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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우리가 메뚜기입니까?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4-05-20 | 조회: 191

우리가 메뚜기입니까? 14:1-10. 2024. 5/19.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였고 나치 정권에 저항을 하다가 추방되어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가르친 폴 틸리히 교수는 경계선에서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여기에 보면 인생이란 경계선상에 서있다. 현실과 상상 사이에 서있고, 이론과 실제 사이에 서있고, 타율과 자유 사이에 서있다. 이런 경계선상에서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바른 결단을 내리도록 요구하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인생은 경계선의 삶이므로 경계선상에서 어디로 갈 것인지를 늘 결정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가 결단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게 되고, 또 그로 인해서 우리의 미래는 운명적으로 달라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청년들은 오늘 여러분이 선택한 일들이 앞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 청년의 때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리고 우리는 아울러 스승의 날을 맞습니다만, 스승 한사람이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저는 미래를 향해 나가는 길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본문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늘 그러하지만, 오늘 멧시지는 사는 게 퍽퍽하고 힘들어 하는 우리에게 어떻게 미래를 아름답게 이끌어 갈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는 너무너무 소중한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이 말씀으로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에서는 430년 동안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한 후 일어난 일입니다. 이제 그들이 가야 할 하나님의 약속 장소,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뒤에 1년여 시내 광야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기본 훈련을 받았습니다. 지난 430년 애굽에서 바로의 백성, 바로의 노예로 살던 저들이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저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행군을 명하셨습니다. 저들이 불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로 가나안 땅과 접경 지역인 가데스 바네아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정탐을 요구했습니다. 두 가지를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가나안 땅이 약속대로 복된 땅인가 하는 점과 과연 우리가 가나안 땅을 점령해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을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못해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12명의 정탐꾼을 보내게 됩니다. 정탐꾼들이 40일 간의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 보고를 했습니다. 우선 가나안 땅은 복된 땅이라는 점을 확인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점령할 수 있는 땅인가 하는 점에서 보고가 갈렸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충분히 점령할 수 있다고 한데 비해서 10명의 나머지 정탐꾼들은 불가능하다는 보고서를 발표합니다.

 13:31-33을 보면 10명의 정탐꾼이 본 것입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14:9절에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먹이()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 지금 경계선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서로 다른 보고서를 들은 백성들은 10명의 정탐꾼의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며 한밤이 맞도록 광야에서 통곡을 합니다. 지도자를 원망하고 자기들이 세운 지도자를 뽑아 다시 애굽으로 가자고 하는 폭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이 가데스바네아라고 하는 경계선에서 스스로를 자해하고 잘못된 결정을 내린 이 사건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왜 성경은 이와 같은 실패담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고린도전서 10 11절이 그 답을 줍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이 동일한 실패, 동일한 불신앙을 반복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계선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셨습니다. 너희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 전진하라. 가데스바네아의 경계선을 넘어가라!”는 분명한 비전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 비전을 이루지 못하고 경계선상에서 우물쭈물하다가 그만 뒤로 돌아가고 방황을 계속하는 실패를 겪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가데스바네아에서 두 정탐꾼이 외쳤던 그들은 우리의 먹이()이라는 이 외침을 백성들이 받아들이고 순종했다면, 저들은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안타깝고 아쉽게도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모진 광야의 고통이 시작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20세 이상 제1세대는 몽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정탐 기간 40일을 하루당 1년으로 환산해서 40년 동안 광야를 뱅글뱅글 돌게 만드셨는데, 그러는 동안 기성세대는 모두 시체가 됩니다.

 

구약 신학자 레온 우드에 의하면, 하루 평균 80명이, 시간당 7명꼴로 죽었다고 합니다. 이기간 동안 성인 남녀 120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저기서 애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겁니다. 가나안 땅의 축복에서 제외된 것도 비참한데, 날마다 슬픔과 고통으로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이 고통의 현장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왜 이들이 이처럼 메뚜기 콤플렉스에 빠져서 패배 의식과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이들의 문제이었습니까? 왜 동일한 현장을 보고 이토록 다른 보고서를 공개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랑하는 여러분! 묻습니다. 왜 같은 사건을 가지고도 이렇게 정반대의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가 있다면 도대체 그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 희망 보고서와 절망 보고서의 차이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33

절망보고서를 썼던 정탐꾼들은 현실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현실 속에서 자신들의 능력과 적들의 강함을 비교하며 살핍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들을 이기기란 불가능하다는 답만 나옵니다.????우리는 이길 수 없다. 우리가 저 땅에 들어가면 다 잡혀 죽을 수밖에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희망보고서를 썼던 사람들은 현실을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8절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르르는 땅이니라 여기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이말은 그러나 그들은 과거에 자신들을 걸어올 수 있게 했던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건을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늘 동행하심이었습니다. 그 과거의 인도하심을 생각했을 때 절망 보고서는 희망 보고서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것인지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속성상, 기질상, 자신이 정말 물위를 걸으신 예수를 믿을만한 사람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 같은 사람이 예수님 믿었다는 것 , 나 같은 사람이 오늘 술집 안가고 이 자리에 있다는 자체가 기적이다. 지금 안 졸고 지금 눈떠서 듣고 있을 수 있다는 것만도 기적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의지로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음을 고백하며 지금까지 걸어온 것이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될 때에 미래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 속에서 지금 주어진 현실만 바라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는 분들이 너무나 많을 거예요. 그러나 지금까지 걸어오게 하신 그 하나님, 나를 향한 사랑이 한 번도 변하지 않은 하나님, 세상 끝날 때까지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하나님이 오늘 나와 함께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 것처럼 내 삶을 지켜주심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오늘 내 앞의 불행과 어려움과 고통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그 믿음이 있다면 여러분의 2024년도는 희망보고서를 써내려 갈 수 있을 것입니다.

 

. 갈렙과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14:9

이 절망으로 가득차고 심지어는 지도자를 바꾸라는 함성 앞에 이 갈렙과 여호수아가 9절에 외칩니다.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어떻게 이 위기 상황 가운데 이렇게 담대하게 외칩니까? 이는 비전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비전의 유무에 따라서 보고서가 달라집니다. 전을 다른 말로 목적의식이라고 할 때 살아가는 분명한 목적과 이유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 차이가 있습니다. 비전은 하나님께서 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한 철학이 무엇입니까? 노예근성입니다. 430년 동안 그들을 지배했던 노예문화가 있었습니다. 노예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오늘만 무사히 편하게, 잘 먹고 잘 살자입니다. 그러다 보니 책임성도 없고 공동체성도 없는 것이 노예근성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을 때 자신의 처자들이 잡혀가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을 생각하며 절망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뭐라고 했습니까? ????저 땅은 우리가 정복하기 어려운 땅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셨다. 저 땅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으셨고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인 백성으로 우리를 삼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을 따라 나가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명과 비전과 꿈이 있는 희망보고서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전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을 상실했을 때, 그는 40년간 쌓아온 하나님의 귀한 사역이 한 여인에 의해서 하루아침에 다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새로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 나갔지만 그가 비전과 사명을 상실했을 때 정욕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비전을 가지고 850명과 싸워서 승리하는 정말 놀라운 일을 했지만 그 비전을 잃어버렸을 때, 그는 로뎀 나무에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는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돌아섰습니다. 바로 비전과 꿈을 잃어 버렸을 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여기 여호수아와 함께 나오는 갈렙은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도 모두가 주저 앉을 때 85세 된 갈렙이 마지막 순간까지 보여준 믿음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날의 주께서 약속하신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 아낙자손이 거하는, 젊은 사람도 가기를 두려워하는 저 땅을 내게 주소서! 단지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을 따라 결정한 갈렙의 그 모습은 공동체에 얼마나 새로운 믿음의 이정표를 세웠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큰 영광 돌리는 장소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 가운데 절망처럼 보여지는 환경 속에 있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다시 돌아보며 검토해야합니다. 절망이 가득한 것 같은 이곳은 주의 영광을 드러내고 주께서 영광 받으실 현장이 된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의 절망보고서는 희망보고서로 바뀔 수 있습니다.

 

.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리를 배워야합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준비된 사람,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아무리 그가 많은 탤런트를 가지고 있어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통해 주님 일하시지 못합니다. 결국 10명의 정탐 그리고 그들을 따라 소요에 동참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또 하나의 근본 문제는 불순종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하심 그리고 인도하심을 따라 애굽을 떠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금 하나님의 명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 이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불순종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환경이 어려워질 때 제일 먼저 걱정할 것은 환경 그 자체보다도 지속적인 순종의 여부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힘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순종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을 보세요. 그는 자신의 의지와 주장을 꺽기 위해 그가 표현한 단어는 섬뜩할 정도입니다. 고전 9:27절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 15:31절에 날마다 죽노라 왜 그렇습니까? 죄성을 가진 자신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회개 없는 봉사 회개가 없는 헌신은 순종의 자리에 서지 못합니다. 그러면 순종했나요? 이제부터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희망 보고서를 쓰는 훈련을 하십시오.

 

그러나 희망보고서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 �� 기억하십시오. 꿈은 값을 다 갖고 있습니다. 꿈을 이루려할 때에는 거기에 따른 값이 매겨져 있습니다. 어떤 꿈이든 값을 치러야 합니다.  이면 그 값이 비쌀 것입니다. 작은 이면 아마 그 값이 조금 쌀 것입니다.  꿈이 특별히 고상해서 많은 사람이 감히 가질 수 없는 그런 독특한 꿈이면 아마 그 값은 대단할 것입니다. 어떤 도 값이 없는 변화가 없습니다. 꿈은 큰데 싼값으로 그 꿈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은 꿈을 꿀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꿈에는 외상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꿈에는 것은 할인매점도 없습니다. 일단 내가 꿈을 찾았고 그 꿈을 성취하기를 원하면  의 값에 따라서 내가 희생을 치러야 되고 내가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달성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꿈이 얼마나 비싼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어떤 값을 치루든 그 값을 치루는 데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값을 치루기 위해서 어떤 희생을 강요당해도 그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값을 치를 각오를 하십시오. 그럴 때 가장 가치 있는 삶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교사 여러분, 그리고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리더십을 가진 청년 여러분, 코로나 이후로 모두가 힘들어하는 이 시대를 하나님 붙잡고 믿음으로 일어나서 복음만이 세상을 살릴 수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주신 이 말씀이 이렇게 들려집니다. 10명의 두려움에 젖은 정탐꾼이 보는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습니다.’ 이미 패배를 숙명처럼 받아들인 저들의 외침에 무슨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습니까? 지도자로 부름받은 저 10명의 정탐꾼은 결코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혼돈과 아비규환이 돼버린 그 절망의 환경 가운데 통큰 외침을 피를 토하듯 외치는 저 여호수아와 갈렙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저들은 우리의 먹이(’)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능력과 지혜도 주십니다. 여기 훗날 여호수아는 모세를 이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됩니다. 그리고 갈렙은 이 사건 이후 85세 때입니다. 가나안 전쟁 때, 헤브론 산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점령못하고 절절 맬 때입니다, 모두가 힘들어 할 때, 그는 여호수아에게 이 산지를 내게 달라고 간청합니다. 얼마나 근사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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