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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잠자는 자여 어찜이뇨-통일비전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4-08-11 | 조회: 160

잠자는 자여 어찜이뇨  통일 비전을 1:4-6, 12. 2024. 8/12

 

오늘은 광복 79주년을 맞는 뜻깊은 주일입니다. 어느 민족 어느 역사에나 크고 작은 폭풍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폭풍이 있었다면 3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일제 치하에서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일본은 무력으로 우리의 국권과 강토를 빼앗았고, 우리의 고유문화를 짓밟으면서 민족의 혼 자체를 말살하려고 안간힘을 쏟았습니다. 조선의 젊은이들은 그들이 일으킨 전쟁의 총알받이와 위안부로 끌려가 동남아와 중국 등지에서 수없이 죽어갔습니다.

 

교회에 가해진 박해 또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전쟁물자로 사용하겠다고 종탑의 종들을 철거해갔고, 모세오경과 요한계시록은 삭제를 당했습니다.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민족지도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을 모조리 잡아가두었습니다. 우리의 말과 성씨와 자유와 젊은이들과 민족의 혼을 빼앗겨 버렸던 어두웠던 시대였습니다. 당시 미국이나 상해 러시아의 우스리스크등 여러지역에서 독립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루었지만, 정말 우리의 힘으로 광복은 실현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 함석현 선생은 우리나라 해방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나라 해방은 도둑 같은 해방이었다, 예기치 않았다 갑자기 우리에게 주어진 해방이었다. 그리고 이 해방은 하늘에서 온 것이었다. 어느 누가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해방을 스스로 할 능력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고 그는 평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일어난 것 같지 않은 이 민족이 해방을 맞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을 할 길이 없습니다.

 

1945 815일 잃었던 나라를 되찾은 날, 우리 조상들은 얼마나 기뻤던지 그날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광복절이란 빛을 되찾은 날이라는 뜻입니다. 오죽하면 8.15해방을 빛을 되찾은 날, 즉 다시 세상이 시작된 날이라 했겠습니까? 오늘 이 뜻 깊은 광복 주일을 맞이하지만, 이제 79년이라는 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 중에는 그때의 기억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당시의 상황을 아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사람들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젊은이들은 당시의 쓰라린 역사나 해방의 감격을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전세계에 유일한 분단의 아픔을 가진 나라입니다.

 

요즘 통일에 대해 시각도 다양합니다. 새대간이 차이라든지 보수와 진보의 차이는 통일에 대한 접근 방식이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통일은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가지고 통일을 위한 그 날을 준비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126:5-6절을 보세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여기 씨를 뿌린다는 것은 씨앗을 뿌린다는 것은 미래를 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씨를 어떻게 뿌리면서 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1:6에는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합니다. 이는 관심에 대한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통일 한국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각 분야에 많은 투자의 씨를 심고 가꾸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너무 중요한 메시지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요나서는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 사랑의 대상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사랑입니다. 동시에 복음들고 살아야 할 우리에게 저 북녘땅에 2300만 내 동포들의 영혼 구원에 대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 한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어느 날 하나님이 요나를 찾아가셨습니다. 너는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라.’ 요나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저 큰 성읍 니느웨에 가서 쳐서 외치라고 그랬습니다. 그 당시에 이 니느웨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앗수르는 세계 역사를 주름잡던 대국입니다. 요나에게 지금 하나님께서 앗수르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대단히 악하기 때문에 내가 가만히 둘 수가 없다. 너는 그곳에 가서 먼저 경고를 해라. 회개하라고 외쳐라. 다행히 회개하면 내가 그 성을 구원해 줄 것이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그 성을 멸할 수 밖에 없다. 너는 가서 외쳐라.’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이 명령을 들은 요나는 기겁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혼란에 빠져버렸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은 굉장히 잔인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2절에도 그 악독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나훔서 3:1절에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을 놓고 피 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피가 흐르는 성, 무죄한 자의 피가 밤낮으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궤휼이 심하고 늑탈이 심하고 강포가 가득한 성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잔인하고 악한 니느웨 사람들을 하나님이 왜 불쌍히 여기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요나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도 어느 누구도 앗수르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요나도 그랬습니다. 요나도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니느웨와 앗수르는 차라리 멸망 받으면 좋을 나라, 멸망 받아 마땅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요나의 생각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아무리 미워하는 나라라 할지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하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래서 요나를 보내시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자기 생각대로 판단해서 그 땅은 멸망 받아 마땅한 곳이라고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요나의 큰 실수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자기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선포해야 할 책임을 가진 사람입니다.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이 내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가서 외치라 그러시면 무조건 가서 외쳐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말씀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 하신 곳이면 어디든지 가야 하고, 하나님께서 외치라 그러시면 그 말씀이 맘에 들지 않더라도 외쳐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어떻습니까? 그는 선지자의 책임을 망각하고 자기가 스스로 판단해 버립니다. ‘그곳은 구원받아서는 안 될 곳이라고 자기 스스로 단정지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신 니느웨 대신에 다시스로 도망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지 않으면 그 땅은 멸망당할 테고, 차라리 그게 더 낳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요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 북녘땅에 김정은이 하는 행태를 보세요. 어디 한구석 마음에 드느데가 있나요? 내가 보기 싫다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 사람은 망해야 해, 그런 사람은 혼 좀 나봐야 해 그런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생각대로 사람을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나와 사이가 좋지 않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요 못된 사람이라고 판단해 버립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벌을 내려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판단해서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사업도 망했으면 좋겠고, 장사도 잘 안돼서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원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시고, 그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심지어 신앙생할하는데 방해하는 사람, 핍박하는 사람까지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십니다.

 

. 사명을 져버린 요나

요나는 자기 생각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불순종합니다. 그는 니느웨와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오늘 사람들은 하나님 낮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시편 139편을 보면 내가 주를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하늘에 가면 하나님은 거기 계시며 스올의 땅속에 숨을 지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고 바다 끝에 자리를 펴고 숨을 지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고 흑암 속에 숨을 지라도 하나님은 거기에 대낮같이 밝은 빛으로 비추시나이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그런 하나님의 추적을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입니다. 오늘 이 회피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가라는 도시 반대편인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그곳에서 요나는 배를 타고 배 밑창 깊숙이 숨습니다. 타조가 도망가다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덤불에 속에 머리를 처박고 궁둥이는 내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다고 숨어집니까. 요나는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가면서 하나님이 모르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세상에도 숨을 곳이 없습니다. 오늘은 cctv 시대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내 모습이 cctv에 찍힙니다. 앞으로는 범죄가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핸드폰에는 내가 하루 종일 돌아다닌 행로가 그대로 기록됩니다. 자동차에 달린 블랙박스는 내가 하루 종일 돌아다닌 길목을 그대로 찍어 놓습니다. 이제는 꼼짝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제작한 cctv 눈도 속일 수 없으면서 어찌 하나님의 눈을 피할 생각을 합니까?

 

. 자는 자여 어찜이냐 - 이방인의 외침

다행히 하나님은 잠자는 요나를 방치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도망가는 요나의 앞에 자연을 통해 당신의 노여움을 표현하셨습니다. 4절을 보면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대작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헤틸입니다. “세게 던지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격한 풍랑을 일으켜 파도를 보내셨다는 말입니다. 배가 더 이상 전진을 못하게 하셨습니다. 난파지경이 되자 선장과 선원들이 각자 자기 신을 부르며 난리입니다.(5)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요나는 계속 잠을 자고 있습니다. 깊은 잠은 때로 축복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같이 불면증이 괴롭히는 시대에 깊은 잠은 분명 복이고 은혜입니다. 그런데 깊은 잠은 때로 멸망이 주는 잠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배가 뒤집힐 지경인데도 깊은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은 저주의 잠입니다. 지금 12만 명의 생명이 멸망당할 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는데 그리고 그들을 깨워야 할 사명이 주어진 요나는 지금 도망 중에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무책임한 잠입니다.

그때 요나에게 다가간 선장이 그를 흔들어 깨웁니다. 6절에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희한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불신자인 선장이 선지자인 요나를 흔들어 깨우더니 뭐라고 말합니까? 기도하라고 말했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완전히 거꾸로 된 겁니다. 기도해 줘야 할 선지자가 불신자로부터 기도하라는 충고를 듣다니! 큰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성도가 깨어 있지 못하면 환란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불신자들로부터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란과 수치를 통해 잠자는 성도를 깨웁니다. 그러다 보면 믿는 자들 때문에 애매하게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경우가 생깁니다.

저는 이 대작이 바다를 강타하는데도 곯아 떨어져 잠자는 요나를 보면서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13:3절에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잠을 잘까 하오며 사망의 잠에 빠질까 두려워합니다. 바울도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 주는 말씀을 합니다. 13:11절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사망의 잠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12절에 요나는 결심을 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이 말씀 가운데 역사의 대한 책임을 인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통일 한국을 위해 점점 사명도 식고 영혼 구원의 열정도 식어가고 있지 않았습니까? 이제 나부터 회개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여기 본문의 15절의 말씀을 보세요.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리고 비로소 폭풍은 잦아들고 새로운 역사의 장이 다시 펼쳐집니다. 요나가 그렇게 가기 싫어하던 니느웨로 물고기 뱃속에 넣어 니느웨로 가게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40일 동안 복음을 전하는 동안 니느웨 성안에서는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백성들이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나라도 이 은혜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에게 광복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일제 치하에서 고통과 치욕 속에 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을 해야합니다.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고 겨우 건국을 했지만 곧이어 6.25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 당시 자칫 잘못했으면 공산화되고 말았을 겁니다. 다행히 다음 날인 1950 6 26일 유엔 안보리가 소집되고 유엔군의 참전이 전격 결정되었습니다. 사실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상임이사국인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끝장입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 소련 대표가 캐딜락을 타고 오다가 엔진이 꺼져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겨우 고쳐서 부랴부랴 도착했지만 이미 한국전 참전을 만장일치로 결정한 뒤였습니다. 얼마나 절묘합니까? 하나님의 기막힌 섭리요 놀라운 은혜입니다. 6.25 당시 국군 전사자가 15만 명, 유엔군이 4 8천명이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지킨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때에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우리는 공산 치하에서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이 땅에 광복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남북의 통일의 날을 이루시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방법으로 그런 미래 통일 조국을 만들어 갈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황지 예수원을 기억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누구보다 한국의 통일을 열망하며 이 나라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신 분입니다. 대천덕 신부께서 이런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제 생각에는 한국의 통일을 위해 하나님이 행동하실 기도의 잔이 다 차지 못하고 있습니다.  잔이 다 채워지기 까지 기도할 중보자들이 그 어느 때보다 그 누구보다도 필요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된 게 무엇 때문입니까? 물론 많은 국민들이 많이! 수고했죠. 그러나 수고한다고 다 잘되는 게 아닙니다. 눈물 흘리며 악착같이 새벽기도 하고 산기도 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믿음의 사람들 때문에 잘 된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기도가 예전만 못합니다. 이제 다시 기도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렇습니다. 중보의 용사들의 중보의 잔이 다 차면, 그리고 마침내 때가 이르면 주께서 일어나실 것입니다. 분단의 벽은 무너지고 평화 통일의 그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피 흘림이 없이 서로를 안고 통일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 시대에 통일의 비저너리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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