이 짧은데 자녀의 평생을 책임져 줄 수 있나요? 어림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뒷바라지를 하고 기도의 뒷바라지를 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부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좀 부족해도 기도 뒷바라지를 잘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아무쪼록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우리 자녀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 는 부모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삼상 2:30절의 말씀을 여러분의 가정에 가훈으로 삼으면 어떨까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이처럼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우리는 그로 인하여 줄거워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어렵고 힘든 시대에 자라나는 이 땅의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