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를 향하여(22) - 우리를 사람으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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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두익 댓글 작성일25-03-23본문
"우리를 사람으로 보라!" 행14:8-18(22). 2025. 3/23
우리는 살아가면서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때, 관계에 지치고, 현실에 눌릴 때… 우리는 어느 순간 ‘체념’이라는 감정에 무너져 내립니다.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애써보려는 마음조차 사라진 상태. 그것이 바로 체념입니다. 희망을 거두고, 마음을 닫고, 그냥 이렇게 살아가야겠다고 스스로를 단념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체험합니다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더 사는 것이 절박하고 힘든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럴때 그리스도인이 해야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눈을 잠시 감고 하나님을 향해 눈을 크게 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눈을 뜨는 것은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이 관심 앞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체념의 자리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역사가 인간의 포기 너머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손길을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루스드라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선천적 장애가 있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그가 앉은뱅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받은 삶의 상처가 얼마나 컸을까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자신은 물론이고 그의 주변에 있는 부모님이나 가족들 또한 그가 앉은뱅이라는 사실 때문에 많은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서기 위해서 온갖 노력도 기울여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는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고 점점 더 절망과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지속되었을 때, 그는 인생의 모든 소망을 포기하였을 때 오는 아픔에는 체념이 가장 좋은 치료제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번 4월19 부활절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매우 뜻깊은 날입니다. 그런데 이 날은 동시에 장애인의 날이기도 합니다. 우선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이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우리나라 정부 통계에 의하면 정부에 정식으로 등록된 장애인들만 23년도 통계를 보면 264만 7,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5.1%를 차지합니다. 등록 안 된 분들을 포함하면 배 이상 약 500만 명으로 인구의 10분의 1이상이 장애인들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선천적 장애인은 아주 적고(10%미만) 대부분은 후천적 장애인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후천적 장애가 생기는 원인은 다양하지만, 환경오염과 산업화로 인해 오는 산업 재해가 그 원인 중에 하나 입니다. 이 말은 여기 예배자로 모인 우리 모두 장애인의 가능성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 모두가 다 예비 장애인으로 이 땅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루스드라의 앉은뱅이에게 바울이 복음을 가지고 나타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걸어본 적이 없던 앉은뱅이가 똑바로 일어서고, 뛰어다니는 이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혼자 일어설 수 없이 앉아서만 불편하게 지내던 사람이 사도 바울의 명령과 함께 벌떡 일어나게 되었으니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들은 너무 놀라서 바나바와 바울을 보고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왔다면서 그들에게 엎드려 제사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때 바울과 바나바가 양심이 조금 무딘 사람이었다면 그들의 제사와 경배를 그대로 받으면서 그 특권을 즐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으면서 그들의 하는 일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런 헛된일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서야 할 자리에 바로 설 수 있도록 깨우쳐 주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볼 것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Ⅰ. 자기 우상화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8절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자! 오늘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8절에 -발을 쓰지 못하는 분, 걷지 못하는 한 인생을 만나게 됩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의 주 사역, 사역의 우선순위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역이었습니다만, 말씀 사역과 함께 동반하신 사역이 바로 치유 사역이었습니다. 말씀 사역이 영혼을 돌아보는 사역이라면 치유 사역은 일차적으로 육체를 돌아보는 사역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영혼만 돌아보고 육체를 등한이 여기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이런 장애인들을 그대로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시각 장애인의 눈을 만지시고, 청각 장애인의 귀를 만지시고, 일어서지 못하는 지체 장애인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장애인의 몸을 만지는 일을 금기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회적 금기를 깨트리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시각으로는 그들 모두가 정상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소중한 인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부활 주일은 장애인의 날입니다. 우리교회도 선천적 장애를 앓고 있는 분만이 아니라 후천적 장애를 앓고 계신 분도 계십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분들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 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이 이 일어서지 못하는 장애인을 주목하며 제일 먼저 관심을 가진 것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9절에 보면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여기 바울이 주목하여 그 사람을 보았을 때, 그 사람에게서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바울의 설교를 듣는 순간 그 말씀이 그 사람 안에서 부딪쳐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거기에 앉아 설교를 들었지만 특별히 나면서 앉은뱅이였던 이 사람은 바울의 설교에 빨려들었고, 복음의 능력이 그 사람 속에 심겨졌습니다.
말씀이 능력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절대로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령 속에 뿌려지고 내가 그것을 접하게 될 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어도 믿음이 안 생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을 흘려들으면 아무리 들어도 믿음이 안 생깁니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속에 뿌려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 그 믿음은 자라게 됩니다. 여기 보시면 이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바울이 뭐라고 선포합니까? 10절을 보세요.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이 충격적인 상황 앞에 당시 이 기적을 본 사람들의
Ⅱ. 사람들의 반응 (11-13)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여기 이 엄청난 기적 앞에 외칩니다. 12절에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여러분, 제우스 신 들어보셨지요? 그리스나 로마 신화에는 많은 신들이 나옵니다. 그중에, 제우스 신은 신들중의 신입니다. 최고의 신입니다. 주피터 신이라고도 합니다. 이들은 바나바를 제우스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바나바가 바울보다는 나이도 많고, 또한 체격도 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우스 신에게는 대변자 신이 있었습니다. 헤르메스 신입니다. 사람들이 가만히 보니, 바나바는 점잖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말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바울을 제우스 신의 대변자, 헤르메스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자고 합니다.
이런 자리에 서면 이 유혹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하면 특별한 대접을 받고 싶어 합니다. 돈 100억이 생겼다고 해보세요. 그러면 어디를 가든 대접이 달라집니다. 은행에 가면 직원들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전에는 창구에서 번호표 타고 기다렸는데, 바로 지점장실로 안내됩니다. 음식점에 가도 특별한 서비스를 받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아내의 대접이 달라집니다. 친구를 만나도 친구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나는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가 자기에게 거기에 걸맞은 대우나 대접을 해주지 않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화가 납니다. 그때 우리가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공과 행복의 때에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위기에 빠뜨리는 것은 비단 불행과 실패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불행 때문에 자살하기도 합니다만, 그것만이 우리 인생의 위기가 아닙니다. 성공과 행복 역시 우리 인생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고통의 때에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했고, 그래서 전쟁에 나갈 때마다 승리했습니다. 주변 국가들을 다 통치하고 나서 하루는 한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건 전쟁도 아니었습니다. 교만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까지 나갈 필요 없이 밑의 부하들만 내보냈습니다. 다윗은 그때 뭐 하고 있었습니까? 저녁때에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를 거닐고 있었습니다(삼하 11:2). 목욕하는 바세바를 보고 범죄하지 않았습니까? 그동안 살아왔던 그의 삶이 무너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성공의 너머에는 사단의 덫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한 사람의 믿음이 진실한 것인지 아닌지를 아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그 사람이 축복을 어떻게 관리하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고통을 관리하는 것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셨을 때 그 축복을 어떻게 관리하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의 순간에는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축복이 오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자기의 마음을 높입니다. 어느 순간에 자기의 마음을 높여 버립니다. 우리가 고통을 지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잘 관리하는 것은 더욱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전 10:12절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 합니다.
"나는 잘 서 있다"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일 수 있다는 겁니다. 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 자만하는 마음이 들어오면요, 영적인 긴장이 풀려버리고, 작은 유혹에도 휘청거리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수록 더 겸손해져야 합니다. 더 조심해야 하고, 더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믿음이 좋다고 느껴질 때일수록, “주님, 제 마음을 지켜주세요. 제가 교만하지 않게 해주세요” 하고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 나는 절대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자신만만했는데, 결국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 자신을 너무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늘 주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기도 없이는, 말씀 없이는, 은혜 없이 우리는 단 1초도 믿음으로 설 수 없습니다. 내 힘이 아닌 주님의 힘으로 오늘도 서 있어야 합니다. 성공과 행복의 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우리에게 쏟아부어 주실 때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낮추시기 바랍니다.
Ⅲ.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15절
15절을 보세요.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십니까. 우리도 당신들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당신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하는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사건에서도 베드로의 비슷한 반응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고넬료의 집에 찾아오게 되었을 때 고넬료가 너무 감격해서 엎드려 절하는데 그 절은 평범한 인사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의 등장하는 새시대를 열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었던 인간이라는 것을 절대로 잊지 않았습니다. 기적을 행한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연약한 질그릇임을 알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그것이 바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인 것을 인정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 같은데 우리는 종종 그것을 잊어버립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우상의 망상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요? 내가 사람인 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어서 그럽니다.
사실 이것은 사단이 맨 처음 인간에게 찾아와서 유혹할 때 사용한 미끼였습니다. 사단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 열매를 먹으면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단은 꼭 같은 작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 의견이 절대로 옳고 다른 사람의 의견은 절대로 틀리다고 주장하는 것은 나도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순간이나마 잊어버려서 그럽니다. 내가 사람인 이상 내 의견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이 어떻게 자신의 우상화를 극복할 수 있었어요? 자기 자신이 인간인 것을 인식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18절에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여기 ‘겨우 무리를 말려’ 당시 그 기적을 본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이 태도와 아랑곳하지 않고 이들을 추대하려는데 온 힘을 다 쏟는 장면입니다. 문자 그대로 "겨우 무리를 말렸다"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은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을 신으로 여기며 제사하려는 무리의 열정을 막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강조합니다. 바울이 왜 훌륭한 사람입니까? 바로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섰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자격 없는 나를 자녀 삼으신것도 감사한데 자신을 사도로 삼으시고 이 일을 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관리하지 못하고 이 교만의 병에 빠져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했습니다. 전도관의 박태선 장로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얼마나 대단한 설교의 능력과 특별한 능력을 주셨습니까? 그가 설교할 때에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찢어져 내렸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에 수많은 병자들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축복을 관리하지 못하는 교만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받은 은혜를 다 쏟아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 세상의 유혹을 뿌리치며 산다는 것,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주 넘어집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보혈의 능력을 붙잡고 일어서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죄 사함과 회복의 능력이 있으며, 신자가 겸손과 믿음으로 이를 의지할 때 나를 정죄하던 마귀는 반드시 패배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혈의 능력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할 때, 사탄의 유혹과 공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두 사도처럼 인생의 영광의 환희에 찬 순간이 와도 자신의 분수를 넘지 않고 하나님 주신 축복을 잘 관리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주님이 칭찬하는 인생으로 나아가길 축원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때, 관계에 지치고, 현실에 눌릴 때… 우리는 어느 순간 ‘체념’이라는 감정에 무너져 내립니다.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애써보려는 마음조차 사라진 상태. 그것이 바로 체념입니다. 희망을 거두고, 마음을 닫고, 그냥 이렇게 살아가야겠다고 스스로를 단념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체험합니다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더 사는 것이 절박하고 힘든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럴때 그리스도인이 해야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눈을 잠시 감고 하나님을 향해 눈을 크게 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눈을 뜨는 것은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이 관심 앞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체념의 자리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역사가 인간의 포기 너머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손길을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루스드라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선천적 장애가 있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그가 앉은뱅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받은 삶의 상처가 얼마나 컸을까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자신은 물론이고 그의 주변에 있는 부모님이나 가족들 또한 그가 앉은뱅이라는 사실 때문에 많은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서기 위해서 온갖 노력도 기울여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는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고 점점 더 절망과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지속되었을 때, 그는 인생의 모든 소망을 포기하였을 때 오는 아픔에는 체념이 가장 좋은 치료제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번 4월19 부활절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매우 뜻깊은 날입니다. 그런데 이 날은 동시에 장애인의 날이기도 합니다. 우선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이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우리나라 정부 통계에 의하면 정부에 정식으로 등록된 장애인들만 23년도 통계를 보면 264만 7,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5.1%를 차지합니다. 등록 안 된 분들을 포함하면 배 이상 약 500만 명으로 인구의 10분의 1이상이 장애인들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선천적 장애인은 아주 적고(10%미만) 대부분은 후천적 장애인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후천적 장애가 생기는 원인은 다양하지만, 환경오염과 산업화로 인해 오는 산업 재해가 그 원인 중에 하나 입니다. 이 말은 여기 예배자로 모인 우리 모두 장애인의 가능성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 모두가 다 예비 장애인으로 이 땅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루스드라의 앉은뱅이에게 바울이 복음을 가지고 나타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걸어본 적이 없던 앉은뱅이가 똑바로 일어서고, 뛰어다니는 이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혼자 일어설 수 없이 앉아서만 불편하게 지내던 사람이 사도 바울의 명령과 함께 벌떡 일어나게 되었으니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들은 너무 놀라서 바나바와 바울을 보고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왔다면서 그들에게 엎드려 제사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때 바울과 바나바가 양심이 조금 무딘 사람이었다면 그들의 제사와 경배를 그대로 받으면서 그 특권을 즐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으면서 그들의 하는 일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런 헛된일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서야 할 자리에 바로 설 수 있도록 깨우쳐 주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볼 것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Ⅰ. 자기 우상화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8절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자! 오늘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8절에 -발을 쓰지 못하는 분, 걷지 못하는 한 인생을 만나게 됩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의 주 사역, 사역의 우선순위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역이었습니다만, 말씀 사역과 함께 동반하신 사역이 바로 치유 사역이었습니다. 말씀 사역이 영혼을 돌아보는 사역이라면 치유 사역은 일차적으로 육체를 돌아보는 사역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영혼만 돌아보고 육체를 등한이 여기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이런 장애인들을 그대로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시각 장애인의 눈을 만지시고, 청각 장애인의 귀를 만지시고, 일어서지 못하는 지체 장애인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장애인의 몸을 만지는 일을 금기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회적 금기를 깨트리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시각으로는 그들 모두가 정상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소중한 인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부활 주일은 장애인의 날입니다. 우리교회도 선천적 장애를 앓고 있는 분만이 아니라 후천적 장애를 앓고 계신 분도 계십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분들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 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이 이 일어서지 못하는 장애인을 주목하며 제일 먼저 관심을 가진 것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9절에 보면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여기 바울이 주목하여 그 사람을 보았을 때, 그 사람에게서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바울의 설교를 듣는 순간 그 말씀이 그 사람 안에서 부딪쳐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거기에 앉아 설교를 들었지만 특별히 나면서 앉은뱅이였던 이 사람은 바울의 설교에 빨려들었고, 복음의 능력이 그 사람 속에 심겨졌습니다.
말씀이 능력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절대로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령 속에 뿌려지고 내가 그것을 접하게 될 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어도 믿음이 안 생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을 흘려들으면 아무리 들어도 믿음이 안 생깁니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속에 뿌려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때 그 믿음은 자라게 됩니다. 여기 보시면 이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바울이 뭐라고 선포합니까? 10절을 보세요.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이 충격적인 상황 앞에 당시 이 기적을 본 사람들의
Ⅱ. 사람들의 반응 (11-13)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여기 이 엄청난 기적 앞에 외칩니다. 12절에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여러분, 제우스 신 들어보셨지요? 그리스나 로마 신화에는 많은 신들이 나옵니다. 그중에, 제우스 신은 신들중의 신입니다. 최고의 신입니다. 주피터 신이라고도 합니다. 이들은 바나바를 제우스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바나바가 바울보다는 나이도 많고, 또한 체격도 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우스 신에게는 대변자 신이 있었습니다. 헤르메스 신입니다. 사람들이 가만히 보니, 바나바는 점잖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말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바울을 제우스 신의 대변자, 헤르메스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자고 합니다.
이런 자리에 서면 이 유혹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하면 특별한 대접을 받고 싶어 합니다. 돈 100억이 생겼다고 해보세요. 그러면 어디를 가든 대접이 달라집니다. 은행에 가면 직원들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전에는 창구에서 번호표 타고 기다렸는데, 바로 지점장실로 안내됩니다. 음식점에 가도 특별한 서비스를 받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아내의 대접이 달라집니다. 친구를 만나도 친구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나는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가 자기에게 거기에 걸맞은 대우나 대접을 해주지 않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화가 납니다. 그때 우리가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공과 행복의 때에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위기에 빠뜨리는 것은 비단 불행과 실패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불행 때문에 자살하기도 합니다만, 그것만이 우리 인생의 위기가 아닙니다. 성공과 행복 역시 우리 인생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고통의 때에 그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했고, 그래서 전쟁에 나갈 때마다 승리했습니다. 주변 국가들을 다 통치하고 나서 하루는 한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건 전쟁도 아니었습니다. 교만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까지 나갈 필요 없이 밑의 부하들만 내보냈습니다. 다윗은 그때 뭐 하고 있었습니까? 저녁때에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를 거닐고 있었습니다(삼하 11:2). 목욕하는 바세바를 보고 범죄하지 않았습니까? 그동안 살아왔던 그의 삶이 무너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성공의 너머에는 사단의 덫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한 사람의 믿음이 진실한 것인지 아닌지를 아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그 사람이 축복을 어떻게 관리하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고통을 관리하는 것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셨을 때 그 축복을 어떻게 관리하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의 순간에는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축복이 오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자기의 마음을 높입니다. 어느 순간에 자기의 마음을 높여 버립니다. 우리가 고통을 지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잘 관리하는 것은 더욱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전 10:12절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 합니다.
"나는 잘 서 있다"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일 수 있다는 겁니다. 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 자만하는 마음이 들어오면요, 영적인 긴장이 풀려버리고, 작은 유혹에도 휘청거리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수록 더 겸손해져야 합니다. 더 조심해야 하고, 더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믿음이 좋다고 느껴질 때일수록, “주님, 제 마음을 지켜주세요. 제가 교만하지 않게 해주세요” 하고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 나는 절대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자신만만했는데, 결국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 자신을 너무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늘 주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기도 없이는, 말씀 없이는, 은혜 없이 우리는 단 1초도 믿음으로 설 수 없습니다. 내 힘이 아닌 주님의 힘으로 오늘도 서 있어야 합니다. 성공과 행복의 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우리에게 쏟아부어 주실 때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낮추시기 바랍니다.
Ⅲ.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15절
15절을 보세요.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십니까. 우리도 당신들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당신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하는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사건에서도 베드로의 비슷한 반응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고넬료의 집에 찾아오게 되었을 때 고넬료가 너무 감격해서 엎드려 절하는데 그 절은 평범한 인사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의 등장하는 새시대를 열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었던 인간이라는 것을 절대로 잊지 않았습니다. 기적을 행한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연약한 질그릇임을 알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그것이 바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인 것을 인정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 같은데 우리는 종종 그것을 잊어버립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우상의 망상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요? 내가 사람인 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어서 그럽니다.
사실 이것은 사단이 맨 처음 인간에게 찾아와서 유혹할 때 사용한 미끼였습니다. 사단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 열매를 먹으면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단은 꼭 같은 작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 의견이 절대로 옳고 다른 사람의 의견은 절대로 틀리다고 주장하는 것은 나도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순간이나마 잊어버려서 그럽니다. 내가 사람인 이상 내 의견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이 어떻게 자신의 우상화를 극복할 수 있었어요? 자기 자신이 인간인 것을 인식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18절에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여기 ‘겨우 무리를 말려’ 당시 그 기적을 본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이 태도와 아랑곳하지 않고 이들을 추대하려는데 온 힘을 다 쏟는 장면입니다. 문자 그대로 "겨우 무리를 말렸다"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은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을 신으로 여기며 제사하려는 무리의 열정을 막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강조합니다. 바울이 왜 훌륭한 사람입니까? 바로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섰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자격 없는 나를 자녀 삼으신것도 감사한데 자신을 사도로 삼으시고 이 일을 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관리하지 못하고 이 교만의 병에 빠져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했습니다. 전도관의 박태선 장로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얼마나 대단한 설교의 능력과 특별한 능력을 주셨습니까? 그가 설교할 때에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찢어져 내렸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에 수많은 병자들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축복을 관리하지 못하는 교만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받은 은혜를 다 쏟아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 세상의 유혹을 뿌리치며 산다는 것,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주 넘어집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보혈의 능력을 붙잡고 일어서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죄 사함과 회복의 능력이 있으며, 신자가 겸손과 믿음으로 이를 의지할 때 나를 정죄하던 마귀는 반드시 패배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혈의 능력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신뢰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할 때, 사탄의 유혹과 공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두 사도처럼 인생의 영광의 환희에 찬 순간이 와도 자신의 분수를 넘지 않고 하나님 주신 축복을 잘 관리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주님이 칭찬하는 인생으로 나아가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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