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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새시대를 향하여(19)- 산 넘어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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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2-23

본문

산 넘어 산입니다. 12:5-12 ?, 2025. 2/25
 

 
여러분 요즘처럼 모두가 힘들어 할 때, 나를 붙잡아 메고 나를 힘들게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으로 부터 벗어나야 하는데 오히려 더 문제가 꼬여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산너머 산이라는 탄식을 해본 적이 있나요? "산 넘어 산"이라는 표현은 우리말 속담으로, 어려운 일을 해결하고 나면 또 다른 어려운 일이 계속 이어지는 상황을 뜻합니다. 문제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나며, 마치 산을 하나 넘었더니 또 다른 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한, 성경은 소망의 책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소망의 책을 쓴 성경의 저자들은 때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탄식하는 고백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윗을 보면 산 넘어 산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계속되는 시련을 겪은 인물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그는 어린 소년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는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람입니다.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싸움터에서 그가 세운 전공으로 모든 이스라엘 앞에 추앙을 받던 영웅이었습니다.
 

 
너무 특출해 버리니까 왕으로부터 질투를 받아서 한 순간에 쫒겨 다니는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당시 그가 어떤 형편에 있는지 그가 쓴 시편의 한 구절에서 당시 그의 심정을 잘 읽을 수 있습니다. 102:6,7절에 "나는 광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광야의 당아새, 황폐한 곳의 부엉이, 밤새도록 외롭게 앉아 떨고 있는 지붕위에 참새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생물학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그 감정은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고독하고 처절하였는가를 쉽게 느낄 수 있는 표현입니다. 삼상 20:3절에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걸음이라고 얘기합니다.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다윗은 시102:2절에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부르짖는 처절함이 있습니다.
 

 
욥도 끝없는 고난이 자기를 파고 들 때 욥3:26절에 나는 평강도 없고, 휴식도 앖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탄식을 합니다. 이것이 어찌 다윗이나 욥의 심정뿐이겠습니까? 살다 보면 우리의 인생 속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는 일들을 경험합니다. 정말이지 살아갈 소망까지도 잃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누구라서 인생의 풍랑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라서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건너뛸 수 있겠습니까?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불가능의 창살들을 우리는 어떻게 넘어가야 합니까? 정말 우리 인생이 산 넘어 산일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역사상 굉장히 중요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울의 핍박으로 하루아침에 교회가 큰 환란 속에 빠져 버립니다. 스테반이 죽음, 그리고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수많은 성도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는 흩어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그 고통 속에 예루살렘에는 교회를 떠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고난 한복판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들의 힘은 빠질 대로 다 빠졌습니다. 쇠잔해질 대로 다 쇠잔해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분들이 불행 가운데 살다가 그대로 인생을 마쳤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그 비결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오늘 베드로처럼 갇혀있는 내 삶 속에 다시금 회복의 희망을 노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교회가 기도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5-6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12:5) 누가는 이 '간절히'라는 단어를 누가복음에서도 사용했습니다. 22:44절에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어떻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절망의 늪을 건널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십자가를 앞에 두고 그 전날 밤에 간절히 기도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그분이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어찌 기도 없이 절망의 강을 건널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 없이 이 세상을 승리하며 살려고 합니다. 무릎 꿇음 없이 이 위기를 극복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기도하라!' 명령하고 부탁합니다. 예수님은 잠자는 제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오셔서 깨어 기도하라'고하셨습니다. 베드로도 말합니다. ‘깨어라.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믿는 너희라도 삼킬 자를 지금 찾고 있습니다. 깨어 기도하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그러나 우리는 모든 일에 염려합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승리를 바랍니다. 절망 속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이 절망을 이길 수 있는가?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간절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기도의 용사 조지 뮐러는 30년을 넘는 사역 동안 수천 명의 고아들을 맨손으로 먹여 살렸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조지 뭘러가 평생 동안 기도로 고아들을 먹여 살린 액수를 계산해 보았습니다. 그 당시의 돈으로 정확하게 92억 원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92억 원이라면 오늘날의 시세로 환원하면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그는 무일푼이었습니다. 어떻게 백 억에 가까운 돈을 공급했는가? 오직 방법은 하나 기도였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 맡기는 삶
 
6절에 보면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제 동이 트면 베드로의 목을 자를 그 전날 밤입니다. 이제 법적으로 항소할 기회도 없습니다. 무력으로 구출하기에는 너무 경비가 삼엄합니다. 정치적으로 해결을 모색할 시간도 없습니다 상황은 아주 절망적입니다. 베드로와 그를 따르는 성도들은 철저한 불가능의 창살 아래 갇혀 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비관적인 상황입니까? 얼마나 초조했겠습니까? 얼마나 그들 마음속에 절망이 엄습해 왔겠습니까?
 

 
그러나 사도행전 12장은 참으로 충격적일 만치 놀라운 베드로의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6절을 다시 보십시오.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잠을 못 이루어서 뒤척이는데 이래야 맞는 것 아닙니까? 이제 날이 밝으면, 몇 시간 후면 목이 잘리게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두 쇠사슬에 매여 두 군사틈에서 누워 자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베드로가 바보일까요? 베드로가 정말 그렇게 무딘 사람이었습니까?
 

 
4복음서를 읽어 보십시오. 베드로가 얼마나 다혈질입니까? 4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기질과 베드로의 평상시의 일들에 대한 반응으로 미루어 보자면 아마 이렇게 되어야 맞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두 사슬에 매여 군사 틈에 매여 악을 쓰고 길길이 뛰어도 쉬얺찬은 데 베드로는 평상시와 다르게 이 날 천사가 와서 옆구리를 차서 깨워야 할 만큼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고 성경은 의심의 여지없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수많은 실수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는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훗날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벧전 5: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베드로가 어떻게 그 상황에서 잠들 수 있었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 주님께 자신의 인생을 다 맡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절망합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성경을 읽었는데, 기도한 사람들이 왜 인생의 풍랑 앞에 서면 여지없이 무너집니까? 왜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앞에 우리는 무릎을 꿇고 만단 말입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맡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짐을 다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절망을 이길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인생의 흉흉한 풍파를 건널 수 있을까요?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얘야 맡기거라. 온전히 나를 의뢰하거라하십니다. 인생은 풍파의 연속입니다. 누구라서 풍파가 없겠습니까? 목사인 저도 때로 절망합니다. 이렇게 힘이 넘쳐서 설교하지만, 때로 보지 못하는 삶의 구석들이 있습니다. 이번에 기도원에서 외친 것은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수백번도 더 외쳤습니다.
 

 
.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베드로는 군인들과 함께 쇠사슬로 묶여 있었습니다. 출옥 가능성이 1%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납니다.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어서 일어나라는 겁니다. 잠을 자던 베드로는 비몽사몽간에 따라나섭니다. 초소를 두 개나 지나고 큰 철문이 철커덕 하고 스르르 자동으로 열립니다. 시내에 들어서자 천사는 홀연히 사라집니다. 그제야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감격스러워 합니다.
 

 
11절에.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여기 헤롯의 손이란 헤롯이 가진 권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헤롯왕이 가진 권력이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 다 잡아 죽여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당시의 예수님 믿는 사람이란 정말로 힘이 없는 연약한 사람들이 모인 소수의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막강한 권력을 가진 헤롯이지만 하나님을 이기거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중보기도 였습니다.
 

 
13-15절에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베드로가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던 마가 요한의 집에 와서 문을 두드릴 때 로데라는 하녀가 그 음성을 듣고 기뻐합니다. 너무 좋아서 문도 미처 열지 못하고 성도들에게 알립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지 않는 겁니다. 심지어 로데에게 미쳤다고 그래요. 기가 막힌 일입니다. 상황이 워낙 좋지 않다 보니까 성도들이 기도하면서도 설마 될까 한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 겁니다.
 

 
참 재미난 것은 자신들이 기도하면서도 기도의 응답이 일어났는대도 다락방에 성도들이 믿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기도는 했는데, 응답될 거라고 믿지 않았던 겁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지만, 막상 응답이 오니까 못 믿는 거예요. 우리도 이럴 때가 많습니다. 기도하지만 정말 응답될 거라고 믿지 않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셔도 우연이라고 생각할 때 여러분, 우리는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 기도가 응답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너희가 기도하고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 (11:24)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확신을 가지십시오. 성도들의 믿음이 이렇게 적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응답해 주셨습니다. 적은 믿음으로 기도해도 역사하신다는 겁니다. 겨자씨 한 알 같은 믿음! 그렇다면 의심 없이 믿는 자에게 얼마나 큰 역사가 나타나겠습니까?
 

 
이번 탄핵 정국으로 우리는 엄청난 국가적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국가 신용도는 물론 자영업자들, 소상공인들의 폐업이 속출하는 분위기로 이 나라는 정말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코로나 이후로 어려움들이 계소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상한 갈대와 같은 사람들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들 우리 중에 없지않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금도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울고 있습니다. 어쩌면 실컷 울고 싶은 곳을 더 찾아가고 싶은 마음의 충동을 가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다릅니다. 12:20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신다. 주님은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 울지 말라고 내가 네 눈물을 씻겨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보시고 우리 등에 손을 얹으시고 속사이십니다. 울지 말라구요. 내가 너를 위로 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 살고 있는 동안 울고 있는 우리를 울지 말라고 하시면서 위로 하시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그 방법이 히4: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있습니다. 내가 필요하실 때마다 은혜가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도우시는 은혜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로 준비하고 나가면 항상 필요를 따라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분명히 좋으신 우리 주님은 울고 있는 우리를 주목하시고 우리의 눈물을 소중히 여기실 뿐만 아니라 울지 말라고 하신 다음 우리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를 아시고 때를 따라 필요한 은혜를 적절하게 허락해 주시면서 우리의 눈물을 씻겨 주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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