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를 향하여 – 주목하여 보라⑦ 행3:1-10. 2024. 9/8
사랑하는 여러분. 때때로 삶의 역경과 고난의 비바람이 갑자기 어느 한순간 휘몰아치기 시작할 때 기도조차 되지 않는 상황을 경험해 보신일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섭리를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내 삶에 불어닥친 고난의 비바람 속에서 갑자기 리듬을 잃어버리고 낙심하며, 좌절하며 방황하다가 기도조차 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종종 발견 할 때가 있습니다. 강한 것 같으나 사실은 참으로 연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주체하지 못하는 슬픔 앞에서 몸부림치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무서운 고독 앞에서 밤을 세우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심각한 질병 앞에서 하얗게 질려버리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인간이란 존재는 너무나 가여울 정도로 나약하다는 사실을 자주 느끼게 됩니다.
본문 2절에 보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앉은뱅이라는 말이죠. 이 사람은 구걸하는 장소에 스스로 올 수조차 없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엔 그가 40여 세가 되었다고 하는데 40여 년 동안 장애자로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기능과 역할을 상실해 가치가 없는 존재로 버려졌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얼마를 적선해주느냐에 따라서 그날 하루 삶의 질이 결정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한 것은 그가 있는 장소가 ‘미문’입니다. '미문'은 한자어로 '아름다울' 미(美)자와 '문' 문(門)자를 사용하여, '아름다운 문'이란 뜻입니다. 그 아름다운 문 앞에 가장 대조적으로 희망을 잃어버린 채 구걸로 인생을 살아가는 이 앉은뱅이가 앉아 있습니다. 그는 태어나서 40년 동안, 단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그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40여 년을 살면서...하체가 마비된 고통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희망이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때는 일어나 보려고, 안간힘을 써 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10년 20년 세월이 흐르고, 30년 40년을 살았지만, 변화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그는 절망하다 못해 체념한 체로 하루 하루를 고통 중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가족들의 원망과 탄식을 들어야만 했을 것이고,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며 비아냥도 참고 많은 눈물도 흘렸을 것입니다. 비록, 성전 문 앞에까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그의 필요를 채워주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길거리에서 동냥이나 해서 먹고살라고... 그를 길거리의 거렁뱅이로 방치했습니다.
보세요 그가 앉아있는 현장은 성전 문 앞입니다. 성전에 나가면서도 하나님 만나기를 원하거나 영생을 얻기를 원한 것이 아니고 물질만을 원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리 중요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전에 나가는 사람들의 돈주머니였습니다. 사실 그들이 던져주는 돈이 앉은뱅이에게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책임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향하여 예배를 드리려 가지만, 어느 누구하나 이 구걸하는 병든 영혼에 대하여 부담을 지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배하러 가는 사람들 중에는 간혹 그가 원하는 돈 한푼을 던져주며 그의 형편에 동정할 뿐이지, 어느 누구도 이 불쌍한 영혼을 일으키려는 열망이 없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원하는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Ⅰ.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합니다.
4-6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여기서 중요한 말이 ‘주목했다’는 말입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듯이 무심히 쳐다봤다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 ‘본다’는 단어가 네 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습니다. 먼저 3절에는“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다’(εἴδω)라는 말은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있기에 쳐다본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일 줄 알고 쳐다본 것이 아닙니다. 그저 어떤 사람이 지나가니까 그냥 눈길이 간 것뿐입니다. 그리곤 영혼 없는 말투로 구걸합니다. “한푼만 주십시오!” 성전을 들락거리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늘 하던 그런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를 다르게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4절에서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보고)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구걸하는 청년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랐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했다’(ἀτενίζω)는 말은 뚫어지게 집중해서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에게 빠져들 정도로 응시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베드로와 요한도 성전을 출입할 때마다 그 걸인이 구걸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걸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습니다.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쳐다보는 시선입니다.
“우리를 보라!”는 베드로와 요한의 말을 듣고 그 못 걷는 사람은 두 사람을 빤히 쳐다봅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무엇인가를 얻을까 해서 바라봅니다. 바로 이 때 베드로가 저 유명한 말을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오늘 본문에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외친 베드로와 요한도 본래는 앉은뱅이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갈릴리 바다의 어부로 평생 하루 벌어 하루 먹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당시 이들은 세상 앞에 소외된 자들입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던 천민들이었고, 배운 것도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제자가 될 만한 어떤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신경질적이고, 교만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사람들입니다. 혈기 부리기가 일쑤이고, 3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으면서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믿음 없는 행동하다가 예수님께 책망들은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앉은뱅이를 불쌍히 여길 마음이 일어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살아 계시는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성령을 통하여 그들 마음속에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삶이 변화하기 전 자기의 눈으로 볼 때까지만 해도 앉은뱅이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그들의 마음에 임하니까 그들 속에 십자가의 그 구속의 사랑이 뜨겁게 넘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비로서 그들은 주님의 관심과 뜻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알게 하셨기에, 이제는 주님의 마음을 담은 두 사람은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앉은뱅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동성교회 여러분! 오늘 저자 거리에서 베드로가 외쳤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오늘 저자 거리에서 베드로가 외쳤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장애시인 송명희 시인의 시중에 ‘그 이름’이란 시를 기억하십니까?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그 이름 속에 있는 사랑을/그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비밀이 되었네, 그 이름 비밀이 되었네/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아름다운 보석/내게 있는 귀한 비밀, 오 나는 말할 수 없네/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
그렇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비밀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걸고 탐색하고 찾아도 다 헤아릴 수 없는 비밀입니다. 세상의 모든 비밀이 끝나도 저 영원까지 계속될 비밀입니다. 우리가 체험한 구원의 기쁨, 섬김의 기쁨은 그분의 이름이 지닌 영광의 조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을 높여 드려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증거 해야 합니다. 아니 우리가 지상의 모든 이름들을 잊을 마지막 순간에도 붙들어야 할 유일한 이름입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금과 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의 이름’입니다.
Ⅱ 이 치유의 사건이 언제 일어났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망 없는 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의 계기는 바로 기도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령한 것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성령이 불같이 임한 것을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력으로 말하자면 한번 설교로 삼천 명을 회개시킨 사람이었습니다. 교인수로 말하자면 메가급 처치인 성공한 교회였고, 교회의 재산으로 말하자면 수많은 사람들의 재산이 교회 수중에 있었으며, 성도들의 가슴에 불러일으킨 헌신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일상적인 모든 생활을 떠나서 함께 모여 기도하며 공동생활을 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지도자 두 사람이 시간이 되매 기도하러 올라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일이 절실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쁜 가운데서도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으며 회심한 성도들은 교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와 같은 자리에 있던 교회는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눌 수가 있었고, 또 그들의 필요와 그들의 문제를 끌어안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묻습니다. 한때는 오뉴월의 신록처럼 활력이 넘치던 신앙생활을 하던 여러분들이 왜 갑자기 생기를 잃어버릴까요? 왜 기쁨이 사라지고 열심히 식어 버릴까요? 왜 시험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 될까요? 왜 관심사와 생각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속된 것에 기울어질까요? 그 이유는 기도를 못하고 있든지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생명을 사랑하신다면 이젠 기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Ⅲ. 간증하는 삶
여기9-10절 보세요.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여기서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라는 말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충격의 표현입니다. 사실은 적어도 예배를 드리던 미문을 거쳐간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못하는 충격입니다. 8절에 중풍병자가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보세요. 앉은뱅이가 뜁니다. 찬양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놓쳐서는 안될 일이 있습니다. 40년간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걸인에게 진정 필요했던 것은 몇 푼의 자선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망가진 우리를 일어나 걷게 하는 복음이었습니다. 이 복음 앞에 평생 불구자로 구걸하는 인생이 그 절망을 너머 뛰었습니다. 서서 걸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생, 목마른 인생이 아닌 소망과 기쁨이 충만한 인생으로 바꾸게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제 ‘살아있는 증거’가 된 셈입니다. 특별히 11절을 보면 그 사람 스스로 어떻게 합니까?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여기서 ‘붙잡으니’ 이 말은 영어성경을 보니까 cling to(붙어 있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베드로에게 붙어 다녔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베드로의 복음 증거에 대해 시청각 자료 역할을 한 겁니다. 그 사람으로 인해 어떤 일이 생깁니까? 그 사람에게 나타난 변화가 증거가 되어 놀라운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의 모습을 보고 예수를 믿겠다고 결신한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소문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한 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습니까? 행4:4절에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오순절 성령강림 후 3천 명이 되었고, 이제 5천 명이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이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불이 한참 타오르고 있는 곳에 휘발유를 뿌린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겁니다. 심지어 베드로와 사도들이 핍박받은 상황에서 방패막이가 되어 줍니다. 행4:14절에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당국자들이 사도들을 잡아다 취조를 하고 핍박했지만 그 사람의 명백한 증인으로 옆에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훈방 조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앉은뱅이 인생에서 일어나 걷는 인생,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일으키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수준입니다. 비록 내게 금과 은이 없을찌라도 내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지를 한번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막대기 하나와 물맷돌을 가진 다윗의 손을 붙잡고 골리앗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립니다. 삼손의 손에 들려진 마른 나귀 턱뼈, 모세에 손에 때묻은 마른 지팡이 하나, 보잘 것 없는 것들이지만, 이것이 주님의 손에 들려 질 때 세상은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위대한 교회는 은과 금이 남아도는 교회가 아니라, 다만 예수의 이름만 가득한 교회 - 왜냐하면 예수의 이름이 오직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오직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오직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경제 위기 속에서도 우리 교회 성도들이 주님을 주목하고 예수의 이름을 붙들면 일어설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정도 우리 사업체도 예수의 이름을 붙들면 다시 재기할 줄로 믿습니다. 주인 되신 주께서 친히 주의 이름을 위해 사는 그 가정, 그 사업 그 공동체를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복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이런 승리를 누리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