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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사도행전 강해(13) - 당신은 한 알의 밀알이었습니다.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4-12-01 | 조회: 175

당신은 밀알이었습니다.  7:54-60. 2024. 12/1 행전 강해 

 

우리는 새 시대를 열어가는 갈망 속에서 사도행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행전 강헤 13번째 시간으로 우리는 한사람 스데반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면류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스데반의 최초 등장은 행 6장에 7명의 안수집사로 세상에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는 단한편의 설교를 증거하다 돌로 맞아 순교하는 신약교회의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순교는 오히려 믿는 사람들의 가슴에 진리의 불을 붙이는 엄청난 영향력을 보여줍니다.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가 그렇게 큰 파장을 불러올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의 설교가 자신을 죽음으
로 내몰지도 몰랐을 것이고, 그 설교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오래 기억되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그의 죽음을 통해서 바울이라는 사람을 준비하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는 분명 하나의 밀알이었습니다. 12: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주님의 이 말씀대로 스데반은 하나의 밀알이 되어 죽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 열매로 하나님의 무대에 등장한 바울은 온 세계를 누비며 온누리에 복음을 전한 전도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리더쉽의 대가인 존 멕스웰은 리더십의 본질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합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건겅한 리더십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더 나아가 존 멕스웰은 여러분이 선한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면 결코 다른 사람들을 이끌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을 합니다.

 

본문에 보면 그가 산헤드린 공회 법정에 서게 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을 거슬렀다는 것입니다. 먼저 스데반은 성전을 모독했다는 죄목입니다. 그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에 엄청나게 집착했습니다. 성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성전을 거룩한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너무 지나쳐서 건물일 뿐인 성전을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요2:19절에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헤드린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판결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성전을 모독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어떻게 감히 성전이 헐린다는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율법을 범한 죄로 고발을 당합니다. 스데반은 율법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율법의 궁극적인 의미를 이루셨고, 더 이상 율법의 문자적 지킴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삶으로 나아가야 함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들 앞에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51절에 보면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라고 다르지 않아!’라고 말한 것입니다. 조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라고 외치던 선지자들을 죽인 것처럼, 너희들도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이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 마음에 찔려 이를 갈거늘
54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오늘 본문에 보니까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이 찔렸다고 얘기합니다. 여기 '찔렸다' 헬라어로 '디에프리온토'라는 이 말을 직역하면 '화살이 과녁에 꽂혔다' 는 얘기입니다. 제가 몽골에 가면 역사 박물관은 들를때가 있습니다. 이 세계를 한때 지배했던 몽골족이 지금은 처참하게 3백만 밖에 남지 않았어요. 지금 그들이 얼마나 가난하게 사는지,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이 역사의 아이러니가 저는 궁금했어요. 박물관을 쭉 둘러보았습니다. 그중에 징기스칸이 쓰던 활을 전시해 놓았어요. 그 활이 얼마나 큰지 화살 하나가 창만 했어요. 징기스칸이 대단한 거구였는데, 그 큰 화살을 활에 매겨서 장사가 힘껏 당겨 놓았을 때 그것이 과녁에 가서 깊이 꽂힙니다. 바로 이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찔렸어요. 꽂혔어요. 즉 정곡을 찔림 당한 겁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산헤드린 사람들은 스데반이 설교할 때 이 설교를 남의 얘기가 아니라 나를 두고 한 말씀으로 알아들었다는 겁니다. 말씀이 빗나간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이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이것은 내게 말씀하신 것이다. ! 저 사람은 나한테 얘기하고 있구나!'하고 과녁에 화살이 꽂히듯 그들의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찔렸다고 하더라도 그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성경은 가르치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찔림 받기 위해 온 사람들입니다. 무슨 말씀이든 '이것은 나를 두고 한 말씀이구나, 내게 주신 말씀이구나'하고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찔림을 받고 난 이후에, 그 이후에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찔림을 받은 다음에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왜 내 얘기를 하냐고 쓸데없이 다른 데 신경을 씁니다. 54절을 다시 한번 보세요.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그러나 똑같은 맥락인 사도행전 2 30절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를 하는데 여기에도 역시 찔렸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일반 유대인들인데 3,000명이나 되었습니다.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베드로는 설교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화살이 되어 꽂혔을 때 그들은 반항하지 아니하고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했습니다. 똑같은 말씀이 선포되었으나 한 무리의 사람들은 이를 갈았고, 한 무리의 사람들은 가슴을 열었습니다.  3,000명은 그날 성령의 충만함을 얻고 구원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떤 반응을 가지고 살아왔습니까?

바울은 우리에게 예배자로서 평생 놓쳐서는 안 될 말씀을 고난과 핍박의 한 복판에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말씀을 대하는 모습 앞에 감동을 가지고 살전2:13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정보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신적 권위를 지니며 자신들의 삶과 믿음에 실제적으로 역사하는 말씀임을 믿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지만, 복음 전도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성령의 역사를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로 반응하는 자를 보좌에서 벌떡 일어나 맞이할 것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찔릴 때 귀를 여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가슴을 여십시오. 그리고 들으십시오. 스데반은 이 한편의 설교를 남기고 순교의 자리에 섭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는 모습을 보십시오.

 

. 기도의 줄을 놓치지 않습니다. 59-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그는 마지막 억울한 죽음 앞에서도 우리 성도가 본받아야 할 기도를 합니다. 첫째는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여기 스데반이 기도할 때 주 예수여!’하고 외치는 것은 대단한 신앙고백입니다. “주여라고 외치는 순간부터 나는 종입니다. 나에 대한 모든 주권은 주님에게 있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구원자로서만이 아니라 나의 주인으로 모실 때 신앙의 대전환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 되심이 정확히 잡혀있는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영적 눈이 열리므로 영원한 세계를 보고 고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주여 이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스데반은 지금 주변에 증오와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얼굴에 피가 나고, 온 몸에 멍이 들어가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장 처참하게 고통 가운데 죽어가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기도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로 용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반은 이 땅의 생애를 마치는 그 순간을 사랑으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유종의 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을 추하고 악하게 마무리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쉬움이 남는 마무리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정말 아름답게 마무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렇다면 여러분, 위대한 설교가 스데반의 죽음은 교회에 큰 손해였을까요? 이렇게 복음에 열정이 가득하고, 복음의 정수를 정확히 꿰뚫고 있는 스데반의 순교가 헛된 일이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스데반은 한 알의 밀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등장하는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이전에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이름, 그러나 이후에 사도행전에 중심이 되는 이름입니다. 바로 사울입니다. 분노에 가득 찬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 58절에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고 말합니다.

 

사울이란 이름이 나옵니다. 그가 훗날 그 유명한 바울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세계에 증거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스데반의 죽음 앞에 얼마나 잔인한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8:1절에 사울은 그가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이런 사람도 다 있습니다. 이 사울의 핍박은 부흥하는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잔멸하는 잔임함의 극치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을 과감하게 죽였어요.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리고 이것도 모자라서 예수 믿는 사람,  230km 밖에 있는 사람까지 전부 잡아다가 감옥에 넣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불교신자라도 이렇게 못하잖아요? 런데 사도 바울은 안 믿는 사람이 아니라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구약성경,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이렇게 악하게 행동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유는, 그가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제로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자신을 믿는 사람이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미워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에게 말의 상처를 입힙니다. 여러분, 이 인류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전쟁이 누구의 이름으로 일어났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발발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자군 전쟁입니다. 임신한 부인의 배를 갈랐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자신의 ‘ ’신념을 믿고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자신을 들여다보십시오.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나요? 오늘날 교회에 나온 지 10 20,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의 마음에 칼을 꽂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목회자들이 모여서 서로의 마음을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자신을 믿는 겁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데반은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용서했습니다. 이 기도는 단순한 용서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 행위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말로는 알지만, 그 실질적 영향력을 체감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한 사람의 기도가 세상과 역사를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스데반의 죽음 속에 기도의 줄을 놓치지 않은 이 용서의 기도는 사울을 바울로 바뀌는 계기가 됩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분명 하나의 밀알이었습니다. 하나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을 때, 그게 그렇게 큰 열매를 맺게 될 줄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스데반의 기도는 단지 개인적인 순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확장을 위한 씨앗이 되었고, 특히 바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용서는 인간의 본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스데반이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며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어렵게 하고 상처 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용서의 기도는 단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자유케 하는 길입니다.

 

스데반은 사람들이 예수님만 주목하기를 원했지, 자기 자신이 주목받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돌을 맞으면서도 그의 시선은 하늘을 우러러 주님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죽어가면서도 용서를 구하고 영원한 천국을 사모했습니다. 그야말로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12월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성탄은 스데반이 설교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에게는 이제 절망이 아닙니다. 희망입니다. 우리는 슬픔이 아닙니다. 기쁨입니다. 우리는 낙담이 아닙니다. 소망스러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백성이 된 것입니다.  복음은 천사가 전해 주었으나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성탄의 소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Good News), 곧 복음입니다.

 

이 소식을 우리는 우리의 가정과 그리고 올해도 등대 교회에도,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패딩 잠바를 보냅니다.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지구촌에 전쟁으로 고통당하는 곳에도 그리고 우리의 형제인 북녂땅에도 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 사람의 스데반의 순교는 영적 영향력을 통해 복음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습니다. 우리 각자도 "한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깨닫고, 믿음의 결단을 통해 새 시대를 열어갈 사명자로 살아갑니다. 이 시간 나의 믿음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스데반의 순교는 단지 그의 죽음으로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 초대 교회를 넘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도전을 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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