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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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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희망( 엡1:15-23) 2010. 8.15 에베소서강해3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0-08-16 | 조회: 1870
여러분의 기도로 우리 교회 청년들이 중국의 단동을 도착해서 압록강을 시작으로 두만강까지 북한 접경지역을 무려 2200Km를 다녀왔습니다. 무엇보다 중국에 100년 만에 동북 삼성에 쏟아진 엄청난 홍수로 인한 피해가 일어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가는 도중에 빗길을 헤치고 백두산을 올랐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백두산은 해발이 2744m 미터로, 우리나라에서 최고 높은 산이 아닙니까? 중국은 이 산을 장백산이라고도 하면서 상당히 자부심을 갖고 거기다 공항을 만들고 주변에 위락 시설을 만드는 대대적인 공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백두산 길이 하루가 걸렸습니다. 뭐, 조금도 지루하지가 않아요. 원시림으로 빼곡이 둘러쌓인 길을 따라 끝도 끝도 없이 달렸는데도 여전히 그 산의 봉우리가 보였던 것입니다.



저는 백두산을 보면서 우주 만물 가운데서 가장 높고, 크시며, 영광스러우신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야, 백두산이 높은 산인 줄은 알았지만 진짜 높구나. 산도 높으니 몇 시간을 가도 그 밑에서 빙빙 도는 것 같은 느낌을 받거늘, 이 우주 만물 가운데서 가장 높으시고 크시고 영광스러우신 주님이야 오죽하겠는가? 어디를 간다고 주님의 눈을 피하겠는가? 어디로 간들 그 크신 영광에서 빠져나갈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와 같이 크고 높으신 주님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고 있는 관심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분이 전심으로 사랑하시고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는 대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회입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늘 마음에 두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희망을 거는 대상이 교회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교회라는 존재에 대해 새삼스럽게 주목하지 아니 할 수 없습니다.



특히 23절에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주님께서 주님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 만물들을 충만케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타락한 인간 사회는 물론이고, 병들고 훼손된 우주 만물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채우실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바울이 세운 교회는 정말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오늘의 교회처럼 수천 수만명이 모이는 교회는 없었습니다. 고작해야 수십, 수백명입니다. 오늘의 교회처럼 건물이 크거나 재정적으로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늘의 교회처럼 한 도시에 수십 수백개의 교회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고작해야 한 도시에 교회가 하나 있을까 말까해서 교회의 대사회적 영향력이라는 것은 정말 미미할 때입니다. 바울은 그 때 장차 이렇게 미미하고 보잘것 없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충만케 하실 것을 미리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번찬 희망을 가지고 자신이 눈물과 기도로 섬겼던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2가지를 놓고 기도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 또 하나는 마음의 눈을 밝혀달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해 중보기도한 첫 번째 내용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깊이 더 바로 잘 알게 해 달라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먼저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까요? 신앙인이라면 내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분명히 아는 일이 우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결코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안다’는 동사는 ‘동침한다’, ‘동거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서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부가 한평생 동침동거할지라도 서로 알려고 하지 아니하면 일생 남남으로 살 수 밖에 없거늘,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이신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마음과 노력없이 어찌 하나님과 동거할 수 있으며, 어찌 그 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기를 하나님께 간구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어떻해야 하나님을 알아 가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여기 17절 중반절에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신’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영’(靈:프뉴마) 이라는 뜻으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십시오”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적인 것을 잘 깨달을 수 있는 지혜로운 정신과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도와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제목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알도록 기도해야 합니까?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도록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이명박 대통령 잘 아시지요? 대통령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이명박 대통령을 아는 것과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를 아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대통령을 아는 것과 직장 상사를 아는 것, 여러분의 자녀와 배우자를 아는 것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차이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도록 도와주십시오”라는 기도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빈들에서 죽였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쌓인 가인에게는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철저하게 경외하던 다윗은 남의 아내를 데리고 궁중의 밀실에서 통정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욕정 앞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애굽에 도망갔을 때 아무도 위협하지 않는 가운데 스스로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가친척을 떠나는 용단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객지의 까닭 없는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분을 인식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선교와 봉사 그리고 섬김의 행위를 아름답게 행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 앞에서, 욕정 앞에서, 두려움 앞에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은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그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아십니까? 그동안 우리의 기도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날마다 생활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건강과 사업과 자녀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것도 좋은 기도제목입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맛보기 원한다면, 오늘부터 우리의 기도제목을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나에게 허락하여 주세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기도제목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기도해야 할 기도제목은 ‘하나님, 우리의 마음눈을 밝혀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가면서 우리가 보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아십니까? (우리 교회 시각 장애우- 희망을 노래합시다를 점자로 책을 펴냄)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란 유명한 글을 아시지요. “만약 내가 사흘간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에는 나를 가르쳐 주신 셜리반 선생님을 찾아가 그분의 얼굴을 뵙고 싶습니다. 둘째 날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트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들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에는 아침 일찍 큰 길가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낮에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의 상품들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밤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마지막으로 사흘간 눈을 뜨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상한 방법으로 눈이 항상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눈은 하루에 25,000번 이상 깜박인다고 합니다. 깜박이는 중에 눈물샘에서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절한 양의 눈물이 끊임없이 나와서 눈을 항상 깨끗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야만 눈이 흐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경을 끼고 다녀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늘 주머니에 안경 닦는 수건을 넣고 다닙니다. 한두 시간만 안경을 끼고 있으면 안경알에 먼지가 앉아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밝히 보려면 자주 닦아 줘야 합니다. 우리의 영의 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의 눈도 자주 닦아주지 않으면 그만큼 흐려지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마음의 눈을 밝혀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눈이 있다는 말씀은 언뜻 보기에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도 마6:22절에서 ‘눈’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여기서 말씀하시는 "눈"은, 단순한 시력(視力)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눈은, 새로운 시각(視覺)을 말합니다.



강인선(姜仁仙) 씨가 쓴 '하버드 졸업식 날엔 비가 내리지 않는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여러 내용 중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하버드 대학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가 말하는 하버드 대학의 힘은, 남과 '다르게 생각하기'에서 온다는 겁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하는 공부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배우는 공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넘어서는 창의적인 대안(代案)을 제시하는 공부를 한다는 겁니다. 남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설명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 다른 사람이 생각지 못하는 것, 다른 사람과 다르게 생각하는 대안(代案)을 찾는 데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하버드 대학의 힘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조금은 조심스럽지만 저는 '동성교회'가 지금 이대로 '좋은 교회'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동성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아니면, 또 하나의 이 시대적인 교회 중 하나인가는 저와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저는, 동성교회를 목회하면서, 요즘에 와서 솔직히 많은 걱정과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교우들 중에는, 대안적인 새로운 시각을 가지기 위해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이미 형성된 여러분 나름대로의 가치와 전통,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그 신앙이 기준이고, 바른 신앙이라는 것을 고수하고, 그것을 주장하려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이고, 주님을 또 다시 슬프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이 시대 우리도 한번 쓰임을 받는 일꾼으로 살아가려면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바울도 에배소 교인들의 눈을 밝혀 달라고 기도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본문에는 세 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르심이 소망이 무엇이며, 두 번째는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크심이 무엇인지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산다면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늘은 특히 광복 65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해방은 맞이했지만, 아직도 북한에 사는 내 동포들은 어두움에 갇혀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이 땅의 해방은 인간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제 남북의 통일의 해방 역시 하나님의 전적인 간섭이 없이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뜻 깊은 해에 한기총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8월 15일 전국 70여개 도시와 세계 70여개 도시에서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희망’이라는 주제 아래 한국교회의 민족복음화 사명을 확인하고, 나라와 민족을 향한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기 위한 ‘한국교회 8.15대성회’를 개최합니다. 이 모임이 단순히 행사에만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교회는 절망감과 패배감에 젖어 헤어나지 못하는 이 민족의 가슴에 다시 희망의 불꽃을 붙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으로 통일을 꿈꾸며 청년들과 함께 했던 이번 선교 여행은 참 의미가 있는 여행이었습니다. 갈 때부터 가야 할지 말아야할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너무도 결단하기가 힘든 여행이었습니다. 중국의 홍수로 인해 가는 뱃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가는 날 아침까지 배가 뜰지를 결정을 못하다가 비로서 10가 조금 넘어 항해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막상 배를 타니까 단동 쪽에서 입항을 안 시켜 줄 수 있다는 통보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꼼짝 없이 배에서 이틀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토요일 아침 배 승무원에게 물었지만 결정이 나지를 않았다는 이야기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비로서 입항 결정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참 눈물이 핑 돌드라구요.



그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홍수로 인해 갈 수 없다면 심양으로 가자는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을 때 마음이 찹찹했습니다. 그러면 만주로 가는 길에 고구려 유적지나 압록강을 따라 가는 길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 당국이 단동시내를 출입하던 통제를 우리가 배에서 하선할 때 해제를 한 것입니다. 압록강이 범람 할 것을 대비하여 우리처럼 육갑문을 막았던 것을 열었고 우리는 바로 그 열린 길로 압록강을 따라 백두산을 향해 올라 갈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일어났습니다. 저의 실수로 단체 비자를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경험한 분이 있겠지만, 동남아에서 여권이나 단체 비자를 잃어버리면 얼마나 낭패입니까? 다행히 호텔 방에다 둔 비자를 우여곡절 끝에 찾아서 무시하게 한국에 올 수가 있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지만, 우리의 가는 길을 어쩌면 그렇게 사단이 방해를 하는지 숨이 막할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이번에 우리 청년들이 중국에 간 것은 지금은 갈 수 없는 내 북한 동포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이 선교에 함께 동참한 저 청년들은 통일 세대를 가꾸어야 할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저들에게 북한의 그 참람한 모습을 보여 주며 함께 기도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선교는 사탄이 가장 싫어합니다. 보세요. 우리의 가는 길을 어쩌면 저렇게 방해 할 수가 있습니까? 바다를 못 건너게 하고 땅을 내딛뎠지만, 마지막 두만강 하류인 동해바다가 맞닿은 방천을 200km만 가면 되는데 운전사가 못 간다는 것입니다. 겨우 설득을 해서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단체 비자를 잃게 만들어서 하늘을 막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방해하는 사단의 역사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오히려 모든 교우들의 중보기도와 현장에서 청년들이 순간 순간 더 기도하도록 하나님은 최악의 상황을 최상의 상황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바울은 차디찬 감옥에서 자신의 내일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 올지 모르는 이 절망의 현장에서도 당당하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구원받은 성도들 가운데서도 이러한 능력과 풍성을 맛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누릴 마땅한 권세와 충만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 가운데 많이 있습니까? 뉴질랜드에 키위(kiwi)라는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날개는 퇴화되어 없어졌고, 굵은 두 다리가 무거운 몸집을 겨우 지탱하고 있습니다. 키위는 매우 겁이 많아서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나와 땅을 세게 밟아 꿈틀거리는 벌레의 냄새를 맡고 발에 닿는 촉감으로 먹이를 찾습니다. 그렇게 주로 밤에만 활동을 하다 보니 눈도 퇴화되고 말았습니다. 키위는 그야말로 모양만 새 일뿐, 새가 아닙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때 ‘모양만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습니다. 세상을 정복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마귀를 정복하는 능력이 여기 있습니다. 사탄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권세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여기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스림의 권세가 오늘 교회 안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가 바로 오늘 교회의 지체 된 여러분을 통해 역사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들입니다. 기도로 세상을 정복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위엄이 있습니다. 우리의 품위가 있습니다. 당당함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이 섬겼던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마음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 생을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우리 역시 그 희망이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만이 우리의 희망임을 알고 어떤 문제, 어떤 어려움이 있을찌라도 함께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힘입고 힘 있게 살아가는 삶이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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