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능력을 붙잡으라!(고전2:1-4) 2010. 10. 10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0-10-10 |
조회: 1855
얼마 전에 우리 교회 청년이 새벽 예배 때, 기도 요청이 왔습니다. 친척 중에 혀 암이 생겨서 수술을 해야 하는데 기도부탁을 한다는 내용입니다. 흔치 않는 암이 아닙니까? 잘못하면 앞으로 사는 동안 말한마디 못하고 살 수도 있는 병이지 않습니까? 당사자는 물론 지켜보는 이가 얼마나 애가 타겠습니까? 암은 머리칼에도 발생하고, 심지어 각막이나 혀에도 발생합니다. 암은 종류가 많습니다. 위암, 간암, 폐암, 식도암, 유방암, 대장암, 전립선암, 이렇게 암의 종류가 많은 것은 암 세포가 우리 몸에 어느 곳에든지 번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몸에 암세포가 붙지 못하는 곳이 한 곳 있습니다.
심장입니다. 심장에 암세포가 붙지 않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심장에 암이 발생하지 않는 첫 번째 이유는 심장이 따뜻한 피를 늘 뿜어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뜻한 곳에는 암 세포가 붙지 못 한다고 합니다. 심장에 암이 발생하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심장이 늘 일하기 때문입니다. 심장은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합니다. 정상인의 심장은 일 분에 60-100번 정도 뜁니다. 60번을 뛴다 해도 한 시간이면 3,600번, 하루면 86,400번 뜁니다. 70세를 산다고 가정하면 6백만 번을 넘게 뜁니다. 그렇게 쉴 틈 없이 일을 하기 때문에 암 세포가 붙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 역시 건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품고 세상에 나가 생명으로 가득 찬 세상을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앞에 흔들림 없이 사는 신앙생활은 영적으로 늘 건강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 건강한 삶이 바로 전도입니다.(아-멘) 이 부르심 앞에 주저하는 삶은 결국 우리의 신앙생활이 금이 가고 무력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았다면 전도하는 일에 주저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주저하는 동안에 무수한 사람들이 사탄에 이끌려 죽음의 권세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지옥을 향해 내리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1. 전도하는 데 있어 무용지물이 두 가지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여기 ‘아름다운’에 해당하는 헬라어의 뜻은 ‘탁월하다, 우수하다, 뛰어나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뛰어난 정치가나 철학자들은 달변으로 사람들을 설득하여 휘어잡았습니다. 웅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그들은 높은 수준의 철학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수사학과 웅변을 익힘으로써 말을 잘 하는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무장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이것이 고대 사람들이 군중을 이끌어가는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와 같은 짓이 전도에는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달변이나 철학적인 지식으로는 한 사람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마 아테네에서 전도에 별 성과를 보지 못한 것이 큰 교훈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고린도에 오기 전에 그는 아테네에서 전도를 했는데, 아테네 사람들은 종교성이 대단한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을 설득시켜볼 요량으로 철학적인 논리를 사용하여 접근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듣고서 나중에 예수를 믿은 사람이 불과 다섯 손가락 안에도 꼽히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이 그러한 시도가 실패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담한 심정으로 고린도에 들어오면서 그는 마음속으로 다시는 철학적인 이야기나 사람들에게 유식하게 보이는 말은 하지 않겠노라고 결심한 것 같습니다. 4절에는 그의 이런 결심이 다시 한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그러므로 우리도 말과 지혜의 탁월함을 가지고 전도해야겠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무용지물입니다.
바울이 무용지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자신감입니다. 전도에서는 자신감도 쓸데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보여준 모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3절입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이 고린도 도시가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바울 사도 당시 ?고린도인처럼 산다?는 말은 도덕적인 기준을 포기한 채로 매우 세속적인 죄에 몰두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무역항을 끼고 발전하던 상업도시로서와 로마의 검투 경기를 수용한 스포츠 오락도시의 영향으로 고린도 시민들은 황금과 오락에 빠져 죄의 안락한 심연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부패하고 음란하고 패역한 그 도시에서, 심령이 악하고 물질 중심인 사람들 가운데에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 이곳에서 복음이 제대로 증거가 될는지, 또 어떤 어려움에 직면될지 이런 저런 생각에 빠지니까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저런 생각 속에 그는 더 이상 복음을 증거 할 수 없는 두려움의 질곡 속으로 빠져듭니다.
우리 역시 이런 경험들을 다 해 보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도 전도지를 가지고 젊은이들이 많이 드나드는 거리에 한번 나가보십시오. 그리고 어느 길목에 서서 "예수 믿으세요." 하고 한번 전해보십시오. 그러면 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약한지를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한번은 한 남자가 전도하는 나에게 “미친 놈”이라고 욕을 하지 않습니까? 속으로 그 영혼이 불쌍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분하지 모릅니다.
그래도 남자들은 대부분 마음이 좀 너그러운 편이어서 전도지도 받고, 머리도 끄덕끄덕 합니다. 그런데 팔짱 끼고 가는 여자들은 참 표독해요. 탁 뿌리치고는 안 받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그들을 예수 믿게 할 수 있습니까?'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아, 이것은 절벽이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세상이 너무도 악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세상은 아직도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의 점령지역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미 악한 권세를 짓밟고 승리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은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마귀와 사탄과 악령을 일컬어 '세상의 신'이라고 요한복음에서 3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권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고후4:4절에 보면 “이 세상 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흐트려 놓아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듣지 못하게 하고, 설령 들었다 해도 깨닫지 못하게 하고, 깨달았다 해도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그 마음을 꽉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이 점령하는 지역입니다. 이런 사탄의 점령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이처럼 악한 세상을 향해서 복음을 들고 나가기에 얼마나 힘듬이 있습니까? 바울 역시 고린도에 오기 전에 아덴에서도 실패를 경험을 했습니다. 이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말씀이 행18: 9절에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2.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무력한 인생이 아닙니다. 그는 일어섭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바로 그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은 그의 지식도 아니요, 그의 능력도 아니요, 그의 의지도 아니요, 변화되는 환경에서 온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십자가의 복음을 재발견하는 데 있었습니다.
여기 보세요. 2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 말을 쉽게 바꾸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고린도에 와서 오직 예수, 오직 예수의 십자가 오직 예수의 부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의 은총만 전하리라. 그 외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리라.” 바울은 왜 이렇게 작정했습니까? 인간의 달변이나 논리적인 설득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었는데, 단순히 예수의 이름을 전하자 사람이 바뀌는 놀라운 광경을 그가 목격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믿습니까?” 설명도 별로 하지 않고 단순히 이렇게만 말했는데, 사람들이 “예. 믿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마음속에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나더니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는 일들이 자꾸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 전도할 때는 복음밖에 없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밖에는 중요한 것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지식이 많은 사람입니까? 세상적으로 명망이 있는 사람입니까? 갈릴리 어부입니다. 고기 잡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거의 없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루살렘에서 이렇게 외치지 않았습니까? “그런즉 이스라엘을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행 2:36) 그러자 그 폭도와도 같은 사람들이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돌아와 하루에 3천 명의 남자들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놀라운 기적을 보지않았습니까? 복음이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빌립보에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는데, 간수에게 전도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 때 그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 16:31) 이 한마디에 그 간수의 온 집안이 다 예수 믿고 돌아왔는가 하면, 빌립보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다른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아니하려고 한다. 나는 그 이상의 다른 말은 하고 싶지도 않다”
2. 그리고 바울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만 전도했습니다. 4절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여기 ‘성령의 나타남’이라는 것은 복음을 전하거나 설교를 할 때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전혀 들을 것 같지 않던 사람이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역사하고 계심을 드러내는 일종의 증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은 내 인생을 정말 멋있게 이끌어 가세요. 직장 생활이든, 사업장이든, 학교이든 내 삶속에서 정말 살맛나는 삶의 가치를 알려 주십니다. 여러분, 단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나를 믿어주시고 받아주신 그 은혜 앞에 한 생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영국의 부흥의 불길을 지폈던 휫필드 목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성령의 체험을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 너무 좋아 30년 동안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초인적으로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보통 일주일에 40시간에서 60시간의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해 본 사람만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중노동인가를 알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그러한 강행군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중에도 설교를 마치고 찬양하고 중보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쇠가 녹이 슬어 없어지느니 차라리 닳아서 없어지는 것이 더 낫다.” 평안하게 살다가 녹이 슬듯 나이 들고 늙어 죽느니, 차라리 있는 힘을 다해 일하다가 진이 빠져 죽는 목사가 되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도 집회를 마치고 보스턴으로 돌아가던 중 한 작은 마을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그를 알아본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들판에 강단을 마련하고 설교를 시작하려 할 때 그는 환자나 다름없는 병약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휫필드는 강단에서 눈을 감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주님의 일에 지쳐 있기는 하지만 그 일에 실증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제가 아직 갈 길을 다가지 못했다면 저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이 들판에 서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주님의 진리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인치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다음에 죽어 본향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그는 이 기도를 마친 후 혼신의 힘을 다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날의 설교는 그를 통해 증거 되었던 말씀 중 가장 감동적인 설교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사람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그를 찾아갔을 때에는 이미 숨을 거둔 채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뒤였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습니다.
오래 사는 사람에 비해 조금 일찍 죽었고, 일찍 떠나는 사람에 비해 조금 오래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기막힌, 그러나 얼마나 멋있는 인생을 살다갔습니까? 우리 모두 그렇게 멋있는 삶을 살다 죽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휫필드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자신을 돌보지 않고 너무 많이 사용하여 닳아 없어진 쇠망치처럼 살기를 원했을까요? 이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복된 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쁜 소식인 복음을 들려주는 복된 삶이 휫필드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있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전도는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 앞에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내 모든 것을 그 분이 쓰실 수 있도록 맡길 때 놀라운 역사를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는 자 중에 기도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의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아버지여, 계시의 영을 주시옵소서.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에베소 교인들이 알도록 하옵소서"(엡 1:17-19). 성령이 임하시기를 기다리는 120명의 제자들은 성령이 오셔서 그들을 충만하게 채우시고 능력을 덧입혀주실 때까지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기도하는 자만이 성령의 능력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는 오늘부터 '터치 153 새 생명 축제'를 시작합니다. 한 생명을 주님께 인도한다는 것, 뭐, 쉬운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지 않습니까? 눅19:10에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최선을 다한 사명이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고자' 하심입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사셨고 그것을 위해 그는 죽으셨습니다. 그는 그 길만이 그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심을 믿으셨습니다. 그는 그 길만이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심을 믿으셨습니다. 그는 더 나아가 그 길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이심을 믿으셨습니다. 그의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당부, 마지막 교훈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이것은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저와 여러분이 귀담아 들어야할 말씀이 아닌가요? 이제 우리도 그 일을 위해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기 위해 우리 믿음의 형제들이 새벽을 열어야합니다. 누가복음 21:38에는 아주 감동적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early each morning"이란 말은 "날마다 아침 일찍이"라는 말 아닙니까? 예수님은 날마다 이른 새벽에 성전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목마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습관을 알고 이른 새벽에 성전으로 간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중국 선교의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허드슨 테일러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헌신과 행복의 비결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연주자는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에 악기를 조율합니다. 음악회가 끝난 뒤 조율한다면 어리석은 일이겠지요?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의 뜻에 나의 생각을 맞추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보람되고 행복해집니다."
여러분, 기도는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 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장벽이 있다고 할지라도 기도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 장벽이 무너집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한 곳에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사도들이 성령 세례를 받은 것은 한 곳에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개인에게 말씀하시기보다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새벽에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한 곳에 모여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새벽은 응답의 현장입니다.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여리고가 새벽에 무너졌습니다. 홍해 역시 새벽에 갈라졌습니다. 절망과 한숨과 탄식으로 버무려졌던 인생에게 다가오신 주님은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가을에 기도합시다! 지난 여름 영적으로 나태해졌다면 다시 영적인 허리띠를 졸라매고 깨어 기도합시다! 이제 내일부터 "복음의 능력을 붙잡으라"이라는 주제로 1달간 영적 진군을 하려고 합니다. 이제 모두 주 앞에 나와 엎드리십시다. 우리 역시 기막힌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볼 줄 믿습니다. 윌로우 크릭교회 담임목사이신 빌 하이벨스 목사님의 책 가운데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 는 책자가 있습니다. 역설적인 이야기 같지만 정말 너무 바쁘고 힘들기 때문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바쁘다고 기도 시간을 무 자르듯 잘라먹는 것은 영적인 자살 행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고, 기도는 무한한 하나님의 영적인 힘을 공급받는 것이고, 기도는 세상을 이기는 힘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기도는 인간의 역사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우리도 다윗처럼 기도할 마음이 생겨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새벽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맛보는 축복의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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