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를 향하여 (21) - 바울의 첫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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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3-16본문
이신칭의 – 바울의 최초의 설교 (21) 행13:38-43. 2025. 3/16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특별히 모두가 다 반갑지만, 이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내음을 마신 여러분을 보니 더 아름다우니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동성교회에 1987년에 강도사로 부임을 했습니다. 그 당시 임지를 찾던 중 동성교회에 와서 주일 오후에 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의 동성교회에서 첫 설교의 제목이 ‘어디계시오니까?’라는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을 따르던 두 제자가 자기 스승의 등 떠밀려 예수 앞에 나올 때, 주님이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질문할 때 “어디계시오니까”라는 제목의 설교였습니다. 그것이 동성교회에 첫발을 내딛을 때 설교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30년이 지났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유장로님이 그 설교를 기억하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받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세례 요한처럼 ‘뒷모습이 아름답자’는 것이었습니다. 30년 전의 제가 한 첫 설교를 기억한다는 것이 저에겐 엄청난 부담이었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세례 요한의 삶처럼 나 자신도 사역의 무대에서 조용히 내려오는 뒷모습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첫 직장이라든지, 학교에 입학을 할 때 가진 각오는 아마 잊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을 때 첫 첫 각오가 다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각오를 잊고 산다는 것은 내 인생을 초라하게 만드는 아픔만이 남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안디옥에서 파송받아 비두시아 안디옥에 가서 그의 생애의 첫 설교를 하게 됩니다. 바울의 이 한편의 설교가 세상에 소개될 때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지만, 그래서 그 감격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했지만, 오히려 믿는 자들에게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의 회심에 대해 반신반의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핍박했던 동료들이 그의 변심에 칼을 품고 바울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어느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았습니다. 갈1:17절에 보면 그가 이 혼란스러운 과정에 처해 있을 때 어디에 머물고 있었는가를 보여줍니다. 갈1:17절에 보면 "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곧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여기 바울이 이 힘든 시기에 그가 머물던 곳이 바로 아라비아라는 광야입니다. 왜 아라비아로 갔을까요? 아라비아는 광야입니다. 사람이 없는 곳입니다. 고독과 자기싸움의 현장이 광야입니다. 그는 여기서 3년간 머물게 됩니다. 이 3년이라는 시간은 바울에게 결코 쉬운 시간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바울이 광야에서 보낸 시간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바로 사역의 현장으로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광야에서 그를 다듬으셨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광야 같은 시간이 있습니다. 어떤때는 내가 기대했던 길이 막히고,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광야는 절망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곳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을 세우시기 전에 ‘광야 훈련’을 시키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을 받았고, 엘리야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아라비아에서 하나님 앞에서 깨어지고, 준비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우리가 새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보는 이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이 한 설교 10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설교가 오늘 본문입니다. 바울의 첫 설교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오늘 본문은 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했던 설교입니다. 당시 ‘안디옥’이란 이름이 붙여진 지명이 무려 16개나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3장에 기록된 ‘비시디아 안디옥’에 행한 바울의 설교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 – 이신칭의
38-39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결론적으로’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전한 설교의 핵심의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가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하는 것과 또 하나는 이 사람, 예수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메달아 죽인 그 예수만이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핵심 메시지는 바로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바울이 이 복음을 알기 전에는 자신이 가진 율법의 의로 소위 열심을 가지고 초대교회의 성도를 잡아 죽이는 잔인한 인생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무너뜨리고 믿는 자를 찾아내 사자 밥으로 죽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는 율법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무참하게 짓밟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한 그 열심은 롬10:3절에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열심이 아니라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한 열심히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는 열심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한 그 잘못된 열심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았는지 아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까? 소위 메시야를 기다리는 열심히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잘못된 열심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인류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전쟁이 누구의 이름으로 일어났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발발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자군 전쟁입니다. 임신한 부인의 배를 갈랐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 놓는 잘못된 열심의 결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또 우리의 신앙에 분명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열심이 우리의 인생과 신앙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그 잘못된 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처럼, 오늘 우리의 잘못된 열심이 예수님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앙적인 열심이 우리의 의처럼 생각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닙니다. 내가 뭔가를 했다고 하나님 앞에 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 업적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의를 말씀해 줍니다.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왜 복음이 기쁜 소식입니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한마디로 완전한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사람의 의는 흔들릴 때가 많지만, 하나님의 의는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에 도저히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가 예수를 나의 주로 고백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것이 이신칭의입니다.
바울의 이 첫 설교에서 복음의 핵심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가 아라비아 광야에서의 연단을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이 비디시아 안디옥에 외친 것입니다. 바울이 이 십자가의 도를 전할 때 당시 어떤 반응이 일어났습니까?
Ⅱ. 첫 설교의 반응 42절
설교를 듣는 회중 가운데에는 반응이 엇갈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기뻐하며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또 어떤 이들은 분노하며 바울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진리가 절대적인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선포되자 사람들이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전하라.” (42절)고 부탁을 합니다. 그 말씀을 유대인들이 듣고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이 더 듣고 싶었습니다. 왜 그들은 그 말씀을 더 듣고 싶어 했을까요? 그 말씀이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들이 오랫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문제를 해결해 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율법을 잘 지켜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고 싶은 거룩한 욕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된다는 것 때문에 좌절하고 낙심된 마음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어렵지? 나는 도저히 안 되는 사람인가? 나는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다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인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해답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이름을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방법으로 해결해 주셨으니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 기쁜 소식을 들으니, 다음 안식일에도 그 말씀을 전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44절의 말씀처럼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안식일에는 더 많은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비디시아 안디옥에는 2천여 세대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 주 만에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그 말씀은 온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말씀을 듣고 싶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유대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도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왜 찾았습니까? 바로 자신들이 평생 해결하지 못한 구원이 율법과 전통으로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아십니까? 롬5:1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합니다. 여기 ‘우리가’는 누구를 말합니까? 예수를 나의 구주로 주님으로 영접한 이 아침 우리를 말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표현합니다. 이제 너희는 더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엄청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누리자!”는 말씀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enjoy"라고 표현합니다. ‘즐기자’라는 말입니다. 좀 세속적인 표현 같지만, 이것은 특권을 이야기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특권은 누가 누릴까요?
특권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누리는 것입니다. 만약 특권이 있는데도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면 특권이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거리낌 없이 담대하게, 나의 행위와 조건과 상황과 상관없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특권이 열렸다는 것은 흥분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리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라도 1년에 단 한 번 자신의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들어갔다가도 잘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구약의 환경 속에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를 누릴 수 있는 것이야말로 특권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누리자!”, “enjoy"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을 누리지 못하면 너무 억울한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을 다 치우고 누구든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이 믿음으로 의롭다는 말씀을 전하면서 흥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앞장서서 방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색출해서 끌고 갔고, 교회 집회를 가로막았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은 물론이고, 심지어 머나먼 이국땅 다메섹까지 추격해서 박해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예수 믿고 난 뒤에 돌이켜 보니,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납해 주셨습니다. 예수 믿게 하셨고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일꾼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그것도 큰 지도자인 사도로 세워주셨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격 없는 자신을 이렇게 세워주신 것은 무슨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당당해 졌습니다. 그가 “누리자”라는 이 표현은 상상을 못하는 단어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그의 삶에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이 보화를 발견한 그는 한 생을 미친 듯이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죽는지 사는지 모르게 일했습니다. 결국 목이 잘리우는 참수를 당하면서도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의 빚을 위해 후회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영혼을 흔들어 놓고도 남습니다.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만약 무기수가 감형을 받아서 출옥을 하게 되었다면 아마도 그 기쁨은 말로 다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그 부르심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사울이 바울이 되어 역사를 바꾼 사도 바울처럼 오늘 당신의 가정을 바꾸고, 당신의 인생을 바꾸고, 당신이 속한 이 사회를 한번 바꾸어 보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왜 날마다 세상에 패배하며, 죄에 지며,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살아야 합니까? 우리 남은 인생을 하나님 앞에 맡기십시다. 오늘 당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맡기십시오. 오늘 하나님은 당신을 통해 이 광진구의 역사를, 한국의 역사를 다시 쓰실 것입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특별히 모두가 다 반갑지만, 이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내음을 마신 여러분을 보니 더 아름다우니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동성교회에 1987년에 강도사로 부임을 했습니다. 그 당시 임지를 찾던 중 동성교회에 와서 주일 오후에 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의 동성교회에서 첫 설교의 제목이 ‘어디계시오니까?’라는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을 따르던 두 제자가 자기 스승의 등 떠밀려 예수 앞에 나올 때, 주님이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질문할 때 “어디계시오니까”라는 제목의 설교였습니다. 그것이 동성교회에 첫발을 내딛을 때 설교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30년이 지났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유장로님이 그 설교를 기억하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받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세례 요한처럼 ‘뒷모습이 아름답자’는 것이었습니다. 30년 전의 제가 한 첫 설교를 기억한다는 것이 저에겐 엄청난 부담이었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세례 요한의 삶처럼 나 자신도 사역의 무대에서 조용히 내려오는 뒷모습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첫 직장이라든지, 학교에 입학을 할 때 가진 각오는 아마 잊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을 때 첫 첫 각오가 다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각오를 잊고 산다는 것은 내 인생을 초라하게 만드는 아픔만이 남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안디옥에서 파송받아 비두시아 안디옥에 가서 그의 생애의 첫 설교를 하게 됩니다. 바울의 이 한편의 설교가 세상에 소개될 때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지만, 그래서 그 감격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했지만, 오히려 믿는 자들에게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의 회심에 대해 반신반의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핍박했던 동료들이 그의 변심에 칼을 품고 바울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어느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았습니다. 갈1:17절에 보면 그가 이 혼란스러운 과정에 처해 있을 때 어디에 머물고 있었는가를 보여줍니다. 갈1:17절에 보면 "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곧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여기 바울이 이 힘든 시기에 그가 머물던 곳이 바로 아라비아라는 광야입니다. 왜 아라비아로 갔을까요? 아라비아는 광야입니다. 사람이 없는 곳입니다. 고독과 자기싸움의 현장이 광야입니다. 그는 여기서 3년간 머물게 됩니다. 이 3년이라는 시간은 바울에게 결코 쉬운 시간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바울이 광야에서 보낸 시간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바로 사역의 현장으로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광야에서 그를 다듬으셨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광야 같은 시간이 있습니다. 어떤때는 내가 기대했던 길이 막히고,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광야는 절망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곳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을 세우시기 전에 ‘광야 훈련’을 시키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을 받았고, 엘리야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아라비아에서 하나님 앞에서 깨어지고, 준비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우리가 새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보는 이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이 한 설교 10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설교가 오늘 본문입니다. 바울의 첫 설교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오늘 본문은 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했던 설교입니다. 당시 ‘안디옥’이란 이름이 붙여진 지명이 무려 16개나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3장에 기록된 ‘비시디아 안디옥’에 행한 바울의 설교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 – 이신칭의
38-39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결론적으로’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전한 설교의 핵심의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가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하는 것과 또 하나는 이 사람, 예수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메달아 죽인 그 예수만이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핵심 메시지는 바로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바울이 이 복음을 알기 전에는 자신이 가진 율법의 의로 소위 열심을 가지고 초대교회의 성도를 잡아 죽이는 잔인한 인생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무너뜨리고 믿는 자를 찾아내 사자 밥으로 죽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는 율법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무참하게 짓밟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한 그 열심은 롬10:3절에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열심이 아니라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한 열심히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는 열심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한 그 잘못된 열심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았는지 아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까? 소위 메시야를 기다리는 열심히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잘못된 열심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인류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전쟁이 누구의 이름으로 일어났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발발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자군 전쟁입니다. 임신한 부인의 배를 갈랐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 놓는 잘못된 열심의 결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 또 우리의 신앙에 분명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열심이 우리의 인생과 신앙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그 잘못된 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처럼, 오늘 우리의 잘못된 열심이 예수님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앙적인 열심이 우리의 의처럼 생각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닙니다. 내가 뭔가를 했다고 하나님 앞에 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 업적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의를 말씀해 줍니다.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왜 복음이 기쁜 소식입니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한마디로 완전한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사람의 의는 흔들릴 때가 많지만, 하나님의 의는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에 도저히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가 예수를 나의 주로 고백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것이 이신칭의입니다.
바울의 이 첫 설교에서 복음의 핵심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가 아라비아 광야에서의 연단을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이 비디시아 안디옥에 외친 것입니다. 바울이 이 십자가의 도를 전할 때 당시 어떤 반응이 일어났습니까?
Ⅱ. 첫 설교의 반응 42절
설교를 듣는 회중 가운데에는 반응이 엇갈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기뻐하며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또 어떤 이들은 분노하며 바울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진리가 절대적인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선포되자 사람들이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전하라.” (42절)고 부탁을 합니다. 그 말씀을 유대인들이 듣고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이 더 듣고 싶었습니다. 왜 그들은 그 말씀을 더 듣고 싶어 했을까요? 그 말씀이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들이 오랫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문제를 해결해 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율법을 잘 지켜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고 싶은 거룩한 욕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된다는 것 때문에 좌절하고 낙심된 마음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어렵지? 나는 도저히 안 되는 사람인가? 나는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다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인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해답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이름을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방법으로 해결해 주셨으니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 기쁜 소식을 들으니, 다음 안식일에도 그 말씀을 전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44절의 말씀처럼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안식일에는 더 많은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비디시아 안디옥에는 2천여 세대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 주 만에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그 말씀은 온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말씀을 듣고 싶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유대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도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왜 찾았습니까? 바로 자신들이 평생 해결하지 못한 구원이 율법과 전통으로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아십니까? 롬5:1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합니다. 여기 ‘우리가’는 누구를 말합니까? 예수를 나의 구주로 주님으로 영접한 이 아침 우리를 말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표현합니다. 이제 너희는 더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엄청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누리자!”는 말씀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enjoy"라고 표현합니다. ‘즐기자’라는 말입니다. 좀 세속적인 표현 같지만, 이것은 특권을 이야기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특권은 누가 누릴까요?
특권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누리는 것입니다. 만약 특권이 있는데도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면 특권이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거리낌 없이 담대하게, 나의 행위와 조건과 상황과 상관없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특권이 열렸다는 것은 흥분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리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라도 1년에 단 한 번 자신의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들어갔다가도 잘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구약의 환경 속에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를 누릴 수 있는 것이야말로 특권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누리자!”, “enjoy"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을 누리지 못하면 너무 억울한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을 다 치우고 누구든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이 믿음으로 의롭다는 말씀을 전하면서 흥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앞장서서 방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색출해서 끌고 갔고, 교회 집회를 가로막았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은 물론이고, 심지어 머나먼 이국땅 다메섹까지 추격해서 박해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예수 믿고 난 뒤에 돌이켜 보니,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납해 주셨습니다. 예수 믿게 하셨고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일꾼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그것도 큰 지도자인 사도로 세워주셨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격 없는 자신을 이렇게 세워주신 것은 무슨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당당해 졌습니다. 그가 “누리자”라는 이 표현은 상상을 못하는 단어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그의 삶에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이 보화를 발견한 그는 한 생을 미친 듯이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죽는지 사는지 모르게 일했습니다. 결국 목이 잘리우는 참수를 당하면서도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의 빚을 위해 후회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영혼을 흔들어 놓고도 남습니다.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만약 무기수가 감형을 받아서 출옥을 하게 되었다면 아마도 그 기쁨은 말로 다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그 부르심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사울이 바울이 되어 역사를 바꾼 사도 바울처럼 오늘 당신의 가정을 바꾸고, 당신의 인생을 바꾸고, 당신이 속한 이 사회를 한번 바꾸어 보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왜 날마다 세상에 패배하며, 죄에 지며,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살아야 합니까? 우리 남은 인생을 하나님 앞에 맡기십시다. 오늘 당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맡기십시오. 오늘 하나님은 당신을 통해 이 광진구의 역사를, 한국의 역사를 다시 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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