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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약속의 땅을 향하여(14) - 성막-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4-07-01 | 조회: 242

약속의 땅을 향하여  성막 . 40:34-38. 2024. 6/30

 

국가적으로 호국 보훈의 달인 6월의 마지막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의 비극이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전쟁으러 인한 상처나 후유증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세계사에 보면 가장 잔인한 전쟁 중에 하나가 2차 세계대전 중에 히틀러의 명을 받은 독일군들은 유대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전쟁입니다. 처음에는 유대인을 학살하라는 명을 받은 독일군 가운데 주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몇 사람을 학살한 뒤에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독일군들도 많았습니다.

 

독일 군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3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수용되어있는 포로수용소에 화장실을 하나만 남기고 없앴습니다. 처음에 유대인들은 화장실 앞에서 길게 줄을 섰습니다. 급한 사람들이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아귀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다 견디지 못하고 아무데나 일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수용소 곳곳은 배설물로 넘쳐났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고, 배설물과 뒤엉켜 살아가면서 짐승처럼 변해갔습니다. 하나씩 둘씩 인간다움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독일군들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유대인을 죽이면서 한결 양심의 가책이 덜했습니다. 살인을 하면서도 과거처럼 그렇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서서히 유대인이 사람이 아닌 짐승으로 보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부질없어 보이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매일 오후 4시 반에 유대인 포로들에게 따뜻한 물 한 컵씩이 배급되었습니다. 이 때 일부 유대인들은 물을 남겨서 이를 닦았고, 세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깨진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던 것입니다. 독일군 눈에 이들은 특별하게 보였습니다.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이들을 함부로 학살하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노력을 한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인간다움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인격의 고상함을 저버리면 안 됩니다. 그래야 내 스스로도 인간다운 삶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고, 남들에게도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을 살면서 그리스도인다움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사람들로부터도 그리스도인으로 존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약속의 땅을 향하여라는 주제로 출애굽 여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적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고 잠자고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습니다. 가장 긴급한 문제는 애굽에서 가지고 있던 꼬리표를 떼는 일이었습니다. 노예근성 말입니다. 부정적이고 패배주의에 찌든 의식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야 위대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노예가 아니라 나의 소유이다. 너는 애굽인의 종, 마귀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이다. 너는 존귀한 존재이다. 너는 가치있는 보물이다. 너는 가난을 정복할 위대한 정복자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선하고 완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민은 그 율법을 모두 지킬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 말씀을 다 지킬 수 있다면 고민할 것이 없습니다. 누리면 됩니다. 그 말씀은 나에게 지혜를 주고 나를 정결케하고 나를 영원까지 이르게 하는 축복을 줍니다. 그렇지만 율법은 내가 죄인인 것과 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함으로 나를 고통 속으로 빠뜨리게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만 주셨다면 희망이 없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만 가지고 내려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희망이 없습니다.

만약 모세가 율법만 가지고 내려왔으면 저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나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저주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또 하나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네가 이것을 가지고 내려가라." "이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모세에게 장막의 설계도를 주셨습니다. 이 장막의 멧세지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 장소입니다. 34-35

34-35절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여호와의 영광 성막에 충만했습니다. 영광이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무겁다라는 뜻에서 온 말입니다. 이것은 구속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백성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진영 한복판에 놓여진 성막, 여기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백성의 삶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을 통치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역사 속에서 구원과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막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습니다. 장막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하나님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거할 처소를 지어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장소를 지으라는 것입니다. 또한 장막을 회막(tent of meeting)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25:22절을 보십시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이 장막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어둠이 빛과 함께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그들을 용서하시고 인간과 만날 수 있는 만남의 장소를 준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그 생명이 코의 호흡에 붙어있는 하루살이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중에 죄인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원수의 자리에 있던 자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사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시고, 그 위에서 살으신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를 말끔히 씻어 주셨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죄사함의 은총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름을 지으시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앞으로 주의 영원한 나라에 면류관의 주인공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우리가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지도자 모세도 성막에 들어가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1: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할렐루야!!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 영광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초림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하시매라는 동사를 썼습니다.

 

여기  거하신다는 말은 구약에 장막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장막안에 있다가 바로 우리 가운데 처소를 옮기셨다는 말입니다. 바로 우리가 성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전6:19절에 보면 너희 몸을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6:20절을 보십시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무슨 말입니까? 이제 이 영광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품격이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고전 가운데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중세의 대표적 성인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로렌스 형제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면서 깨달은 영적인 통찰을 모은 책입니다. 그가 깨달은 영적인 통찰의 핵심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비록 수도원에서 접시를 닦으면서 살지만, 그 일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일이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가 쉰 살이 되었을 때, 거룩한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파리에 있는 카르멜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수도원에서 그에게 주어졌던 일은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행동이 굼뜨고 느려서 일을 못했고, 모든 일이 힘들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언제가 부터 그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자기가 주방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는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후라이팬의 작은 계란 하나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는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방바닥에서 티끌 하나를 주어올리는 것만으로 족하다.” 그렇습니다. 이 로렌스 형제는 기도의 자리 그리고 예배의 자리에서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삶의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려 힘썼습니다. 그리고 일상의 모든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려고 힘썼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를 힘썼습니다. 여기 약속의 땅을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 언약 백성들은 성막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36-37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 오르지 아니할 때에는 떠오르는 말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성막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은 이제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동행이 시작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구체적인 삶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어떻게 죄많은 인간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을까요? 너무나 간단한 방법입니다. 구름이 움직이면 이스라엘이 움직이고 구름이 움직이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꼼짝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무리 그 자리에 있고 싶어도 구름이 움직이면 그들은 장막을 걷어야만 했습니다. 반대로 그들이 아무리 더 가고 싶어도 구름 움직이지 않으면 그들은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이것을 그들은 배워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군할 때에 40년을 살았는데, 텐트를 치고 살았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지만, 하나의 공동체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성막도 일종의 텐트입니다. 그런데 성막은 백성들의 진영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성막 가장 가까운 곳에 레위 지파가 있었고, 동남서북으로 세 개 지파씩 흩어져 텐트를 치고 머물렀습니다. 동쪽에는 유다, 잇사갈, 스불론 지파, 남쪽에는 르우벤, 시므온, 갓 지파, 서쪽에는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 북쪽에는 , 납달리, 아셀 지파입니다. 열두 지파가 성막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정착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동할 때는 어떻게 행군했을까요? 맨 앞에 법궤가 있고, 동남서북 순으로 행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운데는 고핫 자손들이 지성소의 기구들을 어깨에 메고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거쳐 광야를 지나는 모습을 보십시오. 저들은 이제 노예근성으로 찌들은 인생들이 아닙니다. 비록 앞으로 실수 할 수 있습니다. 실패도 있습니. 그러나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는 그들의 가는 길을 이끌어 가십니다.

 

. 광야를 넘어 가나안 땅으로 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여기 행진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앞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주의 은혜와 능력을 붙잡고 성령의 인도로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우리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비전이 있습니다. 꿈이 있어야 진짜 인생이 시작됩니다. 꿈이 없는 인생은 참다운 인생이 아닙니다. 꿈을 내 인생에, 우리 자녀의 인생에 심어 줄 수 없다면 그것은 불행한 인생입니다. GE그룹 회장인 잭 웰치의 성공 경영 원칙 중에 기업가는 자신의 '열차'에 탄 사원들에게 종착역에 꿈이 있음을 확신시켜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 동성 교회도 자신과 자녀들과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 꿈이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것도 거대한 꿈이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예배자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향해 이제 후반기를 나가야 합니다. 나를 보지마세요. 환경을 보지 마시고 내게 능력 주시는 주님을 보고 꿈을 크게 가지십시오. 꿈이 없는 인생은 부실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윈스턴 처칠이 영국 총리로 재직할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가장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그에게 한 기자가 찾아와 히틀러의 나치 정부에 대항해 싸우는 영국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영국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희망입니다." 희망이 무엇입니까? 희망은 곧 꿈이고 비전입니다. 비전과 희망과 꿈이 있는 한 새롭게 일어설 수 있습니다. 희망과 비전만 있다면 기꺼이 전장에서 목숨을 다해 싸울 수도 있습니다. 비전은 새로운 힘을 가져다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전은 대가를 지불해야 이루어집니다. 나는 우리 동성교회가 하나님의 비전 센터가 되기를 바랍니다. 1:3절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놀라운 비전은 분명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땅을 밟는 일은 우리 자신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밟아야 너희 것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밟는 곳은 주시지만 내가 밟지 않으면 주시지 않습니다. 내 땅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거대한 비전의 두 번째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비전은 밟는 수고가 없다면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밟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거대한 비전은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밟지 않고도 내 것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비전이 아닙니다. 가짜입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하나님의 비전은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이제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나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반드시 승리케 하는 그 하나님을 붙잡고 남은 후반기를 달려가야 하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우리에게 감사의 마음, 감사의 신앙이 상실되었다면 다시 한번 회복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늘 감사하는 신앙으로 늘 행복한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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