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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약속의 땅을 향하여(16)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4-07-14 | 조회: 176

약속의 땅을 향하여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34:1-8. 2024. 7/14

 

한때 장면 총리를 저격하고 사형 언도를 받은 분이 목사가 되어 정년이 되어 은퇴하실 때 자신 안에서 겪었던 갈등에 대해 겪었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는 정치깡패인 이화수, 유지광, 이정재, 그리고 북쪽 노선을 걸었던 조봉암 같은 사람들과 같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얼마후 이들은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그는 그곳에 함께 사형수로 수감되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출소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계천에서 개척을 하다가 청계천 개발로 난지도로 빈민들과 함께 이사해서 28년간 사역하는 가운데 정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하던 사역을 놓게 된다고 생각하니 며칠 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 그의 외동딸이 아버지 옆으로 조심스럽게 와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두었다고 합니다. 아빠,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무대에 있을 때보다 무대에서 내려올 때야!” 그러나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 누구보다 인생을 한 길에만 쏟은 사람들일수록 더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내려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겪어보지 않고는 실감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느보산까지 인도한 후 말씀을 하십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 편 비스가 산 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땅을 단(이스라엘 최북단)까지 보이시고 지금 모세는 가슴이 벅차 오르는 감개무량한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이 120, 백발에 흰 수염을 날리며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서 있습니다. 지난 40년 간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던 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있습니다. 이제 저 요단강만 건너면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모세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 안타까운 일 아닙니까? 참으로 곤혹스러운 장면입니다. 여러분, 가나안은 모세가 한평생을 다 바쳐 사모해 온 땅입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이 걸려 있는 축복의 땅입니다. 그래서 온갖 시련과 역경에 굴하지 않고 꿈꾸어 왔던 땅입니다. 그렇게 갈망하던 가나안 목전까지 도달합니다. 마침내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회가 서렸겠습니까?

 

그런 그에게 4절에 청천벽력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참 이해하기 힘든 말이 아닙니까? 모세는 가나안에 1등으로 들어가야 할 사람이 아닙니까? 훈장 주고 들어가야 하지 않습니까? 모세처럼 하나님께 충성한 자가 어디있겠습니까? 좀 심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토사구팽하셨다하지 않겠습니까? 잘 부려 먹으시더니 나중에 모세를 내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라고 하더래도 그토록 들어가고 싶은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너는 가지 못한다 할 때 얼마나 상처가 크겠습니까?

 

물론 그는 백성들이 말을 듣지 않자 한때 한 순간의 결정적인 혈기, 반석을 두 번이나 지팡이로 때린 그 실수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얼마나 후회하였겠습니까. 우리는 살면서 이보다 더한 실수도 하지 않습니까? 아마 화병이라도 날법하고 심한 우울증에 걸릴만도 한데 모세는 왜 이러십니까? 따지지를 않습니다. 그대로 순종합니다.

 

. 바라봄의 법칙 1-3

비스가산에서 올라온 모세앞에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의 평생에 꿈이 산산조각이 나는 현장이 아닙니까?. 모세에게 있어서 유일한 꿈은 무엇이었을까요? 가나안을 빼고 그의 꿈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는 120년 일생을 오직 가나안이라는 꿈만을 꾸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하나님께서 그를 산 정상에 올려놓고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땅은 네가 들어갈 땅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때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아니 들어가지도 못할 땅을 뭐하러 보여 주십니까? 누구 약이 올라 죽는 꼴을 보고싶어서 이러십니까?'라고 대뜸 불평을 늘어놓고 야단을 했을 거예요.

 

그러나 모세의 행동을 눈여겨보십시오. 본문 1, 2, 3절 말씀에 보면 동일한 단어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시매', '보이시니'라고 단어입니다. 이 약속의 땅은 반드시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차지할 땅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27절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라 그리고 너의 역할은 여기까지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이미 들었습니다. 자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가나안 땅 앞에 와 보니 정말 그 땅에 들어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3:25절에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요단 강을 건너가서 가나안 땅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그 땅에 들어가 살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다만 그 땅을 밟아 만이라도 보게 해 달라는 것이고, 죽더라도 그 땅을 한 번 보고 죽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정말 인간적인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알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소원이 너무 간절하기에 하나님께 다시 기도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3:26절 하반 절에 그만해도 족하니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하니 하나님께 모세가 간청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인간적으로 볼 때 모세의 마음이 서운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하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 같으면 그렇게 투정을 부렸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그토록 고생하고, 죽도록 충성했는데 그래 다른 것도 아니고 목표로 삼고 백성들을 인도해 온 가나안 땅을 밟아 만이라도 보자는 데 그것 하나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거절하셨을까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표면적인 이유입니다.
모세의 사명이 가나안 땅 진입 전까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후는 여호수아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대상 22장을 보면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해 준비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윗의 성전 건축에 대한 준비는 정말 눈물겨운 것이었습니다. 설계를 마쳤습니다. 자기 전 재산을 털어서 건축비용을 마련했습니다. 전문가들을 시켜 최상의 건축 자재들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전을 건축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사명을 아들 솔로몬에게 넘겼습니다. 대상 22:8-8을 보면 서운한 마음에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 즉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다윗은 아쉽지만 자기의 사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깨끗하게 아들 솔로몬에게 바톤을 넘겼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도 아쉽지만 바톤을 여호수아에게 넘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사명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해야 할 일을 잘 알아서 최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해서는 안 될 일을 알아서 하고 싶어도 물러서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때를 알고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를 알고 물러서는 것도 중요합니다.

둘째는 내면적인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이지 않은 또 다른 숨겨진 이유가 있습니다. 내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모세를 지켜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신약에 바울을 아실 것입니다.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주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그의 기도는 거의 대부분 교회를 위한 기도요, 선교를 위한 기도요, 주님의 사역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을 위한 기도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후 12장에 보면 바울은 자신을 위한 기도 이야기를 적어 놓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거절 당한 이야기입니다. 무슨 병인지는 정확치 않지만 몸에 병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병 낫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너무도 차가웠습니다. 고후 12:9을 보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병을 고쳐주시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문제로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바울은 무척 서운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명분도 있습니다. 건강해야 더욱 힘있게 주의 사역을 감당할 것 아닙니까? 병으로 고생하면 사역하는데도 지장이 있고 교회에도 큰짐이 되니까 주를 위해서라도 병을 고쳐달라고 떼를 쓸만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깨달았습니다. 고후 12:7을 보면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이 병을 몸에 가시로 두게 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병마저 낫게 하시면 자기가 너무 교만해 져서 하나님 의지하기보다는 자기 능력을 의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시조차도 은혜로 받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아마 모세가 가나안까지 백성들을 인도해서 들였다면 모세는 내가 시작하고 내가 마쳤다고 자기의 공적을 드러내고자 했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모세를 섬기려고 덤벼들었을지 모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정말 큰 시험에 들 가능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은혜가 족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더 받아서 더 누려서 오히려 해가 되는 사람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적당하게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실패도 은혜요, 거절도 은혜요, 그만 쉬는 것도 은혜요, 나아가 이제 죽어 편히 쉬는 것도 은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세는 홀로 그 산 위에 올라 한없이 울었을 것입니다. 한 편으로 가나안 땅을 지척에 두고 밟아보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함이 은혜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자기의 사명임을 깨닫고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요단 강을 건너게 할 마지막 준비를 발빠르게 이행했습니다. 마지막 유언 설교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쳤습니다.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우고 지도자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34:6을 보면 모세가 요단 동편 모압 땅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골짜기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오늘까지 그 무덤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명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 무덤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간곡하게 부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만일 모세의 무덤이 알려진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뒤에 이 모세의 무덤은 아마도 성지가 됐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지역을 성역화하고 왕을 비롯한 모든 지도자들이 때마다 와서 참배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이 사실을 미리 예측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자기의 존재는 잊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경배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무덤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 은혜가 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세의 순종이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의 마무리입니까? 얼마나 위대한 인생입니까? 하나님께서도 모세의 죽음을 축복하셨습니다.

 

 34:7을 보면 모세가 죽을 때 나이가 120이었습니다만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사명을 다 완수할 수 있도록 건강을 주신 것입니다. 노환으로 고생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족한 은혜를 깨달으면 마무리를 잘할 수 있습니다. 자기 사명이 끝난 줄을 알고 미련을 두지 않고 마무리를 잘합니다. 자기의 자취를 감추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들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족한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구원받기에 족한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명자로 충성을 다하기에 족한 은혜를 주십니다. 그 족한 은혜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원망과 불평을 없앨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인생의 마무리를 아름답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찬송 406 1절을 함께 불러보겠습니다. '내맘이 낙심되며 근심에 눌릴 때 주께서 내게 오사 위로해 주시네 가는 길 캄캄하고 괴로움 많으나 주께서 함께 하며 내 짐을 지시네그 은혜가 내게 족하네 그 은혜가 족하네 이 괴론 세상 나 지날 때 그 은혜가 족하네' 이 찬송을 기쁨으로 부를 수 있음이 은혜요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모세의 마지막 따나가는 뒷모습이, 저는 정말 부럽습니다. ! 나도 저렇게 살다가 저렇게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도 하나님이 부르실 때 떠나갈 나의 뒷모습에 대한 예고편인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만족하십니까? 모세 같은, 아니 비슷하게나마 아름다운 뒷모습입니까? 그렇다면 더 아름답게 가꾸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혹시 나 자신조차 안타깝게 여길 만큼 부족한 모습입니까? 그래도 아직은 괜찮습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에게 시간을 더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해의 절반을 살아오셨습니다. 나의 뒷모습은 어떻습니까? 뒷모습이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 하리라 새롭게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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