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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새시대를 향하여(10)- 아나니아 와 삽비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4-09-29 | 조회: 218

새 시대를 향하여  아나니아와 삽비라 5:1-11. 2024. 9/ 29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지요? - 호사다마 - 4개의 한자로 이루어졌는데 직역하면 좋은 일에 마귀가 많다는 것입니다. 호사다마 뜻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과정에 행복한 일만 있다면 당연히 좋겠지만, 아쉽게도 마음처럼 살아가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 말이 초대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로 교회 공동체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충만한 제자들이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하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3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걸인을 고친 사건입니다. 단순히 앉은뱅이 걸인을 고쳤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사건을 계기로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솔로몬 행각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너희가 생명의 주이신 예수를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고, 우리는 그것의 증인이라고 말입니다. 교회는 엄청난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때 그 복음의 말씀을 듣고 5천여 명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산헤드린 종교권력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했습니다.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말입니다.

 

권력자들의 그런 위협에 베드로와 요한이 아무런 항거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하고 산헤드린에서 나왔다면 더 이상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너희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이고,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면서 그들의 협박에 굴복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천명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드디어 교회에 대한 박해는 시작되었습니다. 앞으로 교회가 어떤 시련의 소용돌이 속으로 매몰되어 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런 위기 상황을 맞았을 때 교회가 한 일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은 한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어떤 박해의 상황에 내몰린다 하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 즉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수 있도록 담대함을 달라.’고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는 교인들이 더욱 결속되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서로의 물건을 통용했습니다. 서로 깊은 교제 속에서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큰 시련의 폭풍우가 몰아치더라도 내부의 결속력으로 그런 모든 압력을 이겨낼 힘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문제가 터졌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입니다. 교회에 큰 헌금을 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부부가 다 죽어나간 것입니다. 교회에 이보다 더 큰 시험이 있겠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땅을 팔아 교회에 헌금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가 헌금하는 날 그 자리에서 부부 둘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땅을 판 돈 일부를 감추고 다 바쳤다고 거짓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정말 큰 충격입니다. 어느 교회도 이런 이야기는 역사 기록에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이 실제 사실을 기록하였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읽고 가슴에 어떤 형태로든 충격이 오셨을텐데 어떤 것 때문에 충격이 왔습니까? 아니 그런 거짓말을 했다고 그렇게 죽일 수가 있어! 하나님도 너무 하시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말했다는 것이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소유인 땅을 팔아 일부만 바치고도 다 바친 것이라고 한 것이 거짓말이긴 하지만 그렇게 큰 죄입니까? 요즘 십일조도 안하고 헌금에 인색한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이 부부가 남의 돈을 가지고 바친 것입니까? 교회 돈을 떼먹기나 했습니까? 자신의 땅을 팔아 전부는 아니지만, 헌금한 것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오늘도 예배드리고 죽어나갈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런 죄 때문에 죽어야 된다면 무서워서 예수라도 믿겠어요?’ 이런 마음이 솔직히 우리의 마음이니까 이 본문으로 설교하기가 참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본문은 이미 설교하도록 주어진 본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마음이 흥분으로 뛰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설교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 본문을 택하라고 했으면 저는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은혜로운 설교를 하기에는 너무나 어렵다고 느껴지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로운 분위기에 오히려 찬물을 끼얹는 것과도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본문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메시지가 있으리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그리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기대하며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11절 말씀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11절에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 하나님께서 두려워해야 할 일을 두려워하게 하신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말은 평소에는 두려워할 일인데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앞으로 더 큰 일을 하실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아니니아와 삽비라가 지은 죄, 헌금하고 죽어 나가야 하는 죄가 무엇입니까?

 

. 성경은 한 마디로 성령을 속인 죄라고 했습니다. 

3절에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여기 네가 성령을 속이고 이는 아니니아와 삽비라가 지은 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세 가지로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시기심과 탐심과 거짓말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을 팔아 헌금을 했지만 동기는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바나바가 땅을 팔아 바친 일로 온 교회로부터 칭찬을 듣는 것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자기도 받고 싶었습니다. 나에게도 땅이 있는데 이것을 팔아서 교회에 바치면 사람들이 이렇게 나를 칭찬하겠구나.’ 그러나 막상 땅을 팔아 다 바치려고 하니 돈이 아까왔습니다. 탐심이 역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땅 판 것을 다 바쳤다는 칭찬은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그것이 땅 판 것의 모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지은 죄입니다.

 

마귀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도 처음에는 거짓말을 할 생각을 넣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생각의 뿌리를 살피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생각이려니 하고 품은 것입니다. 이것을 심각하게 여겼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떨쳐버렸겠지만 그것이 생각이니까 그냥 마음에 품었습니다. 시기심이 일어나고 탐심이 일어나고 그러자니 거짓말을 해야되고 그렇게 하자!”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4절에 베드로가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고 야단을 친 것입니다. 이 부부는 자신이 지금 사람에게 거짓말하는지 하나님께 거짓말하는지도 분별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사단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영이 어두워졌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분명히 예수 믿고 성령의 체험도 했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마귀가 주는 생각을 품으니까 사단이 마음에 가득해져서 불신자와 똑같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생각의 근원을 살펴야 합니다. 4: 23절 말씀처럼 무엇보다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모든 지킬 것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 참된 교회는 순결과 거룩성의 회복을 갈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당신의 독생자의 생명을 속전으로 내어주시고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속물이 되셔서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죄로 인해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께서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구속으로 인해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바로 오늘 우리입니다. 그 은혜 앞에 살아야 할 우리는 바로 거룩의 삶, 구별된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한 뒤 2장에서 4장까지의 관심은 교회성장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 성장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했습니다. 기도한 대로 사도행전 교회는 2:41절에 3 천명, 4:4절에 보면 남자만 5 천명으로 놀랍게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5장을 계기로 교회의 관심이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거룩과 순결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한 개인의 정직과 위선의 문제를 제기할 뿐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도덕성과 순결성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과제를 제시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시기심, 탐심, 거짓말은 우리가 늘 쉽게 넘어지는 죄이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도 누구나 그런 죄는 다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심히 두려운 죄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왜 죽었는가? 죽을만한 죄를 지었네.’ 이렇게 생각이 들기보다는 어떻게 그런 정도를 가지고서 하나님이 그렇게 무서운 벌을 주실 수 있는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품어야 될 생각이 있고 내 좇아야 될 생각이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여러분이 정확해야 합니다. 마귀가 주는 생각을 품으면 큰일 납니다. 마귀가 주는 생각을 품으면 가룟유다 같이 마귀가 들어와 주인노릇하게 됩니다. 성령의 임재를 전혀 느끼지도 못하게 되고 불신자처럼 영적으로 소경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 두려워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6:7절에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업신여긴다는 말은 조롱한다, 속인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아무리 잔꾀를 부려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139:8절에 보면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라고 되어 있는데, 하늘 꼭대기로 올라가도, 땅 속 깊이 내려가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9-10절 보면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새벽 날개는 동녘에 해가 떠오를 때 비추는 햇살을 가리킵니다. 그 빛의 속도만큼 빨리 바다 끝으로 달려가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다르십니다. 결코 인간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참으실 수는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바로 벌하지 않으시고 회개하도록 기다리실 수는 있습니다. 렇다고 보지 않으시거나 알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을 통해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을 남겨두신 이유는 우리의 죄가 아나니아 부부보다 약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은혜로 우리를 남겨두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있는 가면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동일하게 아나니아와 같이 징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 전에 돌이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의 탈을 벗으십시오. 잘못된 가면을 벗으십시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높이 십시오. 마음에 시기심조차 탐심조차 마음에 일어나는 거짓말하고자 하는 욕구조차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11절에 보시시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여기, “온 교회에는 우리 교회도 포함되고 이 일을 듣는 사람에는 저와 여러분도 포함됩니다. 성령께서 이 사건을 왜 기록하게 하였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괜히 두렵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진정한 부흥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잠깐 불꽃처럼 일어났다가 사그러져 버리는 일시적인 부흥이 아니라 지속적인 부흥, 모래 위에 세워지지 않은 부흥, 겉으로만 요란하고 얼마 동안만 뜨거웠던 부흥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흥을 얻으려면 반드시 정결함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 우리를 깨끗케 하십니다. 정말 심각한 죄인데도 죄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을 이 시간 드러내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우리의 사건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게 하셨습니다. 이 시간 진심으로 죄 같지 않다고 여기며 넘어갔던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정결함을 받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난주 우리가 사랑했고 존경한 심기분 권사님의 장례를 치루고 오늘 가족들이 여기 나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돌아가신 분의 관을 운구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때 여러분은 관 속에 누워있는 분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분처럼 살다가 그분처럼 떠나겠다는 생각이었습니까, 아니면 이런 분의 삶은 절대로 본받지 않겠다는 다짐이었습니까? 언젠가 여러분의 생이 끝났을 때, 누군가가 여러 문의 관을 운구하리란 생각을 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때 그 운구 위원들이 관 속에 누워 있는 여러분을 위해 무슨 생각을 해주기를 바라십니까? 례식은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남겨 주는 가장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당신의 품으로 부르십니다. 6:1절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러분, 하나님 품으로 담대히 나아 가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더럽고 추해도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모두 품어주시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깨지고 뒤틀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져 치유하여 주시고, 상처를 싸매어 낫게 해 주십니다. 십자가는 회복의 은혜요, 회복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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