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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새시대를 향하여(5)-어찌할꼬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4-08-25 | 조회: 216

새 시대를 향하여 - 어찌할꼬  2:36-41. 2024. 8/25

 

오늘 우리 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향하여 비전을 선포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야기합니다. 5:32절에 보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왔노라 말씀하시고 눅15:7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한마디로 주님의 마음은 온통 영혼 구원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6:38-39절에 보면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의 뜻 - 영혼 구원입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한 생명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녹취록입니다. 이 영혼을 포기할 수 없는 영혼의 추적자에 관한 기록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하나님을 영혼의 추적자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여러분을 포기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탕자처럼 멀리 떠나 그분을 잊고 방황할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쾌락에 묻혀 살 때도 그분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가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한번 택한 자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집요하게 추적하셔서 기어코 여러분을 주께서 자녀 삼으시지 않으셨니까? 자신이 잘나서 변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의 나를 만들어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구원을 받은 우리를 더욱 가치있는 인생으로 살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게 살게 하시고 사명자로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바로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사명- 미션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기독교 역사에 엄청난 역사의 한 장면을 보게 됩니다. 14절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사도들이 말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큰 계획에 대해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외칩니다. 다윗이 라고 불렀던 분이 바로 이 예수님인데, 너희가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리셨고, 우리가 그 일에 증인이다. 너희가 죽인 그 나사렛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와 우리의 구원자가 되게 하셨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자기 하나 목숨 보전하기에 급급했던 갈릴리 사람들이 얼마나 담대하며 당당히 이야기합니까? 이 엄청난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이는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세상의 사람들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오셨고,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에 담대해졌습니다. 그게 성령의 사람들이 갖는 특징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은 받는 청중의 모습입니다.

 

. 어찌할꼬

37절 다시 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여기서 찔렸다는 말은 본래 말발굽에 움푹 패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말이 발을 힘차게 내 딛으면 땅이 움푹 패입니다. 나무를 차면 나무 살점이 뚝 뚝 떨어집니다. 엄청난 힘입니다. 그 발로 사람을 차면 거의 살 수 없습니다. 엄청난 충격을 줍니다. 그것이 찔렸다 말입니다. 찔림을 받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묻습니다. 여기 이 처절한 고백을 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렇게도 잔인하던 사람들이 폭도처럼 돌변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메달았던 자들이 아닙니까? 제자들을 괄시하고 조롱했고 핍박하던 자들입니다. 도무지 변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입술에서 비명같은 절규를 합니다. ‘어찌할꼬’ - 이 물음은 필사적인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죄를 깨닫고 애통하면서 사도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 탄식은 피눈물의 회개의 외침입니다. 여기 도무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어찌할꼬 하며 절규하며 몸부림치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변할 수가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5:2절에 보면,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에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 은혜란 내 의지, 내 노력, 내 열심, 내 선행과 상관 없이 하나님 편에서 베푸시는 일방적인 호의, 선물입니다. 이 은혜를 바울은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 라고 표현합니다.  서 있는 은혜입니까? 이 말은 견고히 서다”(stand fast), “온전히 서다”(stand whole)라는 말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서 있게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버팀목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염치가 있지, 그렇게 핍박하고 잔인하게 만왕의 왕이신 메시야로, 구원자로 오신 예수를 십자가에 내 몰아친 저들이 무슨 낯짝으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설 수 있습니까? 오직 은혜 아니고는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은혜안에서만 우리는 섭니다. 그래서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5:2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에 영광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영광은 하나님 앞에 마지막으로 서게 될 때 경험하게 될 찬란한 미래의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 회개하라

베드로는 이렇게 절규하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합니까? 38절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성령님이 원하신 첫 번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란 한자로 뉘우칠 “, 뉘우치고, ”“, 고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메타노이아“. ”길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까?

 

40절을 보십시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여기 패역이란 말이 나옵니다.  패역 비뚤어졌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없는 인생은 비틀어진 길을 가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를 들어도 한번 비틀어진 마음이 안고쳐 집니다. 오히려 자기의 열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 앞에 섰던 수많은 사람들입니다. 종교지도자, 바리새인들, 한번 비틀어지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친 것입니다. 그리고도 자신들은 율법대로 했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당연했다는 전혀 죄책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속에 복음이 들어가니까 생명의 피가 그들 속에 들어가니까 어찌할꼬라는 비탄과 비명의 탄식이 예루살렘 도시를 통곡의 바다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금 사도들은 탄식하는 저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복음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서 내 죄를 다 못박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로 다시 사신 것처럼 우리 역시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최고의 지성인으로 꼽혀 온 이어령 교수를 알 것입니다. 지난해 주님의 영원하신 품에 안겼습니다. 그는 문화부 장관이자, 이화여대 교수로 탁월한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고 큰 영향을 분이 아닙니까? 23세에 문학계에 등단하였고, 27세에 주요 일간지 논설 위원이 되었을 정도로 석학입니다. 하지만, 이분은 그의 지성 때문에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불가지론자로 예수를 안 믿었던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영접한 계기가 자기 딸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딸이 미국의 변호사로 있는데 갑상선 암으로 수술 후, 두 번이나 재발하는 가운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암은 고쳤지만, 그 후유증으로 고도근시로 인해 망막이 찟어져 시력을 잃을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되었고, 그의 자녀 가운데 둘째가 자폐증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려운 상황입니까? 단 하루도 울지 않고 잠든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아버지인 이어령 교수도 딸의 불행 앞에서는 그의 뛰어난 지성으로도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장민아씨가 기도와 간구 가운데 시력을 되찮았고, 아들까지 치유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본 이어령씨가 무릎을 꿇고 70년이 넘께 부정했던 예수를 영접하게 된것입니다. 그가 어느 날 회심하면서 그의 딸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나의 지식과 돈이 너를 구하지 못했다. 그런데 네가 주 안에서 평안과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면, 나의 무력함이 증명 된 것이 아닌가? 내가 지금까지 이 무력함에 매달려 살았구나. 이제는 나와 동행하자! 네가 시력을 잃어가면서 본 빛을 나에게도 보여 주지 않겠니?” 생각해 보세요. 이분은 70년 가까이 예수님을 믿지 않던 분입니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이 그 따님의 질병과 손자의 질병을 통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 상식과 이성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영역 너머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사는 날 동안 자기를 끝까지 믿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복음의 증인자로 마지막까지 산 순교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 이들은 자신들이 십자가에 메달라 죽임 예수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임을 깨닫고 어찌할꼬라는 비탄과 비명의 탄식이 예루살렘 도시를 통곡의 바다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금 사도들은 탄식하는 저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복음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서 내 죄를 다 못박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로 다시 사신 것처럼 우리 역시 새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아침!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5:6에 보시면 지난날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그리스도를 알기 전 나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바울은 좀 고상한 표현을 썼지만, ' 경건치 않은 자' 도무지 인간 같지 않은 자, 도무지 변화될 수 없는 죄에 찌들대로 찌든 불신과 음란과 거짓으로 물든 소망 없는 자란 말입니다. 그리고 내려가서 롬5:8절에 보시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자격 없는 자, 이 소망 없는 인생을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인생황혼에 한 차디찬 감옥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고백합니다. "하나님! 내가 지난 시절 얼마나 당신 앞에 잘못된 삶을 살아왔습니까? 믿는 자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 복음을 방해하는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로 살아온 나를 당신의 능하신 손길로 그 모든 것을 덮어주시고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나를 충성되이 여겨 하나님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나를 끝까지 믿어주신 하나님! 나의 연약함을 허물치 않으시고 오히려 격려하시고 소망을 주신 하나님! 내가 어찌 이 사랑! 이 은혜를 감당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은 인생의 한 복판에 다가오신 예수님은 사42:3절을 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아시고 탄식도 아십니다. 우리의 후회도 아시고 허물도 아십니다. 아들을 죽여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던 하나님은 독생자 아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면서까지 죄인 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받아주시지 않으셨습니까?

 

.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나는 이번 새 생명 축제에 여러분의 전도를 통해 여러분 속에 담겨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생수가 되어 태신자들이 예수를 영접하는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성령의 불을 주셨습니다. 그 불꽃은 우리를 세상 속으로 보내기 위해 타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흥을 원하고 성령의 불을 받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낙심과 불의와 악이 가득한 세상 속으로 하나님의 일꾼들을 보내십니다. 그래서 치유와 소망과 위로를 주기 원하십니다. 누구도 항구에 정박해 놓고 감상이나 하려고 배를 만들지 않습니다. 배는 바다로 나가 파도에 부딪히고 때로는 사나운 풍랑에 난파당할지라도 항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부터 3개월 태신자 전도하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꼭 전도할 가족 이웃을 품는 태신자를 작정하는 것입니다. 잉태운동부터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3개월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꿈이 있습니다. 우리의 환상이 있습니다. 우리의 감격이 있습니니다. 한 영혼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만나 새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반드시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의 단을 거둘 줄로 믿습니다.

 

! 41-42절을 보실까요?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여기 ’3000명이나 더 하더라 이들이 이제 새 시대의 새 역사를 쓰는 삶으로 거듭납니다.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주인공들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는 변하여 새사람이 됩니다. 새사람으로 변화된 신앙인은 담대함을 얻습니다.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담대하게 이겨나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어떤 문제 앞에서도 두렵지 않게 해 주십니다.

 

세상과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어려움이라도 이겨낼 힘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기에 어려움 앞에서도 두렵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 터치 153 새생명 축제에 전도 이전에 내가 달라져야 된다고 믿습니다. 복음 앞에 내가 먼저 벼해야 되고 달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함께 기도하고 함께 은혜의 보좌 앞에 서서 계속 모이고 기도하며 성령의 도움을 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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