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땅을 향하여 – 십계명,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인가?⑬ 출 20:1-2
근자에 자주 듣게 되는 시사용어 가운데 ‘프레임’(Fram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끔 사진을 찍는 분들이나 풍경화를 그리는 분들이 양손 엄지와 검지로 사각 창을 만들어 사진 찍을 대상이나 그림 그릴 풍광을 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창에 사진이나 그림을 담아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이 손으로 만든 창을 프레임이라고 합니다. 사회과학에서 이 용어를 차용해서 사용해 왔습니다. 사람이 어떤 사물과 현상을 바라볼 때도 각각 개개인이 저마다 보이지 않는 이런 창을 통해서 바라보고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창이 사람이 사물과 현상을 해석하는 인식체계인데, 이것을 프레임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좋기도 하지만, 문제는 자기 관점에서 해석을 하기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기독교 철학자로서 스위스에서 라브리 공동체를 섬겼던 프랜시스 쉐이퍼 박사가 있습니다. 이분이 현대인들이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동안에 ‘절망의 선’을 넘어섰다고 했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위험한 변화가 19세기에서 20세기 넘어갈 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19세기만 해도 그가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우리 모두는 공유할 수 있는 절대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 중에 5계명이하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를 말하면 믿지 않는 분들도 “그것 맞는 말이다”고 동의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20세기 소위 포스트 모던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그런 절대적 가치관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기준이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절대적 진리로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절대’라는 단어를 싫어합니다. 절대라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화는 "너 자신을 믿고, 네가 옳다고 하면 네가 옳다. 너의 감정에 충실하라! 믿을 것은 너밖에 없다."고 합니다. 개성이 강조되는 세상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봄에 겨울옷을 입든, 가을 옷을 입든, 속옷을 겉에 입든, 아내를 남자로 하든 취향이라는 것입니다. 동성애도 취향이라고 합니다. 성적기호, 개인의 기호라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를 방종의 시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사기가 그랬습니다. 사사기의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사사기의 key 구절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기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십계명을 주셨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이 십계명과 우리의 관계를 설정하는 토대를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애굽에서 이교도의 문화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새로운 백성들이 되었지만 이전의 애굽에서 살 때 삶의 기준과 방식을 버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새로운 기준, 새로운 삶의 방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특히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들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백성은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거룩한 백성답게 살 길을 알려주시기 위해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을 지켜야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저들은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거룩한 백성이라고 여김을 받았습니다. 저들은 값없이 공로 없이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거룩한 백성이라고 여김을 받았습니다. 이제 감사한 마음으로 감격한 마음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지켜가야 할 것이 바로 십계명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과 다름이 없습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값없이 공로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구원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십계명은 이런 우리에게 길을 안내해 주는 지침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십계명은 은혜인 것입니다. 이 십계명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확신과 믿음을 줍니다. 시119:92절을 보면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의 법이 즐거움이 되지 않았다면 나는 망하였을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시편 119편 165절에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리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입니다. 인생에 큰 평안을 하나님이 주시는데 누구에게 주시는가하면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앞에 큰 장애물이 있을때 우리는 근심하며 염려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다 없애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공부하는 것을 축복으로 여겨야합니다.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인가? 주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시1:1-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십계명을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셨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세 가지 대답을 하고자 합니다.
I. 십계명은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 십계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롬3: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죄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롬7장 7절에도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나를 보는 거울입니다.
‘탐심하지 말라’했기 때문에 탐심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요일3:4절에도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했습니다. ‘불법을 행한다’는 것은 ‘Break the Law’(법을 거역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엇이 죄냐하면 십계명을 거역하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II. 십계명은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십계명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얻고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롬7:14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의 노예이기 때문에 아무리 십계명을 지키고자 해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존 칼빈은 칼빈주의 5대교리를 말하면서 첫 번째가 ‘인간의 전적 무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전적 타락’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전적 무능력’인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십계명을 지켜서 의를 이루어 영생을 얻을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19절에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망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모두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십계명을 보고 선을 행하고자 해도 도리어 악을 행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전적무능력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가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III. 십계명은 인간에게 ‘구주’가 필요함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인 것입니다.
갈3:24절에 “율법이 이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몽학선생)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초등교사(몽학선생)’라는 것은 로마 시대 귀족들의 가정교사입니다. 주로 로마가 다른 나라를 점령했을 때 그 나라의 지식인들을 포로로 잡아 와서 자기 아이들의 가정교사로 삼습니다. ‘초등교사(몽학선생)’의 유효기간은 아이가 여섯 살부터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있습니다. 이기간 동안 아이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아이가 열여섯 살이 넘으면 몽학선생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몽학선생)라는 뜻은 율법을 통해서는 사람이 의롭게 될 수도 없고 구원을 얻을 수도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구원의 길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율법은 나로 하여금 오직 믿으으로 살 수 있는 길이 예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십계명을 더 간단하게 두 가지로 축약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마 22:37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10계명을 더 줄여서 2계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계명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내리신, 반드시 지켜야 할 규정이나 명령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계명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고 명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리는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양자로 삼아서 사랑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분이 어떻게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할 뿐 아니라 아들로 삼을 수 있었을까요? 이분이 아들 죽인 원수를 양자 삼으려 할 때 가족들이 다 반대했습니다. 특히 딸이 그렇게 반대했습니다. 이분이 딸을 설득하며 한 말이 전해집니다.
“아버지는 성경말씀 중에 우상숭배하지 말란 십계명 하나 지키려고, 일본 사람들로부터 온갖 핍박을 받으며 5년 동안 그 차가운 감방에서 꿋꿋이 견뎠다는 걸 너두 알고 있겠지? 성경말씀에는 원수를 네 몸처럼 사랑하란 말씀이 있다. 네 오빠를 죽인 그자는 원수다. 하지만 그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주님은 가르치고 계시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으면,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도 지켜야 할 게 아니니?
하나는 지키고, 하나는 안 지키면? 그건 말이 안 되잖니? 원수를 일곱 번, 아니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하시며, 사랑으로 회개시키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자가 제 죄를 뉘우치지 않고 죽으면 지옥 가겠지? 지옥 가는 걸 알면서 목사가 구해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뭐라 하시겠니? 지옥 가는 건 막아 줘야지.” 그렇습니다. 사랑이 계명이라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내키지 않고, 때로는 도저히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참 사랑입니다.
우선 십계명의 기본 정신은 사랑이라는 점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라는 점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라는 점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넷,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입니다.
둘째,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음 여섯 가지를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다섯,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여섯, 살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곱, 간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덟,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홉,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계명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계명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계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사랑하고, 자기를 희생하며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을 사랑할 때 내 인생이 달라집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를 변화시키는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 영혼을 소생케 합니다. 구원을 받는 것 뿐 아니라 구원받은 영혼이 지쳐 쓰러져 있을 때 다시 일으켜 주는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 목적을 상실하여 자포자기한 사람들, 그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왜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방황자들에게 새 생명과 삶의 의미를 일으켜 줍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주의 말씀이 제시해 줍니다. 분별력이 생기고 그것을 선택할 능력이 있습니다. 또 말씀 안에 인생 행복에 대한 비밀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말씀 없이는 기쁨도, 행복도 없습니다. 말씀을 등지는 순간 우리는 죄의 길에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실패는 말씀을 등지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 사상이나 이론이 아무리 훌륭해도 말씀을 등진 철학과 사상은 불순물이 끼어 있기 때문에 결코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부도수표를 내지 않으시는 완벽하신 주님께서 그들의 삶을 보장해 주십니다.
연길에서 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명동촌을 방문했다. 동쪽의 조국을 밝히겠다는 의미로 명동이라 했다. 유적지에 들어서자 김약연 촌장의 반신상을 만났다. 함경도에서 건너와 5만평을 구입하고 집단촌을 만들었다. 명동 학교를 세우면서 젊은 24세 정재명 교사를 초대했다. 그러나 정재명 교사는 성경 공부를 하고 예배를 드리게 한다면 오겠다고 했다. 당시 유교를 신봉하던 김약연 촌장은 몇날 몇일을 고민 하다가 허락을 하였다. 연변 최초의 애국 명동학교가 세워졌다. 윤동주를 비롯해서 수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김약연 촌장이 예수쟁이가 되었다.
그리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인재 양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의미 있는 말을 남기면서 애국 애족의 큰 족적을 남기었다.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 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야 겠다...."
일본 큐슈에 있는 후쿠오카 형무소에 있을때, 그분의 감옥생활을 묘사한 형무소 일기가 있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윤동주는 고향집에 편지하여 차입한 신약성경을 옥중에서 읽고 있다. 그는 날마다 이 책에 빠져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는 몸이 점점 쇠약해 지는 가운데서도 조국의 미래가 희망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말씀을 통해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을 진단해 볼 때 어느 한때에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빠져본 일이 있는가? 이 약속의 땅을 향하는 언약의 백성에게 지침서인 십계명을 가지고 광야와 세상 앞에 믿음을 가지고 살 때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이 은혜가 가득하시길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