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시대를 향하여 (18)- 한 사람의 영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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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2-15본문
- 새 시대를 향하여 - 한 사람의 영향력 ⑱ 행11:19-26. 2025. 2/16
할렐루야!! 오늘도 예배에 나오신 여러분들에게 주의 은혜가 풍성하기를 축원합니다. 요즘 우리는 다수의 원리를 내세움으로 우리는 한 사람의 중요성을 모르고 살고 있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세상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다보니 다수의 중요성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놀라운 변화는 바로 한 사람에게서 시작됩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대통령 탄핵 정국으로 혼란 속에 빠져 있습니다. 지금 헌법재판소에는 결원이 된 재판관 한사람을 세우는가, 마냐는, 인용이냐 기각이냐 하는 중요한 일로 엄청난 다툼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한사람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지금 미국은 영어를 공식 국어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렇게 된 역사를 보면, 1776년 미국의 국어로 영어를 선택할 것이냐? 독일어로 할 것이냐? 를 놓고 투표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표 차이로 영어가 결정되었습니다. 그 때 그 한 표 차이가 아니었으면 독일어로 가결되어 미국은 독일어가 국어가 되고, 세계는 독일어가 공식 통용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한 표가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1868년 앤드류 존슨 미국 대통령은 단 한 표 때문에 탄핵 소추에서 모면되었습니다. 1945년 텍사스 주를 미국 영토에 포함시킬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미국 의회가 투표를 하였습니다. 한 표 차이로 미국 영토에 포함하도록 가결이 되었습니다. 그때 만약 한 사람의 부표가 나왔다면 지금 미국에서 가장 크고 자원이 풍부한 텍사스를 잃었을 것입니다.
또 영국의 챨스 1세를 사형시킬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투표하였습니다. 135명 재판관이 투표에 참석하였습니다. 68대 67로 사형이 가결되어 챨스 1세를 사형시켰습니다. 한 표로 영국의 왕이 죽고 그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한 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한 사람의 중요성을 대변해 주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에 등장하는 바나바라는 사람은 신약성경에서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과 함께 등장하는 바울이 신약성경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루살렘 공회가 한 사람을 이방 땅에 핍박 가운데 세워진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를 파송하는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당시 안디옥은 어떤 상황에 있습니까?
Ⅰ. 흩어진 자들을 통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19-21절
‘그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여기 '흩어진 자들'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이 동사는 농부와 관련된 단어로, 농부가 씨를 뿌리는 행동을 표현하는 동사입니다. 단 뿌리되 그냥 가만가만히 뿌리는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두루 흩어 뿌리는 것입니다.
왜 예루살렘 교회가 이 엄청난 핍박의 소용돌이에 빠졌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계속 붙잡고 있는 초대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뭐, 분쟁이 많고 타락된 교회라면 핍박이 있어도 당연합니다만 초대교회는 그런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하며, 사랑이 충만하여 유무 상통한 교회였습니다. 오늘날처럼 할 일을 안 하는 교회, 말만 하는 교회라면 또 한번 핍박이 있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행동하는 교회요, 이적과 기적이 있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동반하는 그런 권세와 능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한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핍박이 있고 환난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이런 핍박과 환란이 있어야 했습니까?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행1:4절이나 눅24:49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제는 성령을 받았으니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행전 1장 8절에 의하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안주하려 하였고 현재에 만족하려 했습니다.
예루살렘에다 낙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며, 또한 재림주를 맞이하여 거기서 즐기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복음을 받지 못한 이방 사람들에게는 시선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이방으로 떠나야 할 사람들이 이방으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여야 할 사람들이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평안한 가운데 안일한 민족과 자기중심적인 것에 도취되어 그 자리에 머물려고 하였습니다.
여기 흩어짐은 억지로 된 일입니다. 죽이려고 하니까 도망간 것이요, 그럴 수밖에 없기에 불가피하게 되어진 일입니다. 이것은 피동적이요, 수동적이요,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흩어진 자들이 19절에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무슨 말입니까? 흩어진 자들이 자기 살길을 찾은 것이 아니라 행8:1절에 말씀처럼 ‘두루 다닙니다.’ 이것은 ‘자율적인 것입니다. 이는 억지로가 아닌 무의미한 방랑의 생활이 아니라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저들은 정든 고향과 자기 집을 두고 쫓기는 신세가 되어 남의 땅에 가서 살게 되었지만 세상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신세를 탓하지 도 않았습니다. 그것이 왜, 누구 때문이냐며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볼 때는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지만, 어떻게 잿더미 같은 그 처참한 환경에서 그렇게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그들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위로와 능력이 그들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1절 상반절에서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라고 말씀합니다. 주의 손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흩어진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키려다가 쫓겨난 자들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삶의 터전을 버린 자들입니다. 이방 땅에서 사는 것조차 힘겨운 삶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 전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둡니다. 그것도 유대인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들도--그것도 우상숭배와 성적인 타락에 빠져있는 안디옥 사람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이들에게 성령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역시 우리 같은 별수없는 존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key가 성령입니다. 이 악한 세상을 다룰 수 있는 열쇠가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우리는 강해집니다. 얼마만큼 강해집니까? 예수님만큼 강해집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아무리 세상이 악하고 어두워도 우리 앞에 대적하지 못하는, 적수가 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이것을 누가 막겠습니까? 이 소식을 들은
Ⅱ.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에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22-23절
’예루살렘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이 결정은 고넬료의 사건을 통해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지도자가 깨달은 것입니다. 이 교두보를 통해 이방 선교에 물꼬가 터진 것입니다. 여러분 당시 안디옥은 시리아의 수도입니다. 지금은 튀르키에 최남단에 있는 도시입니다. 작년에 찾았던 안디옥에 들어갈 때 엄청 기대감이 컸습니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해서 안디옥을 볼 때 정말 눈을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지진으로 무너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가 목양하던 안디옥 교회의 현장은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피해가 컸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까지 직선거리로만 550Km나 되는 먼 거리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가는 거리입니다. 당시 안디옥은 인구가 50만명이 사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안디옥은 로마의 부와 헬라의 미 그리고 동양의 풍요를 모두 가진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그리고 안디옥은 우상을 숭배하는 도시입니다. 아마 바나바는 ‘핍박 속에서 이 거대한 도시로 들어간 동료들의 모습이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흩어진 그들은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불붙는 신앙을 가지고 흩어진 지역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23절에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여기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라’는 말은 단순한 감정이나 개념이 아니라, 변화된 삶과 공동체 안에서 볼 수 있는 실제적인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닫고, 그것을 기뻐하며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나바는 흔들리지 말고 성령이 함께하는 일에 시선을 가지고 나가라는 말로 권면을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소수의 작은 사람들의 헌신과 열정으로 이뤄집니다. 대단한 구호나 전략으로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열정에 사로잡힌 창조적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이뤄집니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무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게 될 때 위대한 역사가 이뤄집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우리의 노력 이전에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는 것입니다. 내 의지와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절대적인 순종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경험이나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와 전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비전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Ⅲ. 세상은 안디옥 교회를 무엇이라 무엇이라 부릅니까? 25-26
흩어진 소수의 사람들이 안디옥에 와서 복음을 전할 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로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했습니다. 우상숭배와 성적타락이 만연한 안디옥에 짧은 순간에 복음이 확장된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요인은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복음 전하는 자들의 삶의 태도가 안디옥 사람들과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 단적인 증거가 이것입니다. 26절에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안디옥에서 최초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칭하는 이름이 붙습니다. 환란 한복판에 세워진 안디옥의 성도들을 향해 세상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을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 부른 것입니다. 불과 1년밖에 안된 이들이 이런 변화의 흔적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요15:19절에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바나바는 이방 땅에 세워진 안디옥 교회를 함께 섬길 동역자를 찾습니다. 25-26절을 읽겠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지금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변화를 위해 함께 동역한 자를 찾습니다. 바로 바울입니다. 당시 바울은 검증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워낙 기독교인들을 괴롭혔던 사람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처음엔 불신하기도 했고, 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싫어한 유대인들까지 가세해서 그를 죽이려고 했죠.
예루살렘에서도 신변에 위험이 생기니까, 결국 교회가 바울을 다소(자기 고향 쪽)로 보내서 한동안 거기서 조용히 지내는 그를 직접 다소까지 가서 데리고 옵니다. 바나바는 별명이 “권면(격려)의 아들”일 정도로 사람을 세워 주고 응원하는 데 탁월했어요. 바울이 회심했을 때도, 다들 “저 사람 예전에 교회 핍박하던 사람이잖아!” 하고 꺼릴 때, 바나바가 먼저 나서서 바울을 변호하고 사도들에게 소개해 줬죠. 그러다 나중에 안디옥 교회가 급성장하면서 일손이 부족해지니까, 바나바가 직접 다소까지 가서 바울을 찾은 거예요. 사람을 믿어 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든, 예수님으로 변화된 바울을 믿고 받아들였어요. 바울은 핍박과 오해를 피해 다소에 내려갔지만, 그 기간이 오히려 영적으로 준비되고 정비되는 시간이 되었고, 바나바는 그 바울을 믿어 주고 적극 찾아 데려옴으로써 함께 교회를 든든하게 세웠습니다. 참 근사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대하면서 저는 고민을 많이 하게 됩니다. 오늘날처럼 성경적인 설교가 많은 강단에서 울려 퍼진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처럼 설교가 무기력한 적도 없었다고 말했던 위치만 니의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 이유는 “선포하는 사람이 십자가의 생명력에서 떠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설교 못하는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 이것이 담임 목회자의 고민입니다. 자기가 설교한 것을 잊어버리는 것 – 이것은 큰 위선의 죄입니다. 생명력이 없는 설교가 강단에서 선포되면 설교자와 청중의 삶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명력 없는 종교 행위와 무기력한 신앙 행위가 되지 않겠습니까?
시체들로 즐비한 무덤밖에 더 되겠습니까? 위선자들도 가득 찬 이기적인 집단밖으로 변질되면 세상이 더 이상 우리에게 거는 기대가 사라집니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와 일치된 삶을 일상에서 구현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목사가 바로 설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에게도 묻습니다.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듣고 교회를 다녀도 삶이 변화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앙 생활을 오래하다보면 머리만 크고 가슴은 식은 냉혈한이 되버리고 맙니다. 더 퇴보되고, 더 악해집니다. 삶의 변화는커녕, 타인을 정죄하는 바리새인이 됩니다. 자기 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타인의 티에만 관심을 가지는 위선자가 됩니다. 성경적 순종과 복음적 실천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무기력한 신자로 전락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위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향기는 나를 깨뜨려야만 진한 향기가 납니다. 그리고 향기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향기는 소리도 나지 않습니다. 향기는 언제나 잔잔하고 조용하지만, 자신이 머무는 곳에 아름다운 냄새를 풍겨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살아가는 삶이 바로 그런 것이어야 합니다. 내가 깨어지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깨뜨리기에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보여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보다 상대를 격려와 가능성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사람 그리고 늘 성령의 위로를 누리며 주님과 동행하는 이 바나바야 말로 새시대를 열어가는 사람이 아닙니까? 이제 우리 역시 올해 우리 한사람, 한삶이 선한 영향력을 드러내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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