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를 향하여 - 오직 예수 ⑧ 행4:13-22 2024. 9/15
이번 주일부터 우리는 고유명절인 추석을 맞습니다. 명절을 맞으면 오랜만에 가족이 모이고 옛 동네 친구들을 만나고 어른들을 뵙게 됩니다. 그런데 나는 예수를 믿는데 예수 믿지 않는 가족도 있고 이웃도 있습니다. 이럴때에 우리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라도 신경 써서 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욕을 먹는 것은 괜찮지만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고 영광이 가리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까지도 욕을 먹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명절을 맞은 믿음의 성도들은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 이웃들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소중한 기회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노래한 그 노래들은 지난 2000년 교회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수없이 많은 노래들의 사연들을 보면 꼭 예수 이름 때문에 복 받고 장수하고 잘되고 돈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역경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름과 고통의 한 복판에서 이 이름하나 때문에 위로 받고 용기를 얻었고 힘을 얻었던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어떤 분은 병상에서 그 예수를 그 이름을 부르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형수로 죽어가면서 뒤늦게나마 그 이름 예수를 믿은 것에 너무 감격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사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 이름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은 건축자가 내버린 돌맹이처럼 하찮게 내버렸지만 어떤 사람의 가슴속에는 그것이 어느 보물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고 귀한 보석으로 품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도대체 그 이름이 무엇이 길래 역사 속에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불렀겠습니까? 도대체 그 이름, 하나를 위하여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명예와 재산은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다 내던져 버릴 수 있습니까? 그 이름 속에 도대체 무슨 비밀이 있는 것입니까?
지난주에 보셨지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40여 년 긴 세월을 살던 앉은뱅이가 고침받은 후 성전에 들어오면서 문제가 커졌습니다. 고침받은 사람은 너무 기뻐서 제자들을 따라 성전 안으로 들어와서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났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백성들에게 기적이었던 이 사건이 지도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이 일로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 이유는 2절에 나옵니다. “예수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왜 싫어했을까요? “싫어했다”는 이 말은 매우 감정적인 말입니다. 이 말은 “기분 나쁘다”는 말입니다. “불쾌하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엇을 잘못 했길레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옵니까?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들이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제사장, 성전을 맡은 자, 사두개인의 공통된 신앙은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이들의 자존심때문입니다. 앉은뱅이는 일어난 것은 성전 구내였습니다. 성전은 제사장, 사두개인, 성전맡은 자들이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이들은 성전에서 예배드리며 제사를 집례하며 백성의 지도자로 살아갔습니다. 그중 최고의 책임자는 대제사장입니다. 문제는 대제사장이 앉은뱅이를 고친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고쳤다는 점입니다.
만일 대제사장이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백성의 지도자인 대제사장은 아무 것도 못하고 베드로가 그것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일로 대제사장의 체면은 땅에 떨어지고 베드로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의 속마음이 나타납니다. 행4:7,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제사장에게 중요한 것은 체면이었습니다. 앉은뱅이 고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자기 자존심을 구긴 것이 문제였습니다. 요즘 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에 잡아 가두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에 가두기만 하면 문제가 잠잠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룻밤이 지나면서 예루살렘의 분위기가 심상치 많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을 기화로 베드로와 요한이 전한 복음을 듣고 5천여 명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5천여 명이 예수 믿게 되었다는 것은 종교권력자들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도전이요 두려움이었습니다. 자기들이 똘똘 뭉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들었는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한 거대한 저항운동이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산헤드린 공회가 긴급 소집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가만두어서는 안 되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 공회 공회원들과 대제사장의 문중 사람들이 다 모여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합니다. 그런데 위협적인 분위기에서 심문을 받던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하게 10절에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노라.”
나사렛 시골뜨기들이라고만 생각했던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리고 앉은뱅이에서 고침받은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 곁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아무리 날고 뛰는 권력자들이라도 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위협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묻습니다. 도대체 예수의 이름이 무엇이길래 세상의 권력자들이 이렇게 무기력 할 수 있습니까? 그 이름 속에는
Ⅰ. 예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11- 12절
11-12절에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대답합니다.
마1: 2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을 때 하늘의 천사가 무엇이라 말합니까?????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그 죄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깨졌습니다. 그 죄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죄 때문에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해야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해야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마도 TV 뉴스나 혹은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밀엽꾼들의 잔혹한 행위에 대해서 보았을 것입니다. 야생동물을 잡기 위하여 산 속에 불법으로 수십 개의 덧을 놓아서 밀엽을 하는 내용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밀엽꾼들이 설치한 덧에 걸려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발이 짤려져 나가면서 몸부림치고 있는 동물의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언젠가 새끼를 벤 어미 산돼지가 밀엽꾼들이 설치한 덧에 걸려서 발버둥 치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점점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사탄이 설치한 죄와 사망의 덧에 걸려서 신음하며, 발버둥 치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그렇게 점점 죽어 가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죽음의 덧에 걸려서, 죄악의 덧에 걸려서 발버둥 치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고 있던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분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내가 버림받아야 할 자리에 버려지셨습니다. 어디까지 버림을 받으셨습니까? 지옥까지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지옥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곳입니다. 그분은 나를 죽일 수가 없어서 당신의 외아들을 죽이기까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저주받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당신의 외아들을 저주의 자리에 내어주시기까지 주님은 나를 사랑했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셨을 뿐 아니라 마 1:23을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여기 ‘함께’라는 말은 참으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홀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임마누엘이라는 의미 속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히13:5의 말씀에 보면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여기 과연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never’입니다. '결코'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끝끼지 책임지시겠다는 말입니다. 마28:20절에????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Ⅱ. 담대히 선포 합니다. 13절
13절입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여기서 ‘담대하게 말하다.’는 말이 파레시아(παρρησια)입니다. 파레시아란 자신이 해야 할 말을 거침없이 말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위협에도, 누군가가 반대해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것입니다. 이 ‘파레시아’라는 말은 사도행전에서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성령의 사람들, 복음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이 담대함, 파레시아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영성학자 리처드 포스터가 ‘지금 이순간, 우리에게 임하신 하나님 나라’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가 물었습니다. “왜 현대인은 초대교회 교인처럼 담대하지 못할까?”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하나는 사죄함의 확신과 또 하나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본래 약한 존재지만 우리 죄는 하나님께 모두 용서받았습니다. 요일서3:21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마음에 책망할 것이 없어야 담대합니다. 이 마음의 책망을 없애 주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예수님께 받은 용서를 확신하게 합니다. 이미 용서받은 자신이 내가 용납하게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받은 용서를 믿게 하고 용서받은 자로 당당히 살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합니다.
여기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의 협박에 전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하게 다시 선언합니다. 19절에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너희 말 들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권력자들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는 것이 자신들이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화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고린도후서 4:7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화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누군가가 한 말 한마디에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내 앞에 놓인 시련과 실패로 인해서 좌절하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믿음을 따라 살겠노라고 다짐을 하다가도 어느 순간엔가 그 믿음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입니다. 때론 세상의 이익 앞에서 하나님의 손을 놔버린 채 세상의 것을 움켜쥐기 위해서 허공에다 손을 뻗어 허우적거리며 사는 우리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또한 질그릇처럼 남들 앞에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가 하나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금으로 만든 그릇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값비싼 골동품처럼 폼 나게 사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그렇게 값비싼 존재가 아닙니다. 자랑할 것도 없고 내세울만한 것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화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인 우리 때문이 아니라, 질그릇인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그 보화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담대함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17절입니다. “이것이 민간에 더 펴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후로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은 위협했습니다. 협박했습니다. 한 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21절에서도 ‘다시 위협하고 놓아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위협했다’는 말은 더 강도 높게 위협했다는 말입니다. 더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면 죽일 것이라고 협박했다는 뜻입니다. 오직 예수의 승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명절 속에 한 주간을 보냅니다.
Ⅲ. 명절은 내가 만난 예수를 전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땅 한국은 전도가 후퇴하는 계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가 잊지 말 것이 있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예수 믿고 믿음을 통한 행복을 누리고 있음은 전적으로 우리의 선배들의 전도와 사랑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빚진 심정을 갖고 산다면 그 빚을 갚는 현장이 어디입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간다면 이 좋은 명절 날 우리 역시 가족과 그리고 친지 더 나아가 이웃에게 예수를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안에 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십자가의 그 사랑,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의 빚을 졌다는 이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는 결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은혜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악의 무거운 짐을 진 채,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에 헛된 것에 빠져서 무지와 거짓의 멍에에 눌린 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그런 모든 부끄러움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명절은 사랑의 빚을 갚는 날입니다. 그것이 화목이고,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들어오실 때 명절 주보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꼭 가정예배를 드리십시오. 주보에 보면 가장인 여호수아는 타락해가는 백성들에게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각자가 다짐하며 우리의 자녀와 일가친척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온 맘 다해 섬기기를 다짐하는 명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하십시오. 오직 예수, 오직 예수 그 예수만이 우리 가정과 이웃과 세상을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