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자들은 미래를 본다 행2:14-21. 2024. 8/18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꿈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드러내 놓고 자기 꿈이 무엇인지 이야기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저 입을 다물고 있지만 마음 속으로는 한 생을 살면서 어떤 꿈을 가지고 살까, 금년에는 어떤 꿈을 이루어볼까 하는 생각들을 합니다. 꿈을 먹고 산다는 것, 꿈을 위해서 뛴다는 것, 꿈을 달성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우리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 우리의 희망찬 삶을 살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꿈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결정해 줍니다. 꿈이 큽니까? 그 사람은 대인입니다. 꿈이 작습니까? 그 사람은 소인입니다. 꿈이 고상하면 그 사람도 고상하고 꿈이 천박하면 그 사람도 천박해집니다. 꿈이 선하면 삶이 선해지고 꿈이 악하면 삶도 악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꿈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꿈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물음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에게서, 인간에게서 온 꿈이냐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온 꿈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꾸고 미래를 얘기합니다만, 그 모든 꿈과 미래는 다 인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진짜 꿈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사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공동체가 출발했습니다. 다락방의 공동체는 더 이상 연약한 자들이 아닙니다. 성령이 그들의 삶을 붙잡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하나님 나라의 꿈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모든 것이 창조된 사건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장에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새롭게 출발되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줍니다.
본문에 보면, 베드로는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 믿고 성령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자녀든, 젊은이든 늙은이든 무언가 보고 산다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꿈이 있다는 겁니다. 미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통해 새 시대를 열어갑니까?
Ⅰ. 새 시대를 열어가는 사람들 14절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여기에 등장하는 12명의 사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세상에 주목받지 못한 실패자들입니다. 요즘 보십시오. 새 정부에서 장관을 세우는데도 그 인물들 역시 화려한 경력이 있고 또 내면적으로 인맥을 따라 세우려는 것이 우리의 잣대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루살렘 길거리에서 외치는 저들의 소리가 무슨 소망이 있고 설득력이 있겠습니까? 12명 명의 제자들이 하늘로부터 임하신 성령을 받고 각각 다른 언어로 말하는 방언을 했습니다. 그들이 방언을 통해서 말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큰 계획에 대해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포한 큰일에 대해서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그 방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거기엔 적어도 17개의 나라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굉장히 먼 곳에서 예루살렘까지 찾아왔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은 최소한 3천 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종교적으로는 열정이 뛰어난 사람들이었고, 물질적으로도 여유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건은 이 제자들의 방언을 다 알아들은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에게 나타난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놀라며 신기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갈릴리 촌놈들이 어떻게 우리 지역의 말을 알며, 어떻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일을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반면 그렇게 방언을 말하는 제자들을 ‘술 취한 것’이라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복음에 대해 호의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전율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증거한 말씀을 그들이 다 들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통역사가 있는 시절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지구촌에 사는 사람들은 바벨탑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창11:1절에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노아가 사용하던 언어 한 가지로 다 소통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탑 사건이 일어나고 언어의 혼잡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전 세계에 약 6000개 정도의 언어가 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영어를 배워도 막상 미국사람을 만나면 그냥 웃기만 하고 못 알아듣는데 6000개의 다른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보세요. 같은 언어끼리도 사투리를 쓰면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울 사람이 경상도에 가면 못 알아듣는 말이 있고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에 가도 못 알아듣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같은 언어도 다르게 사용되는데 언어가 완전히 달라지니까 민족이 분산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 제자들의 증거를 듣던 자들이 신기해하며 놀라는 사람들, 그리고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는 사람들 앞에 사도들이 당당하게 섰습니다. 14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여러분,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다. 거기에 모인 사람은 최소한 3천 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서 있습니다. 어떻게 서 있었을까요?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주목해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외칩니다.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여기 3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입니다. 자신들을 조롱하고 술에 취했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지금이 오전 9시인데 우리가 술을 먹고 취했겠느냐? 우리에게 일어난 현상은 요엘 선지자가 이미 오래전에 예언했던 것처럼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기로 하셨는데, 그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신 것이다. 그리고 ‘다윗이 “주”라고 불렀던 분이 바로 이 예수님인데, 너희가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리셨고, 우리가 그 일에 증인이다. 너희가 죽인 그 나사렛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와 우리의 구원자가 되게 하셨다.’ 얼마나 담대하며 당당히 이야기합니까? 이 엄청난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이는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세상의 사람들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오셨고,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에 담대해졌습니다. 그게 성령의 사람들이 갖는 특징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담대함을 갖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육의 것은 무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습니다. 능력에 있습니다.’ 요14:26절에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지금 사도들은 성령의 임재 앞에 하늘의 신비한 생수를 마시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은 더 이상 소심한 다락방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날개를 펴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 사건입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꿈을 갖고 세상과 충돌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능력의 날개를 펴고 비상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들에게 불이 임했습니다. 그들의 혀는 불을 토하며 예수의 생명과 소망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묻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꿈입니까?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꿈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 꿈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요, 이 꿈은 성령이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꿈입니다.
Ⅱ. 우리 역시 이 꿈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철학에서는 두 종류의 인생을 말합니다. 하나는 ‘생존’(生存)입니다.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것에 급급한 인생을 말합니다. 하루하루 밀려드는 일상을 마주하고, 해결해야 할 삶의 과제와 씨름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실존’(實存)입니다. 살아가는 이유를 찾으려고 힘쓰고, 그 이유에 충실하게 살려고 애쓰는 인생을 말합니다. 일상 속에서도 살아가는 이유를 놓치지 않고, 그 이유를 좇아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철학에서는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는 생존을 넘어서 실존으로 나가야 한다고 권합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실존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권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사명’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이 사명은 특별히 예수를 믿고 난 뒤 발견한 살아가는 이유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명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살아가는 이유라고 믿는 그 무엇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잘 믿으려면 예수 믿고 난 뒤 새롭게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쉽게 사명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사명 속에 하나님 나라의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명자는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지고 삽니다. 성령 충만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다른 시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잠 29:18의 말씀에 보면????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묵시라는 말이 곧 비전이요, 꿈입니다. ‘방자히 행한다’는 히브리어 단어의 뜻은 ‘신중함이나 자제력을 상실한 경거망동’을 의미합니다. 꿈이 없으면 인간이 경고망동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비전이란, 꿈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비전을 가진 사람의 시선은 오늘을 뛰어넘어 언제나 먼 곳을 향해 있습니다. 먼 곳에 시선이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거기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드립니다. 여기에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여러분, 꿈이 없는 인간은 방자해집니다. 꿈이 없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자기를 벗어나지 못한 채 항상 목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대로, 감정대로 욕구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 삶은 방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꿈이 없으면 목회자이든, 교인이든, 어떤 인간이든 방자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꿈을 가졌다, 가지지 않았다 하는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결과는 이처럼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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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사명은 우리의 인생을 바꿔놓습니다. 의미 없는 삶을 의미가 가득 담긴 삶으로 바꿔놓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을 살아야 할 이유가 넘치는 삶으로 바꿔놓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사명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Ⅲ. 꿈을 가진 자들을 통해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됩니다.
지금 성령충만한 베드로가 21절에 외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외침입니다. 복음만이 내 인생을 바꿀 수 있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마1: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죄에서 구원을 받는다는게 얼마나 엄청난지 아십니까? 요즘 8월 들어 코로나가 재유행하는 조짐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3년 동안 코로나라고 하는 전염병으로 전 세계가 공포에 떨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이 코로나가 심각하지만 우리 인간의 죄는 이런 코로나보다 더 무섭습니다. 롬3:23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6:23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 인간을 보시고 구원받아야 될 존재로 선언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말씀에 의하면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거침없이 이 사실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죄의 값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이 심판을 면하려면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으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십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독생자 외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8: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마 1: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한마디의 메시지가 3000명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엄청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생각 같아서는 천대와 멸시받는 사람들의 입에서 어떻게 사람들을 두려워 하지 않고 당당하게 증거할 수가 있습니까? 그들은 마지막 남은 그 생명 하나 바쳐서라도 예수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명을 주님의 제단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를 전하기에 그 전도가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예수가 무엇이길래 저 사람들은 예수 때문에 가진 것 다 빼앗기고 남은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저렇게 얼굴에 기쁨이 충만하여 나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는가? 예수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영생을 얻는 것이 그렇게 소중한 것인가?’ 사람들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대방이 그만큼 진지하게 나오기 때문에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희생하기를 꺼리는 사람은 능력 있는 전도를 못합니다.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전도의 현장에 가보십시오. 그곳에는 반드시 생명을 거는 희생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진지하게 자문자답을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얼마나 값진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고 있는가?’ 우리 한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주님은 절대 만족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교회가 이 땅에 세워진지 55년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은혜로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영적인 위기 가운데 놓여있습니다. 이런 영적 위기의 시대에 우리교회를 더욱 좋은 교회로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즉 사명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우리가 영적파수꾼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의 눈으로 상황을 잘 파악하고, 그리고 잘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전하지 않아서 예수 믿어야 할 사람이 믿지 못한다면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않아서 회개해야 할 사람이 회개하지 못한다면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권하지 않아서 헌신할 사람이 헌신하지 못한다면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터치 153 새생명 축제가 시작됩니다. 나는 여러분의 심령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 한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십자가에 달려 나를 구원하신 그 사랑을 힘입고 내 자녀에게 내 이웃에게 병든 이 세상을 향해 일어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육신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비하여 영혼을 살리는 일은 얼마나 더 중요합니까? 전도는 영원히 사는 생명을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위하여 내가 희생하지 않고서 되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희생하신 주님의 사랑에 감동 받은 우리가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전도는 희생 없이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5세에 인디언 선교에 헌신하여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던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 않노라”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내 이웃의 한 영혼을 찾아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 은혜가 오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새로운 도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