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지어져 가는 공동체 (엡2:11-22) 2010.9.5에베소서강해6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0-09-06 |
조회: 2344
교회의 생명은 세상과 다름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은 세상 사람과 얼마나 다르냐에 달려있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자기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하나님이 그를 고향에서 불러냈셨을까요?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사람, 다른 사람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방인 된 우리를 예수 믿도록 불러내셨습니까? 왜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셨습니까?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불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적으로 흐르는 모든 사상의 주제를 보면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데 있습니다.
'거룩하라'는 말을 바꾸면 '다른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과 세상 사람은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빛과 어두움이 다르듯, 살아 있는 고기와 썩은 고기가 다르듯,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철저하게 다릅니다. 만일 교회가 세상과 비슷하거나 세상과 같으면 그날로부터 교회는 죽음을 자초하게 될 것이고, 성도의 삶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마음에 잘 간직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왜 세상 사람과 근본적으로 달라야 하는지 3가지 근거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을 때 '아, 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분명 세상 사람이 아니야. 나는 달라.' 하는 의식이 항상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것이 생각을 통제하고, 말을 지배하고, 행동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공동체성을 강화시키기 위한 세 가지 단계를 이야기합니다. 소위 예수 믿는 성도의 ‘각성(覺醒)의 3단계’입니다. 본문말씀에 나타난 시점(時點)을 나타내는 세 단어, “생각하라”(11절), “이제는”(13절)“ 그러므로 이제부터”(19절)를 가지고 우리 삶의 공동체성을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의 과거의 모습을 생각해야 합니다(11-12절).“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여기 ‘그러므로 생각하라’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았을 때의 상태를 알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과거 모습은 신앙적인 면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고, 복음을 받을 수도 없었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나오는 할례당과 무할례당은 점잖게 번역을 해서 그렇지 사실은 비아냥입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할례당,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향해서 무할례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어린애들이 포경 수술한 아이들을 놀리는 것처럼, 인간의 성기문제를 가지고 서로 비아냥거리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하나님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같은 사람의 모양으로 지은 것은 유대 사람들이 장차 이방인들을 종으로 부려먹을 때에 혐오감을 주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이요, 또한 이방 사람들을 많이 만드신 이유는 하나님이 지옥 불쏘시게 감으로 사용하라고 하셨다고 해석합니다. 또 요세푸스라는 역사학자는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만일 이방인 산모가 고통당하는 것을 보거든 절대로 도와주지 말라고 한답니다. 왜냐하면 그를 도와주면 이방인 한 명을 이 세상에 더 탄생시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이방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저주받은 삶이니까 이방인들이 산고를 느끼거든 가서 도와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는 요즘처럼 산부인과도 없고, 전문적인 산파도 없었습니다. 119를 부를 수도 없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아이를 낳는 사람은 철저히 이웃이 도와줘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밖에서 일하다가 아이를 낳기도 하고, 또 어떤 산모는 집안에서 아이를 낳기도 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아이의 생명뿐만 아니라 산모의 생명까지도 위험해집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산고를 겪는 사람이 이방인이면 절대 도와주지 말고 죽이라고 했습니다.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이만큼 이방인을 멸시하고 사람 취급을 안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영적으로 보면 어떤 존재였습니까? 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무슨 말입니까? 우리도 과거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계시는지 조차도 모른 체 ‘아웃사이더(Outsider) 인생’으로 살아왔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이 없을 때는 자신이 대단한 존재 같았지만 믿음을 가지고 과거의 삶을 되돌아보면 정말 어떻게 살았는지 끔찍할 정도로 어려운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완전했던 자는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핍박자도 있을 것이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살았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볼때 이런 죄 저런 죄를 범해서 그 때를 돌이켜 보면 고개를 들 수 없는 수치를 간직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엡2:1절의 말씀처럼 허물과 죄로 죽은 소망이 없는 인생이 바로 내 자신임을 깨달아야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주신 현재의 새로운 신분과 직분을 기억해야합니다(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여기 ‘이제는’ 이라는 말은 우리의 신분의 변화 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 신분의 변화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일어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버어트란트 러셀은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안 되었는가?”라는 그의 저서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그의 논리는 당시 영국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면서 기독교 전파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러셀이 내세우는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어떻게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메달아 비참하게 못 박아 죽이는 아버지가 있을 수 있는가, 그렇게 잔인무도한 하나님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십자가에 달린 참혹한 예수님의 모습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러셀이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의 잔인함을 보여 준 것입니까?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 자체가 아니라, 그 죽음을 통해 담당하신 우리의 죄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값을 담당하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면서 죄에 대한 심판이 얼마나 비참하고 무서운가를 볼 수 있어야합니다. 이 십자가의 엄청난 희생의 댓가로 하나님과 막힌 담, 그리고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죄의 담이 다 허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고 사는 우리들이 교회 안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에 에베소 교회는 예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담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편견의 담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 무서운 암과도 같은 교회를 침제의 늪에 빠뜨리고, 시험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누구에겐가 소외를 당하거나 심한 왕따를 당할 때 어떤 느낌을 갖게 됩니까? 일본 사뽀르에서 사역하시는 이선교사님의 아들이 고 1때입니다. 아이가 잘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현지 일본 아이들에게 이지매를 당하고 정신 충격이 온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왕따를 당한 것입니다. 같은 또래 아이들에게 받은 그 충격 앞에 사랑하는 아들이 전혀 다른 아이가 되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한국을 떠나 17년 동안 정직하게 주님을 위해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른 그곳에 복음을 들고 자신의 젊음을 다 바쳤는데 어느 날 이 가정에 먹구름이 온 것입니다. 이 아이가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몇 번이나 시도하고, 어머니에게 칼을 들고 달려드는 그 엄청난 일 앞에 그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 보아야하는 그 부모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누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최근 들어 초, 중, 고교의 문제 가운데 하나가 ‘왕따’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두지 않으신 분들은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학교에서 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자녀를 둔 부모님들을 상담 해보면 생각보다 아주 심각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작년 한해동안 우리나라에서 이 왕따 피해를 정식으로 신고한 건수만 약 육천 건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는 해마다 아주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바로 이러한 왕따, 따돌림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전학을 가는가 하면, 학교를 그만 두기도 하고, 심지어 자살을 시도하는 아이들까지 생기고 있습니다.
지금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이 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교회 안에 과거의 모습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사람을 무시하고 상처를 주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여기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선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과 어떻게 다르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를 권속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권속”이라는 말은 그 의미가 가족과는 약간 다릅니다. 가족은 아버지, 엄마, 형, 누나, 동생 이렇게 구성되어 있는데 권속이라는 말을 쓸 때는 가족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그 가정에 함께 사는 모든 사람, 즉 머슴과 노예까지도 권속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하고 서로 소외 시키며 고통 받으며 사는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피로 불러 모으셔서 하나님의 권속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제각각 성격이 다르고 출신지가 다릅니다. 모든 것이 다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한 공동체로 만드시고 교회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는 나의 권속이란다. 함께 사는 공동체야.” 이 권속 안에는 정말 다양한 빚깔의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롬14:7절에도 바울은 교회 성도들에게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여기에 받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셨습니다.ⅱ) 너희도 서로 받으라.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내가 완전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허물과 실수투성이 모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이기적인 요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모습 그대로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로 나아갈 수 없는 죄인들인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까지 던져 주셨습니다.
우리가 대단한 존재라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기 까지 하신 것은 우리가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조건없이 용납하셨습니다.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은혜를 깨달았다면, 이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면 이제 주께서 나를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있는 모습 그대로 서로를 받아야 합니다.
보세요. 교회생활을 하면서 누가 쉽게 갈등하고 누가 쉽게 상처를 받습니까? 믿음이 약한 자는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행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해선 안되는 일을 앞세우고 확신이 없으면서 남이 하는 것을 잘 따라 합니다. 이해를 해 주어도 쉽게 상처를 받고 아무리 거치는 것을 놓지 않으려고 조심해도 잘 걸려 넘어 집니다. 이것이 믿음이 약한 자가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약함은 하루 아침에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상당기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약한 부분을 끌어안고 허우적거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약하고 허물을 가진 사람을 포근히 감싸주려면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네가 어떻게 약한 형제를 감싸 줄 수 있겠니? 그것은 너에게 가당찮은 일이야 차라리 포기해 버려’하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네가 힘들어도 작은 예수가 되어야한다. 그렇게 해서 교회 안에 있는 약한 형제들을 감싸주고 위해 주어야 한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려면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몸부림치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읽지 못하는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얼굴을 바로 들지 못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받아주는 아름다운 삶까지 자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성령의 열매, 예수님의 풍성이 나의 인격을 통해 흘러넘치도록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이 중요한 것 하나를 가르쳐줍니다. 22절에 보면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중요한 것은 서술어의 시제가 진행형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대로 멈추는 인생이 우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실패 할 수가 있습니다. 넘어지고 부끄러운 삶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저 앉아 모든 것을 포기 할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는 삼손의 머리가 자라듯이 자라나는 인생들임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와 그의 부인이면서 전에 유명한 영화배우이기도 했던 윤정희 씨 부부가 한국에 왔을 때 기자와 나눈 대담내용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백건우 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입니다. 나이도 60세에 가까워 아주 완숙한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 남편에 대해 윤정희 씨가 이렇게 말하는 것 이었습니다 "제 남편은 정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정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 말을 듣고 기자가 놀라서 반문했습니다. "남들은 백 선생님을 정상에 오른 사람으로 평가하는데요?" 그러자 윤정희 씨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올라가는 게 한이 없잖아요. 우리는 정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어요."
이처럼 위대한 예술가들이 예술의 경지를 앞에 놓고 그곳에 이르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을 봅니다. 백건우 씨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틈만 나면 연습을 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레퍼토리가 충분한 사람인데 집요하게 노력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설정한 어떤 정상이 있기 때문에 그 정상을 향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피아노의 스피릿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는 앞으로 4~5년 동안 연주해야 될 스케줄이 꽉 차있을 정도로 살아 있습니다. 예술의 경지를 추구하는 사람도 이런데, 하물며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영광스러운 신분에 있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에 게을리 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우리는 함께 지어져 가는 공동체입니다. 누구하나만 독불 장군식으로 두드러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나야합니다. 크리스티안 A. 슈바르츠라고 하는 독일 목사님인데, 세계적으로 아주 저명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책을 보면 '최소치 요소의 중요성'이란 제목 하에 물통 비유를 들어 중요한 영적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물통은 적당한 넓이의 널빤지를 이어 동그랗게 두른 후, 대나무 같은 것으로 바깥에서 얽어 조여 맨 옛날 물통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물통을 만들 때 길이가 각각 다른 널빤지를 가지고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여기에 물을 붓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얼마만큼의 물을 부을 수 있을까요? 긴 널빤지만큼 부을 수 있을까요? 가장 짧은 널빤지만큼 부을 수 있을까요? 열 개의 널빤지를 가지고 만든 물통이라면, 그 중 가장 짧은 널빤지의 높이만큼만 물이 들어갈 것입니다. 그 이상은 아무리 물을 부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짧은 널빤지 위로 다 흘러나와 버릴 것입니다. 나머지 아홉 개의 널빤지가 아무리 높고 튼튼해도 물을 채우는 데는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그 물통의 물은 가장 짧은 널빤지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소치 요소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영적 원리에 있어서 중요한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제겐 짧은 널빤지가 하나 있습니다. 제게 있는 이 짧은 것이 조금만 길어지면 '좀더 은혜가 넘치는 목사,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목사가 될 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분이 모자랍니까? 해답을 얻었으면 묻어버리지 말고 꽉 쥐어 금년 한해의 기도 제목으로 삼아 열심히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그 짧은 것을 키울 수 있습니다. 키우는 것만큼 우리의 영혼은 풍성해집니다. 능력이 충만해집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흘러 넘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격과 삶이 건강해질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고, 예수와 함께 부활의 승리지가 되려면 이젠 달라야 합니다. 지금은 아직 성숙하지 못하나 이제 에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주의 말씀을 붙잡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나아갈 때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기도 하십시다. 아-멘
← 목록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