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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사도행전 강해 (14) - 고난의 신비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4-12-08 | 조회: 189

새 시대를 향하여 - 고난의 신비 행8:1-4 2024/ 12/8
세옹지마(塞翁之馬)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옛날 변방에 사는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이 기르던 말 한 마리가 국경을 넘어 도망쳤습니다.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위로했지만,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복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이 더 좋은 말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축하했지만,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화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던 중, 노인의 아들이 새로 얻은 말을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사람들은 걱정하며 위로했으나, 노인은 다시 말했습니다. "이것이 복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 후 전쟁이 일어나 많은 젊은이가 징집되었지만, 다리를 다친 아들은 집에 남아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생에서 닥치는 일들이 때로는 화처럼 보이지만 복으로 바뀔 수 있고, 반대로 복처럼 보이지만 화로 변할 수도 있음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현재 상황에 지나치게 일희일비하지 말고, 인생을 멀리 내다보며 유연하게 대처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여기서 '그날'이란 스데반 집사가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순교하던 날을 의미합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그 한 사람의 순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몰아닥쳤습니다.
어느 정도로 큰 핍박이었던지 그리스어 원문은 megas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백만 배를 뜻하는 영어 단어 mega가 바로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메가톤급 대핍박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본문 3절에 사울이 교회를 잔멸하여, 남녀를 무론하고 닥치는 대로 끌어다 옥에 넘겼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잔멸했다는 단어는 원래 멧돼지가 포도밭을 마구 짓밟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그만큼 폭력적이고도 잔인했다는 말입니다. 오죽했으면 여자까지 마구 잡아다 옥에 넣었겠습니까? 참으로 잔인한 핍박을 당했습니다.
이 핍박이란 사건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재산을 몰수당합니다. 형제가 끌려나가 비참하게 죽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고 야고보가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사도들이 나가서 억울하게 매를 맞고 쓰러지며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옵니다. ! 이제는 다시 잡히면 죽을 처지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지게 됩니다. 집을 두고 목적지도 없이 떠나야 했습니다. 이것은 피난이 아니라 도망입니다. 도망자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것도 다른 이유가 아닌, 오직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라는 그 한 가지의 이유 때문에 그들은 핍박을 당하며 죽어야 했고, 쫓겨다니는 도망자로 방랑 길에 나서야 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본의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를 믿으면 잘 살 줄 알았고, 복 받을 줄 알았지 예수 믿어서 이렇게 된다면야 그 누가 믿겠습니까? 그런데 저 예루살렘 초대교인들은 복 받는 것은 두고라도 예수를 믿자마자 이렇게 엄청난 핍박을 맞게 됩니다. 예수를 믿어서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서 부득불 도망을 해야 했습니다. 원치 않는 곳, 원치 않는 남의 나라 땅에서 유리 방황하며 쫓기는 나그네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 아픔이 있고, 여기에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저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흩어져야 했고,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흩어져야 하는지? 당시에 뜻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고통의 이유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왜 핍박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흩어졌다는 사건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 '흩어졌다'는 단어는 농부와 관련된 단어로, 농부가 씨를 뿌리는 행동을 표현하는 동사입니다. 뿌리되 그냥 가만가만히 뿌리는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두루 흩어 뿌리는 것입니다. 지금의 핍박이 마치 농부가 씨를 흩어 뿌린 것처럼 정말 저들로서는 감당을 못할 핍박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우연이 없습니다. 우연속에는 필연이 있고 그 필연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우연이 아니었고, 교인들이 핍박을 받은 것도 우연이 아니었고, 교회가 흩어진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섭리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1:4절이나 눅24:49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을 받았으니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1: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안주하려 하였고 현재에 만족하려 했습니다. 예루살렘에다 낙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며, 또한 재림주를 맞이하여 거기서 즐기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방으로 떠나야 할 사람들이 이방으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여야 할 사람들이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평안한 가운데 안일한 민족과 자기중심적인 것에 도취되어 그 자리에 머물려고 하였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모세가 임종을 앞두고 백성들에게 유언을 하는데 모세는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신뢰했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야기합니다. 애굽에서 노예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까지 가기위해 40년 광야라는 혹독한 훈련의 기간을 보냈습니다. 여기에 대해 모세는 신32:11-12절에 이야기합니다. “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란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을 독수리 어미에다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방법은 특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지켜주신다고 해서 모든 것이 평화롭고 언제나 만사가 다 형통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건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을 보호하시는 방법을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연단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독수리는 새들의 왕입니다. 용맹하고 강한 날개를 자랑하는 공중의 최고 권력자입니다. 독수리가 그렇게 새들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강한 훈련 때문입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들을 날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둥지에서 새끼를 밀어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새끼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기 위해서 날개를 힘껏 저어봅니다. 날개에 힘이 없는 새끼 독수리들은 힘껏 날개를 저어보지만 이내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면 어미 독수리가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새끼의 날개에 힘이 다 빠져서 더 이상 날지 못하고 땅으로 추락하게 되면 재빨리 그 강한 날개로 새끼를 받쳐서 새끼가 죽거나 부상을 입지 않도록 합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둥지에서 밀어 떨어뜨리고,새끼들은 계속 힘찬 날개짓을 하며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다가 떨어지면 또 어미 독수리가 날개로 새끼들을 안전하게 받쳐서 둥지로 데려갑니다. 그런 훈련을 반복하다 보면 새끼들도 날개에 힘을 얻게 되고 어미 독수리처럼 강하고 튼튼한 날개를 가진 하늘의 왕자들이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는 방법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강하고 아름다운 백성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마냥 우리에게 좋은 길과 평탄한 길로만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목마르게도 하십니다. 때로는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프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갈때에 우리를 엉뚱한 곳으로 인도하시기도 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사업은 잘되는데 내가 하는 일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빚을 지게 하실 수도 있고, 부도의 위기에 몰아넣기도 하십니다. 건강을 잃게 만드실 수도 있고, 때로는 자녀를 통해서 아픔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아내나 남편을 통해서 마음 아픈 일을 경험하게 하시기도 합니다. 행복하고 단란했던 가정에 큰 근심의 먹구름이 드리우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독수리가 새끼를 강하고 튼튼한 독수리로 만들기 위해서 사랑하는 새끼를 둥지에서 내어 밀치는 것처럼,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가시거나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연단하시는 순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삶이 힘들 때, 그리고 어려움이 삶에 밀물처럼 밀려올 때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는 사랑의 방법임을 기억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벧전1:7절에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금보다 더 귀하여,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삶이 조금 불편하십니까? 지금 여기가 광야일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이끄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십시다. 우리보다 앞서가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가장 복된 자리에 쉬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두려움이 아니라 설렘으로 기대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참으로 신비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라고 하였습니다. ‘흩어졌다는 말은 앞서 억지 로 된 일입니다. 죽이려고 하니까 도망간 것이요, 그럴 수밖에 없기에 불가피하게 되어진 일입니다. 이것은 피동적이요, 수동적이요,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두루 다닙니다.’ ‘두루 다니는 것은 자율적인 것입니다. 이는 능동적이요, 자원적입니다. 억지로가 아닌 자의와 자율로, 무의미한 방랑의 생활이 아니라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주어진 사건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저들은 정든 고향과 자기 집을 두고 쫓기는 신세가 되어 남의 땅에 가서 살게 되었지만 세상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신세를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이 왜, 누구 때문이냐며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볼 때는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지만, 어떻게 잿더미 같은 그 처참한 환경에서 그렇게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그들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위로와 능력이 그들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 큰 기대를 걸고 인생을 투자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눈에 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나그네들입니다. 이들은 고난 앞에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한 분 나를 한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으신 주님의 사랑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담대하게 증거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의 신비를 아십니까? 교회는 세상 집단과 달라요. 너무 신비한 은혜의 공동체입니다. 다 잃은 것 같고, 실패한 것 같고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잃어설 것 같지도 않지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일어섭니다. 복음의 능력을 알고 살아가십니까? 성령충만의 맛을 알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주님이 맡기신 사명 앞에 가장 중요시 여기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모르면 초대교회 같은 어려움이 밀려 오면 감당을 못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지난번 정암 박윤선 목사님 신학 강좌에서 저의 지도 논문 교수인 정창균 교수가 강의하는데 오신 분들에게 '기도하는 바보가 되라는 책을 주셨습니다. 그는 박윤선 박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의 삶 속에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박윤선 박사는 기도에 진력을 쏟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았던 분입니다.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 박목사님의 '죽기내기로 기도하라'는 말은 내 이성을 굴복시키고 내 자신을 쳐서 엎드려 주의 뜻 앞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세상을 살면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만신창이가 되어서 생을 끝마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29:11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하나님은 우리가, 우리가 형통함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고생고생하면서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렘애 3:32-33절에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보세요. 하나님은 내가 고생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잠깐 선한 뜻이 있어서 허용하신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를 평안하고 형통한 자리로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 가운데 어려움이 있고, 또 뜻하지 않는 문제가 있을찌라도 그 문제에 눌리지 말고 그 문제를 타고 오늘 수 있는 강한 믿음의 날개를 달고 올라야합니다. 믿음의 날개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천국의 생활을 맛 볼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날개의 힘이 없어서 높이 날으지 못하는 것이 탈입니다. 우리가 강한 믿음의 날개만 달면 그래서 높이 솟을 줄만 안다면 언제나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볼 수 있고, 바위에서 샘이 터지는 응답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능력을 체험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풍성함을 맛보는 위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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