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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새시대를 향하여(9)- 바나바가 그립습니다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4-09-22 | 조회: 205

새 시대를 향하여  바나바가 그립습니다. 4:36-37

 

지난 한 주간 추석 연휴를 잘 보내셨습니까? 우리는 지금 사도행전을 통해 새시대를 열어가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대하는 인물은 바나바라하는 별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사도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인데, 그것이 너무 유명해져서 우리는 그의 본명인 요셉보다 오히려 바나바라 알고 있는 겁니다. '바나바'는 위로자라고 번역해 놓았어요. 그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위로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는가?

 

폭스 잭슨이라는 신학자는 바나바에 대 해서 이렇게 기록해 줍니다. "바나바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매력있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그는 남의 장점과 가능성을 찾아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재능으로는 바울보다 못했을지 모르나, 크리스쳔의 덕으로는 우월했다. 그는 질투를 모르고 남의 허물을 용서했으며 장점을 보기에 빨랐으며 형제간의 평화를 위해 타협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역사상 바울은 세계 교회 진보에 공헌한바 컸지만, 바나바는 초대교회를 살맛나게 해 주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바울의 위대함을 잊지 못함과 동시에 바나바의 격려사역, 사람을 세워주는 코칭, 멘토링 사역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 새시대를 열어가는 길목에서 이 바나바가 어떤 삶을 살았기에 무엇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바나바를 그토록 위대한 지도자로 세웠습니까? 무엇이 평범한 이 사람을 위대한 바나바로 만들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이 바나바의 별명을 가진 자들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부부간에, 이 교회와 사회에 그런 자들이 필요합니다.

 

. 나 아닌 타인을 위한 삶을 산 사람입니다. 36-37

바나바는 사도행전 4:36-37에 처음 등장합니다. 구브로에서 난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오순절에 성령님이 오시고 교회가 세워지자마자 초대교회는 놀랍게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급성장하는 교회를 유지하고 계속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많은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늘어나는 성도들 중에는 고아와 과부가 적지 아니했습니다. 선교와 구제를 위한 막대한 재원을 하나님께 구했을 때 이 일에 헌신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헌신자가 바로 요셉이라는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이었다고 성경에 기록합니다. 구브로는 소아시아 근처에 있는 사이프러스 섬을 말합니다. 당시 이 도시는 아주 부유한 곳이었습니다. 광산이 있고 무화과와 밀 농사가 잘 되는 곳이고, 기름과 벌꿀의 산지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구브로라는 출신지를 밝힌 것은 바나바가 그 지역에서 큰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던 이름난 부자였던 모양입니다.  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이었어요. 레위족이었지만 제사장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니요, 사도도 아니요, 보통 레위인, 즉 우리와 같은 평신도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러나 사도행전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바나바는 초대교회에서 사도 바울에 버금가는 중요한 지도자의 위치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나바는 교회와 교회내 가난한자들에게 물질적 필요를 깨닫고 그 농장을 팔아 헌금합니다. 바나바의 이 결단과 헌신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가 큰 위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재정적 어려움이 해결되어 사도들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과부와 고아들에게 양식을 나눠줄 수 있어 교회내 연약한 자들이 힘을 얻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와 예수를 믿고 미처 시골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전도를 하던 많은 전도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수 있었으니 전도자들이 큰 격려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그를 일컬어 위로의 아들이다. 격려의 사역자다. 바나바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제가 아이티가 지진이 났을 때 두 번째 사역을 마치고 도미니카로 갔을 때 이 낯설은 이국 만리에서 저를 친 형제처럼 맞아 주던 분 중에 한분이 김현철 선교사님입니다. 이분은 한때 세계철강을 주도하려고 했던 삼미그룹의 회장이셨습니다. 또 프로 야구의 토양을 일군 삼미 스퍼스타시스의 구단주이기도 한 분입니다. 그런 그가 회사가 정부의 미움으로 혹자 부도가 나고 실의에 빠지면서 정말 모두를 증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직장암 판정을 받고 수술 과정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 앞으로 돌아온 분입니다. 그리고 도미니카로 와서 선교센타를 위시해서 교민들을 위해 헌신하는 분인데 저보고 아이티에서 고생했다고 몸둘바를 모를 정도로 최고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이티에서도 저에게 일주일 동안 집을 내준 탁형구 선교사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영락교회에서 성장한 분인데 이곳에 와서 선교사들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귀한 분이십니다. 사모님은 봉제 공장의 한국 책임자로 미국인 사장의 신임을 얻어 1000여명이 되는 직원을 거느리고 옷을 만들어 미국에 수출하는 분인데 그 공장 안에 쉼터라는 식당이 있는데 24시간 밥솥에 밥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선교사들이 현장에 갔다가 배고프면 누구든지 와서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 새벽에 4시면 부부가 꼭 일어나서 새벽 예배를 드리는 정말 경건의 가정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 사람들을 저렇게 이상하게 만들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갖도록 했을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시던 하나님 나라 비전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세상이 원하는 것을 다 쥐어본 사람들입니다. 버릴때와 쓸떼를 아는 인생이기에 아낌없이 나눔의 삶을 걸어갑니다. 그리고 이 바나바가 그리운 것은

 

. 사람을 세우는 자였습니다.

그는 기독교 역사에 없어서는 안 될 두 사람을 세웠습니다. 그 중에 한분이 바울입니다. 그는 예수믿기 전에 행8:3절에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잔멸 - 멧돼지 예화. 그는 부흥하는 교회를 고난의 구렁텅이에 빠뜨립니다. 초대 집시인 스데반을 과감하게 죽였어요.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리고 이것도 모자라서 예수 믿는 사람,  230km 밖에 있는 사람까지 전부 잡아다가 감옥에 넣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불교신자라도 이렇게 못하잖아요? 그런 그가 9:26절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났지만, 아무도 사도 바울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처절하게 잡아죽이던 그가 예수를 믿는다고 증거하는 그를 도대체 누가 믿을 수 있습니까? 또 다른 함정으로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과 의심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사도 바울의 신원보증을 서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바나바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예수님이 이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이 사람의 변화를 위하여 어떤 변화를 경험했는지, 그가 복음을 전할 때에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바울을 변호합니다. 이로인해 바나바의 보증을 통해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11장에 보면 바나바가 안디옥에 가서 목회를 합니다. 그랬더니 그 교회가 크게 부흥해서 커졌어요. 그때 바나바가 다소에 있는 사도 바울을 초청합니다. 바나바가 그를 불러올립니다. 교회가 크게 부흥하여 부목사가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안디옥 교회를 보면 지도자, 훌륭한 평신도 지도자들이 너무나 많아서 사도 바울 없이도 충분히 교회가 커 갈 수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나바는 왜 사도 바울을 불렀는가? 사도 바울에게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믿어주었습니다. 격려의 사람은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이 내게 어떤 유익이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히려 사람들을 바라볼 때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참으로 차갑습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너무도 매정합니다. 쓰고 나서 쓸모 없으면 가차없이 버립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발견한 것 중의 하나가 우리 사회는 사람을 쓰고 나서 버리는 사회라는 겁니다. 사람을 길러주는 사회가 아닙니다. 사람을 바라볼 때 목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항상 수단으로 바라보는 겁니다. 사람에게 투자해서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 격려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보지 않고 목적으로 보는 사람을 이 세상은 찾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격려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격려의 사람은 나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먼저 생각합니다. 격려의 사람은 사람을 믿어줍니다. 격려의 사람은 사람을 수단으로 보지 않고 언제나 목적으로 바라봅니다.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신약 성경이 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은 마태 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이 되었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마가복음입니다. 이 마가복음의 저자가 누구입니까? 마가입니다. 15:39을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 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가 때문입니다. 1차 전도여행 때 함께 했던 마가가 도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때 1차 전도 여행 팀들이 엄청난 아픔을 당합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다시 그2차 전도여행 때 바나바는 또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했고, 바울은 안 된다고 하여 싸우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냉철한 사람이었기에, 2차 전도여행에 또 마가를 데리고 간다고 하니까 안 된다고 하는 거였어요. 1차 여행 때 그렇게 불성실하게 우리를 떠나갔던 마가를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했어요. 그러나 바나바는 한번 더 기회를 주어야 한다며 데리고 가자고 했어요. 그래서 싸웠어요. 결국 갈라졌어요. 마가는 실패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바나바가 그를 격려했기 때문에, 그는 다시 세움을 입어서, 결국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놀라운 사도가 된 것입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도 이것을 깨닫고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후서를 쓰며 디모데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려 오라! 저가 나에게 유익한 사람이니라!" 마가와 화해하려고 한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용도 폐기처분을 당할 수밖에 없는 바울과 마가는 바나바의 격려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이 그립지 않으십니까? 어쩌면 오늘의 동성교회가 더욱 필요로 하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바울보다는 아마도 바나바 일지 모릅니다.

 

.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서서 살기를 원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한번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격려의 삶이 필요합니다. 우리 가운데 넘어져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도 넘어진 자였습니다. 모세도 쓰임 받기 전에 넘어졌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넘어진 경험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다 허물이 많았던 자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아픔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실 눈물 없이는 지날 수 없는 눈물의 골짜기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 가운데 하나가, 자기를 위로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입니다. 슬픔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위로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죽을 것 같은 고통과 두려움이 가득한 사망의 골짜기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 가운데 하나가, 자기가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입니다. 두려움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격려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고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별명은 '보혜사'였습니다. 파라클레토스! 직역하면 '옆에 서서 돕는 자'입니다. 오늘 말로 번역하면 '우리를 격려하는 분'입니다. 오늘도 성령이 함께 하실 때 하시는 사역이 있습니다. 상처난 여러분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되어 있을 때에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갈 길을 알지 못할 때에 갈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리주변의 이웃들에게 격려의 사역자, 돌봄의 사역자로 새롭게 부름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동성교회를 통해 새 시대를 열어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터치 153 새 생명 축제를 통해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그냥 세워지나요? 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의 격려와 사랑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새 인생을 살아가는, '저 사람은 오늘 내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여러분이 세운 태신자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영접하도록 희생과 섬김이 필요합니다. 끊임없는 배려가 있어야 하고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세워질 때 그 기쁨과 감격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그것이 생명을 구원하는 가장 보람찬 일입니다.

 

삯꾼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양 떼를 위하여 생명을 거는 일이 없지만 선한 목자는 언제나 그 일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생명을 걸고 해산의 수고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의 가치는 양 떼들이 생명을 보존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바나바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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