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우리의 마지막 희망 골3:18-21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우리는 4주 동안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세워주신 최초의 공동체입니다.
가정 형성의 주체는 남편도, 아내도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가정을 직접 세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이라는 설계도를
우리에게 맡기시고 우리로 하여금 건축가로 아름다운 집을 지어가는 행복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마치 집을 짓는 건축가의 모습으로 가정을 세우는 일에 아내
의 역활 또 남편의 역할에 대해, 부모의 역활에 대하여 더 나아가 자녀가 가정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국정원이 우리사회의 총체적 위기요인을 다섯 가지로 진단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첫째가 가정의 붕괴이고, 둘째가 도덕성의 타락이고, 셋째가 집단이기주의이고, 넷째가 경제문제이고, 그리고 다섯째가 북핵문제입니다.
이 진단에서 주목할 것은 가정의 붕괴를 첫 번째로 손꼽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가장 심각한 위기는 바로 가정의 붕괴라는 것입니다. 이 가정의
붕괴는 도덕성의 타락이나 집단이기주의 문제보다도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경제문제나 북핵문제보다도 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가정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면서 우리사회 전반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이런 가정의 위기는 일부의 가정에서만
발견되는 특수한 현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보통의 가정에서도 쉽게 발견되는 보편적 현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가정의 문제는 우리사회의 총체적 위기요소 가운데
첫 번째 문제로 부각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정도 이런 사회의 흐름에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의 가정도 태풍에 나무들이 심하게 흔들
리듯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가정들보다는 잘 견디고는 있지만 일부 그리스도인의 가정들 가운데 무너지는 가정들도 생겨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우리가정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디 훼손되거나 무너진 부분은 없는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세상 풍조 속에서 우리 가정을 잘 지켜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정을 잘 지켜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Ⅰ. 건강한 가정의 건축가는 부부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18절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말씀합니다. 먼저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단어가 나오고 남편들에게는 아내를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건축에
있어서 부부는 사랑과 복종이라는 두 기둥으로 가정의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먼저 18절에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마땅하니라" 이 복종
하라는 말씀은 원래는 군사용어였다고 합니다. 상관의 통치권 아래 있는 하급 군사들이 상관의 명령에 복종할 때 쓰는 단어였다는 것입니다. 군대에서는 상관이라는 지위 때문에
그 아래에 있는 군사들은 그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성차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가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다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은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동등한 인격과 권리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세상엔 남자보다 뛰어 난 여자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남자보다 훌륭한 지성과 덕을 갖춘 여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은 가정의 질서를 위하여 남자를 세우셨습니다. 주안에서 마땅한 질서의 원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엡5:22절에 보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 시니라"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 같이 하나님께서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세워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이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왜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합니까? 교회라는 말을 조금 좁혀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왜 주님께 복종해야 합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고, 그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가 기쁨과 감사함으로 그리스도에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에도 그 구원의 감격이 없으면 내 힘으로 하려 하기 때문에 힘이 들고, 힘들기 때문에 불평하기 쉽습니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없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은 기쁨과 감격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도 기쁨과 감격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군대에서는
상관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기쁨과 감격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평도 나오고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그래도 명령체계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불평스러워도,
짜증이 나더라도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부관계는 그렇게 않습니다. 기쁨과 감격으로 관계가 맺어졌고, 강요가 아니라 기쁨으로 순종하는 관계가 부부관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지금도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으로 인정하듯이, 아내들도 남편에게 주신 권위를 인정하고 남편을 존중합니다. 그게 성경에서 말하는 아내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남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19절에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여기 아내를 사랑하라는 이 사랑은 아카페의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내 기준에 따라 내 요구에 따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랑은 자신을 부정하고 보상을 원하지 않는 철저한 희생적 사랑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할 때에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남편의 권위를 인정해 줄 때에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하셨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배신하고 등을 돌려 떠날지라도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마음 아픈 사랑입니다. 때로는 당신의 백성이 사랑을 거부할지라도 사랑하신 짝사랑이기도 합니다. 그럴지라도 끝까지 포기
하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그게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 사랑은 교회나 당신의 백성들이 실수하거나 모자람이 있어도 책망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시고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실수하고 부족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를 인정하고 격려하며 다시금 힘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랑입니다. 아내를 향한 남편의 사랑도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족한 모습이 보이더라도, 혹은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바람을 채워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때로는 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책망하거나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려하고 사랑으로 세워줘야 합니다. 그래서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이어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씀을 덧붙여놓았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아내에게 모질게
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 어려운 것이 부부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는 혈연관계이기 때문에 헤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남이 만나 함께 사는 부부는 혈연관계가 아닙니다.
언약 관계입니다. 이 기둥이 잘 견딜수 있도록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세워야 합니다. 보세요. 이 기둥이 흔들리거나 무너지면 그 가정은 희망이 없습니다. 언약관계는
부모 자식 관계처럼 자연스레 되지 않습니다. 쌍방 간에 많은 노력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Ⅱ. 건강한 가정의 건축은 부모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21절에 보십시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여기서 '격노한다'는 말은 '배가 항해를 하는데 바람을 없앤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람이 없으면
배는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녀를 노엽게 하고 격노케 하는 것은 더 이상 배가 항해할 수있는 힘을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기를 꺾어버리고 용기를 꺾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젊은이 세대를 가르쳐 ‘성난 세대’(angry generation)라고 표현한 작가가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날 성난 세대를 만든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의 자녀들이 그렇게 성난 상태에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다양한 원인들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원인들을 지적할 수 있다면 저는세 가지 1)방임과
2)과잉 보호, 3)과잉 징계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우리 가정의 자녀들이 거의 방임상태에 버림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언제 여러분의 자녀들과 진지하게 시간을 함께 보내고 인생을 이야기해 보셨나요? 방임 못지않게
나쁜 것이 과잉보호입니다. 과잉보호의 뿌리는 불신입니다. 자녀들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런 자녀의 눈에 보이는 부모는 자애로운 보호자
가 아닌 자신의 인격성을 부정하는 폭군인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자식은 결코 우리의 꼭두각시가 아닙니다. 집안의 분재처럼 키워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재능과 성품에 맞게 양육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에게도 가정이 행복의 자리가 됩니다. 분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저는 분재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작은 나무를 멋진 나무로 만들면 참 보기가 좋습니다.
작은 나무 하나가 얼마나 그렇게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분재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나무를 너무 인위적으로 만든다는 것 때문입니다. 곧게 뻗어야 할 가지를 비틀어
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라게 만듭니다. 자라고 싶어도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저는 그런 분재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 시대의 부모들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자기 자식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성향이나 성품이나 재능대로 키우지 않고 부모가
부모의 시각으로 자녀를 이리 꺾고 저리 꺾고 휘어 자기의 작품을 만들려고 합니다. 곧게 자랄 나뭇가지를 꺾고 휘는 것처럼 자녀를 그렇게 양육한다면 그 자식의 마음이 어떨지 우리
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란 자녀가 그 가정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부모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과잉징계는 결정적으로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원인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징계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과잉징계를 경계합니다. 그것은 자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잃는 것입니다. 성난 자녀를 만들지 않으려면 어떤 경우에도 부모는 성난 상태에서 자녀들을 나무라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의 감정이 통제 안 된 상태에서의 어떤 이야기도
그것은 자녀들에게 부모의 교육이 아닌 폭력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자녀 양육의 출발점은 부모 자신의 감정의 통제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자
녀들을 향한 속상한 마음들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특히 아름다운 건축가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이 불신시대에 우리 가정이 살고 우리 자녀들이 살아남는 길은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길밖
에 없습니다. 각 가정마다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정이 파괴되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시 127:1,2절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라고 고백한 솔로몬의
고백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가정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가정을 가정답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가정을 행복하게 해주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Ⅲ. 건강한 가정의 건축은 자녀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에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여기 자녀들에게 말씀합니다.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모든 일에”라는 말씀은
엡6:1절에 ’주안에서‘라고 말씀을 합니다. 이는 그 말씀이 주 안에서 하시는 말씀일 때 비록 그 말씀이 나에게 불리한 것 같고 실천하기 싫고 힘 드는 말씀이라고 해도 그 말씀에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유대 탈무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물레를 돌리게 해도 효도일 수 있고, 잔칫상을 차려 드려도 불효일 수 있다.” 부모님께 물레를 돌리게 해드린다고 해도 그것이 효도일 수 있고,
부모님께 잔칫상을 차려드린다고 해도 불효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효처럼 보여도 부모님께 일거리를 드리는 것이 효도일 수 있고, 효도처럼 보여도 잔치를 차려드리
는 것이 불효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주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바로 효도의 기준이 부모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식들이 자기들 생각에 최선을 다해서 효도
한다고 해도, 부모님께서 효도로 받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결코 효도일 수 없습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자식이 부모님께 하는 일이 불효처럼 보인다고 해도, 부모님께서 효도로 받으신다
면 그것은 효도일 수 있습니다.
언제나 최선의 것으로 주고 싶어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다 해 주면서도 늘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재미교포 가운데 상원의원 신호범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네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떠돌아다니며 거지 생활을 하다가 다행히 미군부대
하우스보이가 됩니다. 그 후 미군 장교 집에 입양되어 미국으로 갑니다. 그때 나이가 19세였습니다. 입양될 수 없는 나이였는데, 하나님의 기적이었죠. 공부를 한 적도 없었던 그가
영어로 공부를 시작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박사가 되고, 대학 교수가 됩니다. 그리고 워싱턴州 상원의원이 됩니다. 출세한 것이죠. 한국에 방문하는 기회가 여러 번 생기면서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왜 자기를 버렸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수소문해서 찾아갔더니 판자집 같은 데서 새 어머니와 이복 동생 5명이 가난하게 삽니다.
그런데 찾아갈 때마다 아버지가 술이 취해 계십니다. 대화가 안 됩니다. 그래서 한번은 연락도 하지 않고 급습하듯 찾아갑니다. 맨정신이지만 아버지가 돌아앉아서 말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대뜸 물었습니다.????왜 그때 나를 버렸습니까????? 그러자 아버지가 더듬거리며 이렇게 대답합니다.????자기 핏줄을 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때 나는 머슴으로 팔려갔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나오면서 가슴에 맺혔던 상처가 치유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에게 최선의 것을 주길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7:9-10절에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이러면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5월 가정의 달을 보내면서 지금 우리의 가정이 얼마나 행복한지 느껴보셨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설계도대로 우리가 건축가가 되어서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만들고 창을 내서 우리
가정이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인 우리가 오늘 바로 그 가정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