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를 향하여 - 사울에서 바울로 행 9:1-9 ⑮ 2024. 12/15
요즘 음식문화가 보편화 되고 여기에 대해 평가하는 미쉐린이라는 세계적인 평가회가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심사가 매우 까다롭습니다. 미쉐린 가이드에 등재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다섯 가지 기준을 충족해야 합니다:
1. 재료의 수준: 신선하고 고품질의 재료를 사용하는가.
2. 요리법과 풍미의 완벽성: 조리 방식이 뛰어나고 맛의 균형이 잘 맞는가.
3. 요리의 개성과 창의성: 독창적인 요리 스타일과 셰프의 개성이 드러나는가.
4. 가격 대비 가치: 제공되는 요리에 비해 가격이 적정한가.
5. 일관성과 통일성: 언제 방문해도 변함없는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가. 그런데 5번째 항목이 매우 중요합니다. ‘언제 방문해도 변함없는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가.’ 맛이 변질되지 않는 변함없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음식이 있습니다. 오래 묵힐수록 맛이 깊어지는 음식이 있습니다. 묵은지나 장독에 묻어둔 장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에 비해 대부분의 음식들은 오래되면 부패가 심하고 도저히 먹을 수가 없습니다. 식품은 오랜 시간 저장하다보면 변질됩니다. 이때 변질은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부패’고, 다른 하나는 ‘발효’입니다. 식빵을 보관하다가 곰팡이가 폈다면, 그것은 부패입니다. 먹을 수 없어서 버리게 됩니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성숙할수록 그 인격이 숙성되어 푸근함이 묻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라도 그 품에 안기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영적인 삶이 안 되면 인격이 천박해지고 악취가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라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고 피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변화를 원하십니까? 우리 모두는 아마도 마음속 저 깊은 곳에 무언가 변화를 위한 갈망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2024년도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먼저 주님을 영접하신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생활과 그 이후의 생활이 어떻게 변하였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내 인생을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 지금보다는 좀 더 나아져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는 정말 위대한 인생을 살 것인가?' 그런 갈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못한 채 오히려 점점 세속에 빠지지는 않으셨습니까? 인간이 변화되는 게 참 어렵습니다. 반대로 변질되는 건 참 쉽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이 변화될 수 있을까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은 본문은 너무도 유명한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기독교를 핍박하던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는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당시 도시 중 하나인 다소 출신의 바울은 학문이나 가문이나 지위에 있어서 내놓을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적인 안목에서는 촉망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 시민권을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그야말로 화려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빌3장 5-6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는 열심 있는 유대교인으로 예루살렘과 외국 땅까지 찾아다니며 예수님 믿는 자들을 핍박하였습니다. 사울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행7:58절에서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현장에서 동조하였고, 8:13절과 9:1절을 보면 기독교인들에 대해 적의와 살기를 품고 교회를 진멸하기 위해 대제사장의 사주를 받아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내려가던 사람이었습니다. 1절에 보시면 사울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위협과 살기의 마음이 등등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에 살기가 있었습니다. 미움이 있었고 분노가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여야 되겠다라는 미움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어요. 그날도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오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엄청난 역사가 일어납니다.
Ⅰ. 다메섹 도상에서 3-5절
‘사울이 길을 가다가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사울아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여기에 사울은 예수 믿는 자가 다메섹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당시 상당히 먼 거리인 예루살렘부터 다메섹까지 약 230km나 되는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에 가까이 가게 되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빛이 비추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사울과 그의 일행을 비추게 됩니다. 깜짝 놀란 사울이 땅에 엎드러지게 됩니다. 그에게 비친 빛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그만 사울의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이런 소리가 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여러분 이 음성은 보통 음성이 아닙니다. 사울의 삶을 송두리채 흔들어 놓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 일은 아무도 변화시킬 수 없는 그를 존재 밑바닥부터 흔들어 놓은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그 유명한 사울의 ‘회심’의 사건입니다.
9절에 보면 이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사흘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라고 말합니다. 사흘동안 보지 못한 것, 그리고 식음을 전폐한 것은 그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말하는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예수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지금 나에게 나타난 예수가 바로 메시야란 말인가?" "예수님이 부활한 것이 사실이란 말인가? 나에게 나타난 그 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마 수많은 생각들과 물음들이 그의 삶을 흔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을 구원자로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놀라운 변화를 한 신학자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울을 바울로 바꾸셨다! 그리고 바울은 세계 역사를 바꾸었다!'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지난 세기를 살펴보면 바울이라는 한 사람의 역할 때문에 세계 역사가 바뀐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즉 종교적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그는 엄청난 영향력을 이 인류 역사에 끼쳤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달라지고 싶습니까? 변화의 삶을 살고 싶습니까?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Ⅱ. 하나님의 집요하신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집요하게 쫓고 계심을, 하나님이 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지금도 나를 찾아 헤매고 다니심을 깨닫는 자만이 참 인생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실, 성경은 영혼의 추적자에 관한 기록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하나님을 영혼의 추적자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당신을 포기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탕자처럼 멀리 떠나 그분을 잊고 방황할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을 기다리셨습니다. 고멜과 같이 세상에 짝하여 방탕할 때도 그분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쾌락에 묻혀 살 때도 그분은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 두려워 숨어있을 때에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 나서셨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가 숨어있는 장소를 몰라서 부르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또한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죽이고 전혀 회개할 마음이 없을 그 때에도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를 역시 부르셨습니다. "가인아,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성경은 우리를 목놓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녹취한 책입니다. 우리를 포기할 수 없어서, 우리를 끝까지 그의 품에 안으시려는 하나님의 추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니까? 여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수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며 스데반을 죽이고도 모자라 살기 등등하던 사울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메섹으로 찾아가 부르셨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을 찾으십니다. 오늘 당신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당신은 과연 듣고 계십니까? 오늘 왜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습니까? 왜 그토록 신앙생활을 오래하고도 우리 마음에 변화가 없습니까? 그 이유는 성경을 수없이 읽으면서도 이 애타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우리가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음성을 듣는 자는 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음성을 들으십시오. 사울을 찾으셨던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을 찾으십니다. 당신의 있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오늘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내 머리 속의 하나님이 아닌, 성경 속에 기록된 제3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 모두가 듣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우리를 사랑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마침내 그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 역시, 이 더럽고 추악한 냄새가 나는 이 세상 한 복판에 당신의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악으로 물들고 오염된 세상에 뛰어드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여기 모인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신 것입니다. 뭐 자격을 따지지도,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나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나의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고, 희생 제물로 나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성탄이 아닙니까? 그 사랑, 그 은혜 앞에 내가 해야 할 일은
Ⅲ. 자신을 올바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데 가장 방해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사람들이 예수를 못 믿는가? 또 예수를 믿고 나서도 왜 신앙생활을 잘하지 않는가? 신앙생활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입니다. 이 세상 살면서 신앙생활 하는데 가장 원수가 자신입니다. 본문의 사울이 그러했습니다. 모든 판단의 주인이 자신이었어요. 왜 사람들이 교만한 줄 아십니까? 자신을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왜 함부로 남을 정죄하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못 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못 보는 이유는 하나인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오늘 사울은 자신을 보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었던가, 내가 얼마나 교만해서 내 지식에 미쳐서 살았던가, 그래서 함부로 판단하여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정죄하며 살았던가를 그는 보았던 것입니다. 한때 자신의 이름을 사울!! 큰자라고 외쳤던 그였지만, 더 이상 큰 자라 하지 않이라고 바울이라 부르기 시작합니다. 작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일어설 수 없는 연약한 인생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자기에 대해 세월이 변할수록 그의 고백은 점점 더 겸손해집니다. 그의 서신 13권 가운데 고전 15:9절에 보면 1. 사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로 엡3:8절에는 2. 성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로 그리고 순교 직전에 기록한 딤전1:15절에는 3. 죄인 중의 괴수라 고백합니다. 바울이 자신의 삶에서 점점 더 자신을 낮추며 겸손하게 고백한 말씀들은 그의 신앙과 사역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울은 다메섹에서 잃은 것이 있고 얻은 것이 있습니다. 그는 강한 빛 때문에 옛날의 시력은 잃어버렸습니다. 옛날의 관점은 사라진 것입니다. 대신 새로운 안목이 열립니다. 바울의 체험은 그의 강력한 핍박의 생활만큼이나 극적인 것입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자"에서 "예수 때문에 핍박을 받는 자"로 변화되는 체험입니다. 그러나 회심의 역사가 언제나 누구에게나 똑같은 방법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예사람이 아니라 새사람으로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의 가장 아름다운 고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고전15:9-10절에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자, 그리고 자신을 올바로 하나님 앞에서 발견한 자는 하나님의 손에 나를 맡깁니다. 그렇지 못한 자는 여전히 모든 것이 다 내겁니다. 시간도, 건강도, 인생의 주인이 모두 나입니다. 내가 관리합니다. 나에게 책임이 있고 권리가 있습니다. 내 물질도 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만나 자기를 바라본 자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당신은 어느 정도 맡기셨습니까? 예수님을 믿은 후 사울의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참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남이 못 보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목표와 사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고난 중에도 기쁨과 평안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마음속에 모신 적이 있습니까? 그 전과 그 후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누가 여러분에게 물으면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해 어떻게 간증하시겠습니까? 새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내가 만난 예수를 어떻게 전하겠습니까?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