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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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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엡4:17-24) 2010. 10.17 에베소서강해(11)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0-10-18 | 조회: 2109
이번에 칠레 산호세 광산의 광부 구조 사건은 한 마디로 이 지구촌에 사랑과 용기와 생명의 보석을 선물한 정말 엄청난 기쁨이 아닙니까? 두 달이 넘는 기간을 칡 흙처럼 어둡고 32~36도에 이르는 더운 지하온도와 90%가 넘는 습도 속에서 지내야했습니다. 그리고 어두움과 죽음의 그림자가 교차되는 현장에서 얼마나 삶의 애착이 일어나겠습니까? 69일 만에 구출된 마리오 세불베다 광부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지난 40년간 내 인생을 저 아래에 묻었다. 이제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저는 이 이야기가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려 왔습니다.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이 갈망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지난날의 내 모습을 볼 때, 너무나 부끄러워서 입에 담기조차 힘든 모습이 있었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는 어두음만이 깔려 있는 그 현장에서 하루하루를 견딘다는 게 얼마나 버겁겠습니까? 그리고 동시에 살고 싶은 본능이 어느 누구에게나 있지 않겠습니까? 결국 그들이 그 굴을 빠져 나왔을 때 첫마디는 이제 다시는 옛날처럼 살지 않겠다는 생의 각오 역시 당연한 게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 22-24절을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은 '철저한 변화'(radical change)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우리 인간 편에서 '회심'(conversion)이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는 우리를 '재창조'(recreation)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우리의 부패하고 타락한 옛사람의 본성이 고침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은 마치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듯이 옛 사람은 벗어던지고 새 사람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벗어야 할 옛 사람의 옷은 도대체 어떤 옷입니까? 22절에 보면 이 옷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의 옷'입니다. 도무지 절제할 수 없는 욕심을 따라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옛날의 나쁜 습관으로 빠져드는 옷이지요. 이 편지의 수신자인 에베소 교인들은 그 어느 곳보다 악한 세상 풍조가 만연한 곳이었습니다.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우상숭배가 횡행했습니다. 종교적으로 영적으로 타락한 도시가 에베소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에베소에는 수많은 극장들이 있어서 온갖 도덕적 부패와 타락을 부추겼습니다. 이런 극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온갖 저질스러운 공연과 폭력적인 투기, 음란한 쇼 등이 판을 쳤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 살다보니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마음을 굳게 먹지 않으면 또 다시 옛날의 습관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죄수복을 벗어 던지고 자유복을 입듯이 바로 이런 옛 사람의 옷을 벗어 던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옷을 벗는다’는 말은 깨끗이 털어버린다, 내어버린다, 청산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 사람 옷을 벗었대” 그 직을 그만 두었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은퇴하시면서 강단에서 목사의 성의 가운을 벗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상징적으로 정말 그 직을 벗는다, 내려놓는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그러나 사실 옛사람의 모습을 옷을 벗어버리듯이 벗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옛 사람의 성품이나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가졌던 좋지 않던 습관들은 우리의 삶과 인격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옷을 벗듯 그렇게 쉽게 훌렁 벗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 몸 안에 독이나 불순물을 짜내듯이 억지로 짜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옛사람을 벗는 일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피나는 노력과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오래된 습관이 쉽게 바꾸어지지 않듯이 우리의 옛사람의 성품이나 습관도 쉽게 벗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 세 가지 있습니다. 혹시 아십니까? 첫째, 중 머리에 비녀 꽂기. 둘째, 며느리의 남편을 내 아들로 만들기. 셋째, 앙드레 김에게 검은 옷 입히기입니다. 앙드레김은 결국 검은 옷을 못 입어보고 세상을 떴습니다. 죽어서도 흰색 영구차에 실려 갔습니다. 좋은 손 맵시와 손재주를 가진 앙드레김이지만 죽어서까지 검은색 장의차를 타보지 못했습니다. 변화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든 것인가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벗어 버려야 할 옛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17-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 했습니다. 6가지가 나옵니다. 첫째는 허망하다 그랬어요. 목적을 상실합니다.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아주 허무하고 허망한 세상, 허우적거리기만 했지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를 모르겠어요. 사업을 하나 결혼을 하나 목적이 없어요. 의미가 없어요. 허망함에 빠져듭니다.



그 다음에는 어두움이라 그랬습니다. 디아노이아라고 하는 말은 지성적 결여, 본문 말씀대로 총명이 흐려진다 그랬어요. 판단하는 능력, 총명이 흐려져서 어두워졌어요. 이성의 능력이 어두워졌어요. 그 다음에는 무지함이다 그랬어요. 아그노이안 이라는 말은 도덕적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선악이 모호해집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분간하질 못하는 그런 상태에 빠지고, 그 다음에 네 번째는 마음이 굳어지고 그랬습니다. 강퍅해지는 거요. 고집만 남아요. 자기 집착에서 헤어나지를 못해요. 아, 참으로 불쌍합니다. 그 다음에는 무감각해진다 그랬어요. 이건 완료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감각능력 상실입니다. 무감각해요. 이제는 어떤 자극에도 감각이 없어요.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는 방임이라고 했습니다. 방임, 이것은 영어로 말하면 Give up, 포기상태입니다. 인간됨을 포기한 겁니다. 언젠가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지존파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인 사람들을 재판할 때 그 재판 판결문에 사형을, 사형을 선언하는 판결문에서 마지막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간됨을 포기하였으므로 사형한다' 그랬어요. 사람으로 살기를 포기한 인간들입니다. 자동차로 말하면 브레이크가 터져 나갔어요. 브레이크 터진 자동차, 이거는 좌충우돌이요. 이런 방임 상태에 빠져 버린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여기 18절 하반절을 보면 “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금 이 말씀을 받는 에베소 교인들은 불신자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선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앞에 무력하게 무릎 꿇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바울은 이 옛사람을 벗어나기 위해 강조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23절 말씀입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라는 말씀입니다. 옛 사람의 옷을 벗고 새 사람의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옛날과 똑같은 마음 상태를 가지고서는 절대로 인격의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 23절에서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마음은 그냥 그대로 두면 항상 부패하는 쪽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선이나 고기를 여름의 더운 날씨에 그냥 밖에 두면 금새 상하고 맙니다. 냄새가 나고 벌레가 생깁니다. 우리 마음이 꼭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냥 세상 유혹에 방치해 두면 우리의 마음은 날마다 부패하고 썩어져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령으로 새롭게 된다는 것의 두 번째 의미는 우리 마음속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두 개의 샘물 구멍이 있습니다. 하나는 썩은 물이 나오는 구멍이고, 다른 하나는 맑은 물이 나오는 구멍입니다. 하나는 옛 성품이 흘러나오는 구멍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구멍입니다. 그런데 두 개의 구멍 가운데 성령의 구멍을 막아놓고 썩은 구멍만이 열려져 있으면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생명수 샘물이 흘러나오는 구멍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지 못하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 심한 악취가 풍겨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썩은 물이 나오는 구멍을 막아야 합니다. 그것은 단 한번에 막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순간 순간마다 그 구멍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영적인 훈련’이라 그렇게 부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영적인 훈련을 하기 위해서 고전 10:27절에 “자신을 쳐서 복종케 한다” 그리고 고전 15:31절에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나의 옛사람의 성품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썩은 물이 나는 구멍을 날마다 막겠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말씀 안에서 새롭게 변해가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구멍을 통하여 맑은 물, 세상을 살 맛 나게 만들어 주는 단맛을 내는 물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롭게 변화되어 가는 것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옛사람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옛사람에 지배받는 사람에게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들은 다 변화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십시오. 심령 속에 변화되어야 하겠다는 굳센 소원과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과 생각의 변화 없이 새 사람의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의 심령을 새롭게 하십시오! 이렇게 여러분의 심령을 새롭게 할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으로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



이제 새 옷을 입으면 먼저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거룩하심에 합당한 길을 따라 사는 생활로 바뀝니다. 만약 내가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서도 아직도 옛 사람을 버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삶이 되겠습니까? 토요일에 장애우에 나오는 한 노숙자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분의 특징은 옷을 몇 벌 끼어 입고 다니는 것입니다. 여름에도 옷을 많이 껴입고 다닙니다. 옷을 어디에 둘 수 없어서 계속해서 껴입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로 부름 받은 사람은 항상 심령을 비옥한 옥토로 가꾸기 위해 늘 붙잡는 것이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왜 예배시간에 우리가 설교에 청종을 해야하는 지 아십니까? 마틴 로이드 존스는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는 청중들을 향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말씀이 들리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말씀이 안 들려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영적으로 병이 들었거나, 바로 이 자리가 심판의 자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들려져야 합니다. 여기 21절을 보세요. “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관심 가져야 할 두 단어가 있습니다. ‘들었다’는 말과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 두 말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들었다’는 것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 선포된 말씀을 들으므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그 생명은 ‘이방인이 그 마음에 허망한 것을 행할’ 때 가졌던 옛 사람의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거룩하게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구체적인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생명을 가진 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는 영적인 교훈들을 말합니다.

여러분,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일본의 ‘나가노 목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의 목회사역 가운데 전도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아무도 복음이 증거되지 않은 지역에 가족을 데리고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무려 5년 동안이나 사모와 자녀 앞에서 설교했을 뿐 단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를 개척한 후 5년 만에 한 청년이 찾아왔는데, 그마저도 폐병환자였습니다. 나가노 목사는 한 동안 이 청년을 받아들여야 하나 받지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그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그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청년이 핏덩어리를 토하면 걸레를 가져와서 닦아주고, 같이 밥도 먹으며 사랑을 전하자, 결국에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폐병까지 완전히 치료되었습니다. 그 청년이 일본 기독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1888-1960)입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목사가 되어 스승이 한 대로 일본의 빈민사역을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변비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무 꼬챙이로 변을 파주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침으로 굳은 변을 녹여 주었고, 그마저 안 되면 입으로 빨아주었습니다. 참 힘든 일이 아닙니까? 일본의 어느 신문사가 와서 어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나는 배운데로 할 뿐입니다” 그는 대동아 전쟁때에 중국에 가서 비민 사역을 합니다. 중국의 장개석 총통의 부인 송미령 여사가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아 개인적으로 초청해 성경 공부를 배웠다고 합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당시 중국에 있는 일본인 숫자는 200만 명에 달했으나, 단 한 사람도 테러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에게 감동한 장개석 총통이 포고령 1호를 내려 일본인을 해치지 말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가노 목사는 평생 동안의 목회사역 가운데 단 한 명의 그리스도인을 배출했지만, 그 한 사람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가 이룩한 사역의 열매는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국으로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본 사람들이었지만 단 한 사람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로 인해 화해와 화평의 다리가 놓여 졌고, 200만의 일본인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 우리의 속사람이 새롭게 되는 온전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새로운 사람입니다. 고후 5: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할렐루야!!



그런데도 아직까지 우리 안에서는 옛 사람의 성품이 살아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옛 사람의 성품과 옛 사람의 모습을 과감하게 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을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가기 위해서 우리 안에 아직도 자리 잡고 있는 옛사람과 끝임 없이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도록 말씀으로 우리에게 능력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그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를 온전히 변화시켜 가는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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