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그릇에도 고후 4:1-7 2024. 12/28 2024. 12/29
오늘이 마지막 주일인 12월29일입니다. 금년 달력을 새롭게 건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달력의 마지막 장마저 내려야 합니다. ‘세월이 덧없다’는 말이 이렇게 실감 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왜 연도수가 중요하고 연말연시가 중요할까요?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연도가 바뀐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뭐가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금년에 떠오르던 해는 내년에도 무심하게 떠오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연도수가 바뀌는 것을 중요시 여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분주한 일상의 삶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던 우리가 잠시 멈추어서 인생을 생각하고 정리할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연말이 있고 송년 주일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당연하지만 때때로 잊고 사는 인생의 진실, 언젠가 내 인생에도 끝이 있고 떠날 날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우리를 ‘질그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깨지기 쉬고 상처 나기 쉬운 질그릇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몰아닥친 작은 풍파에도 상처가 나고 흠이 생깁니다. 누군가가 말 한마디 한 것 때문에 가슴 저리도록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면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절망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7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 말을 좀더 쉽게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물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우리 안에 값지고 귀한 보물을 담아 주셨습니다. 옛날 중동지역의 왕들은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금이나 은 같은 값진 보물들을 질그릇 같은 싸구려 토기 그릇에 담아 땅에 파묻어 두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것을 기억하면서 짧은 이 한마디 속에서 다음과 같은 아주 중요한 영적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Ⅰ. 우리는 흙으로 빚어진 질그릇입니다.
독일의 어떤 이가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도대체 사람이란 무엇이냐? 비누 7개를 만들 수 있는 지방과 성냥 2,000개비를 만들 수 있는 인, 벼룩 몇 마리를 죽일 수 있는 유황과 대못한개 만들 수 있는 철분, 그리고 많은 물로 이루어진 보잘것없는 존재이다.” 어떤 과학자가 계산을 해보았는데, 60kg 나가는 성인의 몸을 분석해보니까 화공약품 값으로 따져서 값이 약 3만원쯤 되더랍니다. 한 사람의 몸값이 3천만 원도 아닌 단돈 3만 원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 코에 숨결이 끊어지고 관 위로 흙이 한 점 두 점 떨어질 그때가 되면, 과연 내 가 평생 이루었다는 그 명예, 재산, 권력, 이름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창2:7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금이나 은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싸구려 흙으로 만드셨습니까? 아마도 겸손하게 살라고 그러신 것 같습니다. ‘나는 아무리 예뻐도 그저 한 덩이 흙에 불과할 뿐이다. 네가 아무리이 세어도 겨우 한 덩이 흙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아무리 많이 소유했도 결국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 이러한 만고의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흙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다윗은 전쟁터에서 백전 백승하는 위대한 장군이요. 한 나라를 굳건한 반석 위에 세운 유대 역사의 국부(國父)였습니다. 아직도 유대인들은 다윗과 같은 지도자를 그리워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누구보다도 다윗은 자신이 연약한 질그릇이라는 것을 잘 깨달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는 시편 39편 4-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재물을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다윗은 자기 인생이 손바닥 넓이만하여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든든히 섰다. 출세했다' 하는 그 순간도 실로 허사라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재물을 쌓아 놓지만, 결국 나중에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것이라는것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고 살았습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역사상 부귀영화를 가장 많이 누렸다던 그 아들 솔로몬도 인간이 연약한 질그릇이라는 것을 알고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전 5:2절에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 곧 차원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너는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인생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강한 것 같지만 참으로 연약합니다. 대단해 보이지만 실상은 불완전합니다. 사랑한다 하지만 범위도 좁고, 깊이도 얕습니다. 남을 이해하고, 진리를 깨닫는다 하지만 제한되어 있습니다. 용기가 있는 것 같지만 쉽게 절망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존경하던 분에게도, 실망할 때 있습니다. 목사도 넘어지고, 장로도 시험에 듭니다. 기도 많이 한다 사람들도 유혹에 넘어가고, 믿음이 대단하던 이들도 별수없다고 느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흙으로 만들어진 깨지기 쉬운 질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매순간 생명을 부어 주시지 않으시면, 나는 한낱 바람인 것을, 한줌 흙인 것을 잊지 마실시오. 우리는 그저 흙으로 빚어 만든 질그릇입니다. 우리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야 할 보잘것없는 토기입니다.
Ⅱ.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엄청난 보물을 담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6절에서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자신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혈통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대의 초대 왕 사울과 같은 베냐민 지파의 자손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왕손인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당대의 3대 도시였던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다소 중 한 군데인 다소(타르수스)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철학의 진수를 맛본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학문에서도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는 나중에 유대 율법의 대가였던 가말리엘이라는 선생님 밑에서 율법을 제대로 배운 제자였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장악했던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몇 안 되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대단한 특권 계층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도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기준으로 모든 사람들을 정죄했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런 자만심으로 꽉 차 있던 청년 사울은 단 한번도 자신을 질그릇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길목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의 빛을 보았습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청년 사울의 어두운 심령에 부활하신 예수의 영광의 빛을 비춰 주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 청년 사울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자신이 깨달은 지식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자신이 자랑하던 혈통이나 인간적인 조건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에서 얼마나 시시한 것인지를 너무도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나는 큰 사람이다"라고 자랑하던 자신이 창조주의 영광의 빛아래에서 보니까. 다름 아닌 흙으로 빚어진 질그릇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사울(큰 자)이었으나, 이제는 바울(작은 자)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혈통을 사랑했으나, 이제는 사형틀인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율법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예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때의 일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7,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라“
아동문학가 정채봉 씨가 쓴 글 가운데 “세상에서 가장 짧은 동화”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내용은 정말 짧습니다.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한테 헌 옷걸이가 한마디 하였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길 바란다.”“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지요?”“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 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화를 가진 값진 존재이지만 결코 교만하거나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옷걸이가 귀중하게 여김받는 것은 아름다운 옷이 걸려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귀중한 존재로 인정받는 것은 우리 자신이 잘 나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보화가 값지기에 우리가 값진 것입니다.
Ⅲ. '질그릇은 깨어져야 안에 감추어진 보물이 더 잘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7
7절을 다시 다 함께 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은 깨지기 쉽고 보잘것없지만, 그 안에 담긴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하나님이 드러나시는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할 때, 진정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질그릇이지만 복음을 담고 있기에, 우리는 이 귀한 사명을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질그릇 같은 존재라 할찌라도 성령의 사람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쌓이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기’(고후4:8-9)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안에는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보혜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화가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날마다 자신을 깨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벗어버려야 하고, 이생의 자랑을 죽여야 합니다. 영원한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방해하는 육체적인 것들을 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라는 값진 생명의 보화가 우리 안에서 드러납니다. 본문 8-9절에 보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 망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둘러싸고 넘어뜨리려고 하더라도 우리는 답답하지 않고,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세상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아도 부끄럽지 않고, 깨어져도 아깝지 않고, 누가 우리를 멸시한다 하더라도 결코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가 가장 값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보화가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무어라 한들 그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막14장에 보면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며칠 전 베다니에 있는 한 나병환자의 집에 들어가셔서 식사하고 계셨습니다. 그 때 한 여인이 아주 값진 향유가 가득 담긴 옥합 하나를 들고 오더니,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렸습니다. 그러자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요한복음12:3)하였습니다. 향유를 담은 옥합이 깨뜨려지지 않으면 그 향유 냄새가 온 집에 가득할 수가 없습니다. 옥합이 깨뜨려질 때에 그 안에 담겨진 향유의 깊고 아름다운 향기는 풍겨나 온 집에 향유 냄새로 가득 채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욕심의 자아가 깨어질 때, 우리의 자존심이라는 자아가 깨어질 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향기가 우리의 삶에 드러납니다. 우리의 자아가 깨어질 때에만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원한 생명을 담고 있는 존귀한 존재가 되었음에도 자기 스스로 그 존귀함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존귀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몇백만 원짜리 명품백을 가지고 다니면서도 그것이 시장바구니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 명품백의 가치는 그냥 시장바구니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안고 살기에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우리 자신을 비천하고 볼품없는 존재처럼 생각하며 산다면 그것은 비극중에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크신 사랑을 베푸셔서 우리를 하늘나라 백성 삼아 주시고, 하늘나라 백성답게 세상의 그 어떤 존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셨기에, 우리 스스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쓸모없는 존재야. 나는 실패자야. 나는 비천한 사람이야.’ 그렇게 말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 생명의 주님으로 오신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머물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좌절할 수 없습니다. 낙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생명이 있는 한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품고 사는 사람에게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해 새 힘을 얻어 강하고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내 삶에서 무언가가 조금 사라졌다고 낙심하지 마십시다. 조금 잃었다고 풀 죽어 살지 마십시다. 우리에게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우리를 영원히 죽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감에 있어 모든 가능성을 보게 하고, 그 가능성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게 해 줍니다. 주님의 생명을 가진 자답게 담대하게 사십시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사십시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2024년을 보내고 2025년을 맞이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서 소망을 품으십시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빛을 비추는 질그릇으로서 세상 속에서 담대히 살아가십시오. 다시 한번,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심을 신뢰하며 이 연말과 새해를 맞이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